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

[김태곤] 당신에게 게임이란 무엇입니까?

빨리빨리 | 2011-04-06 14:30:44

 

언젠가 어떤 기자 분과의 인터뷰 도중에 저에게 있어서 게임이란 어떤 것이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개발 중인 게임의 소개를 위한 인터뷰였던 자리라 그 게임에 대한 자료와 설명으로 잔뜩 무장했던 저는 당황했습니다. 머뭇거리고 한참을 빙 둘러 얘기하다가 결국 게임이란 유저의 끊임없는 선택 과정이라는 취지의 얘기를 장황하게 했던 기억이 납니다.

 

게임을 만들어온 지가 벌써 15년인데 게임이 무엇이라는 명쾌한 정의를 내리지 못했다는 것이 부끄럽기도 했고, 하루하루 개발업무에 치여 게임이 무엇인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여유가 없었던 것은 아닌지, 혹은 여유를 핑계로 스스로의 일에 대해서 깊은 성찰을 갖지 않았던 것은 아닌지 반성도 했습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 격이 되겠지만 나중에라도 소를 또 잃지 않으려면 외양간은 고쳐 놔야 했습니다.

 

그래서 인터뷰가 끝나고 곰곰이 저에게 있어서 게임이란 무엇인가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멋지게 정의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사랑이나 결혼 등에 대한 재치와 진솔함이 넘치는 정의를 많이 봐왔던 저는 (결혼은 미친 짓이다! 라든지) 게임에 대해서도 그런 멋진 표현을 생각해 봤지만 역시나 마땅한 표현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몇 개의 주요 공식만으로 세상 이치를 알아낼 수 있는 물리나 수학에서의 정의가 게임에서는 통하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그 정의를 발견할 만큼의 지적 능력이 제게 없는 것인지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한마디로 명쾌하게 정의할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게임이 저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존재는 아니었습니다.

 

게임 개발을 업으로 삼고 있는 입장에서 게임은 저와 가족의 생계를 이어가는 수단이고, 제 자아를 실현하는 통로였습니다. 게임을 가볍게 즐기는 라이트 유저로서 게임은 남는 시간을 재미있게 보낼 수 있는 취미와 여가 활동이었습니다. MMORPG를 즐기는 헤비 유저로서의 저에게 게임은 현실과는 또 다른 경험을 체험해 볼 수 있는 제 2의 삶이었습니다.

 

전체를 아우르는 명쾌한 정의는 내리지 못했지만 게임은 제가 갖고 있는 여러 입장만큼이나 다양한 의미와 정의를 갖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게임에 대한 한마디의 정의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한마디의 말로 저를 정의할 수 없듯 게임 역시 다양한 모습으로 저와 함께하고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알기 때문입니다.

 

사람이란 참 이상한 존재라서 인생의 목표를 달성하는 데는 최고의 합리성을 보이지만 정작 인생의 목표를 정하는 데는 그렇게 비합리적일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어린이가 의사 선생님이 되고 싶다면 거기엔 합리적인 이유가 없습니다. 의사 선생님이 멋있어 보이고 좋아 보여서라고 하겠지만 세상엔 의사 선생님보다도 멋있고 좋아 보이는 직업이 분명 많이 있을 겁니다. 좋은데 이유가 필요합니까? 그런데 의사 선생님이 되기 위해서 이 어린이는 지극히 합리적으로 반에서 좋은 성적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노력하여 의과 대학에 가게 됩니다.

 

이 어린이에게 의사 선생님이 좋아 보였다면 저에게는 게임이 좋아 보입니다. 게임이 무엇인지, 왜 좋은지를 떠나서 좋습니다. 좋은데 이유가 필요하겠습니까? 제 삶의 각 입장에서 모두 게임이 좋습니다. 개발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으로서, 가볍게 즐기는 사람으로서, 진지하게 즐기는 사람으로서도 말이죠. 이제 제가 해야 할 일은 위의 어린이처럼 좋아하는 게임을 만들고 즐기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합리적으로 고민하고 성취하는 일일 겁니다.

 

이렇게 본다면 게임은 제가 인생을 걸고 벌인 주사위 던지기 도박에서 선택한 숫자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확률이 높아서 선택한 것이 아니라, 그냥 좋아하는 숫자를 선택하는 것처럼 게임을 선택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저에게 있어서 게임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또 다른 정의가 하나 생겼군요. 인생의 도박판에서 선택한 행운의 숫자라는 정의 말입니다. 그러나 이 정의 역시 이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의 저의 입장, 즉 게임이란 무엇인지 명쾌하게 설명해야 할 입장에서만 유효한 정의는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결국 저는 그때 그 기자 분이 질문하셨을 때에서 전혀 진전하지 못했습니다. 명쾌한 정의는 내놓지 못하고 장황한 설명을 하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달라졌습니다. 두 번째로 질문을 받은 만큼 노련함이 생겼습니다. 어려운 질문에 대한 답변을 살짝 회피하고 상대에게 공을 넘기는 노련함 말입니다.

 

그럼 나에게 이렇게 어려운 질문을 하고 계신, 그리고 이 글을 읽고 계신 당신에게 게임이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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