취재

게임이 역사의 비극을 대하는 방법, '마이 차일드 레벤스보른'은 어떤 게임일까?

그루잠 (박수민) | 2018-05-13 15: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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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5월, 디스이즈게임은 잊혀져 가는 레벤스보른의 비극을 알리기 위해 제작중인 게임 <마이 차일드 레벤스보른>을 카드뉴스로 소개한 바 있습니다. 이 기사는 그때 소개된 <마이 차일드 레벤스보른>을 직접 플레이해 본 후 작성된 체험기입니다. (☞ 업그레이드된 카드뉴스 바로가기)

 

한 아이가 있었다. 아버지가 누군지 알 수 없었다. 어머니는 아이와 다시 만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아이는 전쟁고아였다. 2차 세계대전에 쓰인 화약 냄새가 가시지도 않았을 1951년, 홀로 지내던 당신은 그를 입양하기로 결정했다. 


밝고 총명한 아이였다. 숲의 나무 그루터기에서 보물창고를 상상했고, 그의 절친한 친구와 트롤(북유럽 신화에 등장하는 괴물)을 찾아다니길 좋아했다. 아이는 자신도 모르게 종종 독일어를 썼고, 어른들은 아이에게 손가락질하며 “나치의 자식”이라며 수군거렸다. 전쟁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노르웨이에서 아이는 끔찍한 “나치 독일의 잔재” 그 자체였다. /디스이즈게임 박수민 기자 

 

 ※ 디스이즈게임 <마이 차일드 레벤스보른> 특별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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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치의 아리아인 출산 장려 프로젝트 '레벤스보른 프로젝트'가 낳은 비극

‘레벤스보른(생명의 샘) 프로젝트’는 아리아인이 인종적으로 우월하다는 아돌프 히틀러의 주장에 의해 시작된 아리아인 출산 장려 프로젝트이다. 아리아인끼리 결혼해 아리아인의 순수 혈통을 지키자는 취지였다. 처음 레벤스보른 프로젝트는 친위대 장교 부부들로만 이뤄진 사교 단체로 시작됐다. 그러나, 문제는 언제나 그렇듯 그 프로젝트가 강제성을 띠기 시작하면서 불거진다.

레벤스보른 차일드의 세례식

나치 독일은 자신들이 점령한 전역의 아리아인을 강제 연행, 납치해 레벤스보른 프로젝트에 참여시켰다. 개중에서 노르웨이가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나치가 노르웨이의 여성들이 ‘가장 이상적인 아리아인’이라 판단했기 때문. 

세뇌당하고 강간당한 노르웨이 여성들은 강제로 아이를 낳았다. 순혈 아리아인으로 판정된 아이들은 독일로 입양보내졌다. 순혈 아리아인이 아닌 경우 아이를 버리거나 죽였다. 어머니는 아이의 양육권을 보장받지 못했다. 순혈 아리아인 아이는 '독일의 자식' 이었고 '히틀러의 아이'였다.

2차 세계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막을 내리고 독일은 패전국이 됐다.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았거나 모종의 이유로 노르웨이에 남아 있던 아이들은 순식간에 천애고아가 됐다. 아이들은 노르웨이 보호소에 남겨지거나 몇몇 가정에 입양보내졌는데, 그 아이들이 '레벤스보른 차일드'다. 

독일의 레벤스보른 육아소. 나치 친위대의 깃발이 펄럭이고 있다.

레벤스보른 차일드는 숱한 학대와 멸시를 받아야 했다. 나치의 피가 흐른다는 이유에서였다. 아이들은 노르웨이인에게 있어 작은 나치와도 같았고, 수십 년에 걸친 나치의 끔찍한 지배를 떠올리는 기폭제와 같았다. 아이를 향한 시선은 증오와 혐오로 물들어 있었고, 아이들은 나치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그 환멸을 견뎌야 했다.

이런 학대의 역사가 지나간 지도 어언 70년이 돼 간다. 어느새 레벤스보른 차일드의 학대는 역사서 한 장에 적힌 ‘지나간 일’이 됐고, 젊은 세대는 그 경험을 공유할 수 없게 됐다. 제작사인 테크노필롯(Teknopliot)과 사렙타스튜디오(Sarepta Studio)는 이 비극을 알게 되었고, 이것이 잊혀지고 있다는 것에 대해 큰 충격을 받았다.

그들은 이 비극이 잊혀지지 않길 바랐다. 그리고 지금도 고통 받고 있는 ‘적군의 아이들’을 사람들이 더 잘 이해하고 공감하길 바랐다. 2015년부터 게임 개발에 착수했다. <마이 차일드 레벤스보른>(My child Lebensborn)은 그렇게 시작됐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 유럽 전승일인 5월 8일 출시됐다.


<마이 차일드 레벤스보른>의 티저 영상



# "아이들이 제 가방을 찢었어요. 아무 이유 없이..."


<마이 차일드 레벤스보른>은 아이를 입양하는 장면에서부터 시작한다. 남자 아이인 ‘클라우스’(Klaus)와 여자 아이인 ‘카린’(Karin)중 한 명을 선택할 수 있다. 유저는 <마이 차일드 레벤스보른>을 플레이하면서 그 아이들의 양부모 역할을 수행한다. 아이를 성심성의껏 보살펴야 한다. 식사를 챙겨주는 것부터 시작해 옷 갈아입히기, 씻기기, 재우기, 심지어 잠들기 전 동화책을 읽어주는 행동까지 일일이 해 줘야 한다.

※ 아래 이미지들에 들어간 한글은 독자 편의를 위해 기자가 번역해 편집한 것임을 알립니다.

아이를 입양하는 모습과 재우기 전의 모습. 시간이 부족하다면 동화책을 읽어주지 않을 수도 있다.

게임은 총 5개의 챕터로 이뤄져 있으며, 한 챕터는 며칠의 기간으로 설정돼 있다. 하루에 총 7번의 행동 기회가 주어지고, 이 행동 기회는 아침 2번, 낮 2번, 저녁 2번, 잠들기 전(밤) 1번으로 이뤄져 있다. 세수 시키기, 식료품점 다녀오기 등 간단한 행위를 제외한 대부분의 행위는 1번의 행동 기회를 소모한다.

시간을 보내는 과정에서 유저는 아이들과 많은 대화를 하게 되는데, 이 대화를 통해 아이가 상처받지 않고 잘 지낼 수 있게 돕는 것이 <마이 차일드 레벤스보른>의 목표다. 

유저는 아이의 질문이나 부탁, 이야기에 대해 답변하는 방식으로 아이와 대화하게 되며, 답변은 주로 ▲​자상하게 ▲단호하게 ▲​중도적 입장으로 할 수 있다. 유저가 선택한 답변에 따라 아이의 행동, 적극성, 부탁의 내용 등이 달라지게 된다. 일종의 시뮬레이션 게임이라고 볼 수 있겠다. 

본격적인 게임을 시작하면 맞이하게 되는 아이의 모습은 의외로 아주 밝은 모습이다. 게임의 인트로에서 2차 세계대전의 비극, 노르웨이의 해방과 나치를 향한 분노 등을 보여주기 때문에, 아이의 밝은 모습은 꽤 낯설게 다가온다.

아이는 밝고, 명랑하다.

 

아이는 시종일관 밝은 표정으로 해맑게 이야기하며, 자신의 친한 친구인 리브(Liv)와도 잘 어울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양부모인 유저를 잘 따르고, 게임 시작 얼마 후 받게 되는 생일 선물을 진심으로 고마워하기도 한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고 숨바꼭질을 좋아하며, 웃음이 많은 평범하고 귀여운 어린 아이. 클라우스, 혹은 카린의 첫 인상은 그렇다.

그러나 이 밝은 분위기는 아이가 학교에 입학하는 순간 반전된다.

공동체 생활을 해 본 적 없고, 타인에게 노출된 적 없었던 아이들이 처음으로 ‘타인’과 맞부딪히게 되는 곳이 학교다. 그 말은 곧, 레벤스보른 차일드를 바라보는 혐오와 멸시의 시선들을 아이들이 처음으로 겪게 되는 곳이 학교라는 말과 같다. 

그 결과 아이는 점점 양부모인 유저를 믿지 못하게 된다.

레벤스보른 차일드가 비극인 이유는 아무것도 모르는, 심지어 위로 받아야 마땅할 어린 아이들이 격렬한 환멸의 시선과 감당하기 힘든 고통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이 때를 기점으로 아이는 점점 상처가 쌓여가며, 유저는 그의 상처를 보듬어 주는 데 전력을 기하게 된다.

학교 가기를 그렇게 고대했던 해맑은 아이가 “학교는 아주 엉망이야!”라며 실망하고, 아무도 그에게 말을 걸지 않으며, 또래 아이들의 집단 괴롭힘 대상이 되고, 심지어는 아이를 도와줘야 할 선생님조차 그를 “독일의 아이”라고 부른다. 아이는 주변 또래 아이들과 사람들이 자신을 괴롭히는 이유를 모르며, 그런 부당한 행위에 점차 지쳐간다. 아이는 학대 속에서 점점 무너져 간다. 

유저는 양부모의 입장에서 그 고통을 함께 감내하게 된다. 게임은 그 고통을 역사에 돌리지 않는다. 그 고통은 고스란히 유저의 몫이다. 유저는 게임 안에 직접 들어가 양부모 그 자신이 돼있기 때문이다.

아이의 말은 다름아닌 양부모인 유저에게 향해 있다.

 

 

# 손 쓸 도리 없는 비참함, 유저는 해 줄 수 있는 게 없다

<마이 차일드 레벤스보른>에서 눈여겨 볼 점 중 하나는, 게임이 아이가 아닌, ‘어른’의 시선으로 진행된다는 점이다. 앞서 말했듯, 유저는 아이를 입양한 양부모의 입장에서 게임을 진행하고 아이가 자라는 걸 겪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유저는 아이가 보는 세상보다 더 넓은 시야로 세계를 보게 되고, 더 많은 정보를 획득한다. 아이가 가지고 싶어 하는 가방을 사 주려면 야근해야 한다는 것, 직접 요리를 만들 시간이 없어 딱딱한 빵으로 끼니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 아이가 가끔 쓰는 ‘이상한 말’인 Oma가 ‘할머니’의 독일어인 것, 아이들이 괴롭히는 이유, 그의 친엄마가 클라우스를 잊고 새 삶을 살기로 결심했다는 것 등은 양부모인 유저만 알 수 있는 일종의 정보다.  

따라서 유저는 클라우스 뿐 아니라 그 주변 환경과 사회를 함께 보게 된다. 정기적으로, 혹은 비정기적으로 오는 ‘신문’이나 ‘편지’는 유저만 볼 수 있으며, 반대로 직접 편지를 작성해 클라우스를 돕기 위한 행동을 해야 할 때도 있다. 


클라우스는 모르는 세계를 유저는 알고 있다.

신문에는 한국전쟁의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아이가 친부모를 찾기 시작할 때부터 쓰는 일기에는 미처 몰랐던 레벤스보른의 정보 조사 결과나, 차마 아이에게 말하지 못한 친부모의 이야기, 아이의 학대를 가슴아프게 지켜봐야만 했던 경험 등이 담긴다.

‘차마 아이에게 말하지 못한’. 그렇다. 어른의 시선이기에 얻을 수 있는 추가적인 정보들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아이가 고통 받는 것을 알면서도 양부모인 유저가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할 때 또 하나의 고통이 된다.

아이에게 하지 못한 말들은 일기장에 담긴다.

‘나치에 대해 설명해준다’던가 ‘아이의 아버지(독일군)에 대해 설명해 준다’는 선택지가 있지만 게임을 플레이한 나는 차마 그 선택지를 누를 수 없었다. 어린 나이에 이미 큰 고통을 겪고 있는 클라우스(기자는 클라우스를 선택해 게임을 진행했다)에게 ‘더 가혹한 진실’을 말해 그 고통을 가중시킬 수 없었다. 아이가 받을 상처가 두려웠던 것.

게임 속 자신(양부모)이 경제적 형편이 넉넉지 못한 것으로 설정돼 있는 것도 유저의 고통을 가중시킨다. 매일 공장에 출근해야 클라우스를 굶기지 않을 수 있고, 간단한 선물 한 두 가지를 하려면 굳은 맘을 먹어야 하는 상황. 목도리를 사 주려면 며칠을 빵으로 때워야 하고, 목도리와 따듯한 음식을 모두 사려면 야근을 해야 하기 때문에 클라우스를 혼자 둬야 한다. 

곧바로 집으로 가자니, 클라우스가 갖고 싶다던 가방이 눈에 아른거리고야근을 하자니, 클라우스에게 오늘 어떤 일이 일어났을 지 걱정이 앞선다.

2~3일을 버틸 수 있는 음식을 한 번에 먹여 배부르게 해 줄 수도 없고, 허리띠를 졸라매야 겨우 가방 하나를 사 줄 수 있으며 아이들의 괴롭힘에 찢어진 옷을 꿰매 줄 시간도 부족하다. 아이의 학교에 항의하거나 아이에게 ‘괴롭히는 아이들을 무조건 피해라’고 말 할 순 있으나 직접 나서서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다.

유저는 무력감을 느끼고, 하릴없이 도돌이표같은 위로의 말만 해 줄 수 있을 따름이다. 아이는 점점 미소를 잃고, 양부모에 대한 믿음을 잃으며, 마음을 닫고 섬찟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와중에 아이의 친가족과 연락이 되지만 이는 더 큰 좌절로 이어지고, 유저는 또 다시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는 고통 속으로 빠진다.

이 그림을 주워들고, 나는 아이가 느꼈을 고통에 한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

이러한 무력감과 정보의 범람은 ‘어린 아이가 부당한 학대를 받는다’는 레벤스보른 피해자의 비극성과 그 배경을 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이 객관성은 ‘아이의 양부모’라는 주관성과 매 순간 맹렬히 충돌한다. 

객관성과 주관성의 충돌은 레벤스보른 차일드의 비극성을 극대화시키고, 게임을 플레이하는 유저로 하여금 더 깊은 인상을 받게 한다. 만약 유저가 아이의 시선에서 진행하는 게임이었다면, 그 아이를 둘러싼 역사의 비극을 모두 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마이 차일드 레벤스보른>은 비극을 직접 겪는 게임이 아닌, 그저 그런 ‘설명하는’ 교육용 게임이 됐을 것이다. ​

 

 

# 역사를 다룰 때, 게임은 어떻게 움직이는가

 

<마이 차일드 레벤스보른>을 플레이하고 나면 큰 좌절감을 느끼게 된다. 내가 직접 학대당하는 아이의 양부모가 되어, 그 학대의 현장과 아이가 무너지는 모습을 겪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좌절감의 근원은 “만약 내가 그 아이의 부모였다면”이라는 가정이 아닌 “내가 그 아이의 부모다”라는 사실적 감각에서 비롯된다. 이 감각은 게임이기에 느낄 수 있다. 소설, 영화 등 어디까지나 ‘제3자의 관찰자’로서 사건을 접하는 다른 미디어와 달리, 게임에선 캐릭터를 움직이고 그 안의 세계와 상호작용 하면서 ‘캐릭터 자신’이 되기 때문.

 

 

 

이런 직접 경험의 감각에 근거한 게임의 특성은 배포가 쉽고, 직관적이며, 유저를 지속적으로 플레이하게 할 수 있다는 다른 특성과 결합해 큰 시너지를 낼 수 있다. 다수의, 그리고 역사를 알아가는 데 다소 소극적인 사람들에게 효과적으로 역사의 본질을 파악하고 느끼도록 할 수 있는 것. 

 

개발자는 디스이즈게임과의 인터뷰에서, “젊은 청중을 위한 의미 있는 방식으로, 전쟁 중 태어난 아이들에 대한 인식을 창출하고자 게임을 개발하게 됐다”고 말했다. 또한 “사회적 과제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듣지만, 오늘날 우리는 너무 많은 이야기를 들으며 그런 문제에 대해 무감각해진다”고 지적하며 “게임은 이런 것들을 스스로 경험하도록 하는 훌륭한 방법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엘린 페스퇴이(Elin Festøy) 프로듀서와 토르라이프 블라트(Thorleif Blatt) 레벤스보른 협회장

제작사는 <마이 차일드 레벤스보른>의 비극적 사실감을 담아내기 위해, 이제는 노인이 된 레벤스보른 차일드를 찾아가 인터뷰하고 전문기관과 함께 연구했다. 그 결과, 그들의 의도대로 <마이 차일드 레벤스보른>은 증오가 무고한 아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여실히 보여주고 직접 느끼게 한다.

 

잊혀질 뻔 한 비극적 역사를 <마이 차일드 레벤스보른>이 담아냈듯이, 우리 주변에는 사회에 문제를 제기하는 많은 게임들이 있다. 전쟁의 참상을 피해자의 입장에서 다뤄낸 <디스 워 오브 마인>뿐 아니라, 대만의 역사를 다룬 <반교>, 인도의 인신매매 문제를 다룬 <미싱>, 전쟁에서 민간인 아이가 겪는 참상을 다룬 <라일라와 전쟁의 그늘>같은 게임도 있다.

 

사회에 많은 메시지를 던진 <디스워 오브 마인>과 <반교>

 

먼 나라의 이야기를 하기 전에, 당장 우리나라에도 많은 사회적 이슈가 존재한다. 어린 소녀들을 강제징집해 꽃다운 청춘을 찢어발긴 일본군 위안부, 군사독재에 맞서 피로 스러진 광주 5.18민주화 운동,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 한국인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수많은 필리핀의 코피노(Kopino)들. 

 

<마이 차일드 레벤스보른>이 개발된 노르웨이는 500만명의 적은 내수시장을 가지고 있다. 개인 투자자나 퍼블리셔는 게임 개발에 적극적으로 지원을 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마이 차일드 레벤스보른>이 세상에 나올 수 있었던 이유는, 노르웨이 영화 기금 등 국가 기관의 적극적인 지원과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역사를 정면으로 마주볼 수 있게 하는 의미 있는 게임들이 더 많이 나올 수 있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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