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석천의 시시각각] 검찰청의 편집자들 암니옴니 10-23 조회 2,580 0

(중앙일보에서 유일하게 읽을 만한 정치 관련 글을 쓰시는 분.)

 

[출처: 중앙일보] //news.joins.com/article/23610799

 

서울 지하철 2호선 서초역 6번 출구를 나오면 대검과 서울중앙지검이 보인다. 반포대로를 사이에 둔 두 검찰청엔 유능한 편집자들이 일하고 있다. 신문 1면부터 방송 헤드라인, 소셜 미디어의 타임라인에 내보낼 ‘단순하고 강력한 메시지’를 선별하면서.  

 

진술 확보, 전격 압수수색, 혐의 포착, 증거인멸 정황…. 검찰이 수사 기사의 흐름을 쥐락펴락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물증이 ‘단독’ 문패를 내건 속보들이다. ‘검찰에 따르면’ ‘법조계에 따르면’ ‘검찰 조사 결과’가 기사 앞에 붙고, ‘전해졌다’ ‘알려졌다’ ‘○○했다고 한다’가 후렴구로 달린다. 수사받는 자의 반박과 해명은 빈약하기 그지없다. 퇴화한 꼬리뼈처럼 보일 듯 말 듯 붙어있을 뿐이다.

 

대검 반부패부장과 서울중앙지검 3차장, 부장검사들이 카카오톡 단체 대화방 ‘JK’에서 사건 관련 기사와 주요 SNS 글을 공유한 이유는 뭘까. 특수 수사란 결국 이미지 싸움, 프레임 싸움이기 때문이다. 피의자들의 도덕성을 허물면 그들을 단숨에 무장해제 시킬 수 있다. 증거를 인멸하고 있다는 프레임이 한번 만들어지면 누구도 피의자들 옆에 다가서지 못한다. 고양이를 죽이는 것은 팩트(사실)가 아니라 뉘앙스다.

 

‘검찰 관계자’의 말이 결과적으로 옳을 수 있다. 수사 대상이 희대의 파렴치범일 수도 있다. 하지만 공개된 법정에서 진술과 증거로 확정되기 전까지는 한쪽 당사자인 검찰의 ‘주장’ 내지 ‘의혹 제기’일 뿐이다. 검찰과 피의자는 대등한 무기로 싸워야 한다. 이쪽엔 진짜 칼을, 저쪽엔 목검을 쥐여줘선 안 된다.

 

당혹스럽게도, 뉴스를 편집할 힘을 검찰에 준 건 ‘유죄 추정’ ‘검찰 편향’의 늪에 빠진 언론 자신이다. 검찰 간부 입에서 기삿거리를 얻어내려는 출입기자들의 조바심이, 눈 뜨고 큰 기사를 놓칠지 모른다는 데스크의 불안감이 검찰 권력의 그림자를 키운다. 이런 구도 속에 여론을 드리블하는 검사들의 현란한 플레이는 언제나 득점으로 연결된다.

 

어디 수사뿐이랴. ‘검찰총장의 검찰개혁’은 경마 중계하듯 보도된다. 행정부에 소속된 기관이 법무부 건의 절차도 없이 조직 개편(특수부 축소)을 발표할 수 있는가. 구성원들의 의견수렴을 거치지 않고 ‘총장 지시’로 할 수 있는 일인가. 그런 제왕적 결정 방식이야말로 검찰개혁에 역행하는 것 아닌가. 아무도 따져 물으려 하지 않는다. ‘법무부·검찰 주도권 다툼’ 쪽이 더 신나고 재미있으니까.

 

검찰 취재가 중요함은, 일선 기자들이 힘든 여건에서 취재하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검찰이든, 피의자든 잘못한 게 있으면 취재하고 기사 써야 한다. 문제는 취재 결과를 얼마나 제대로 검증했느냐다. ‘알 권리’는 기자의 땀과 고민을 요구한다. 자신이 쓰는 기사가 -피의자 방어권은 빠진- 또 하나의 공소장에 불과하다면 그 책임은 온전히 기자의 몫일 수밖에 없다.

 

“(혐의내용 유출을) 철저히 단속하고 있다.” (윤석열 총장) 검찰청의 편집자들은 뒷문으로 빠져나간다. 그렇다면 그동안 기자들이 검찰 수사 속보를 머릿속에서 자체 생산해왔다는 말인가. 그 무수한 ‘단독’들이 비판의 도마 위에 오르고 있는 지금, 기자들은 취재와 보도의 문법에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 돌아봐야 한다. 언론이 확인 의무를 다하지 않는다면 세월호 때와 다른 게 무엇인가.

 

군사정권이 보도를 통제하던 1984년 ‘거리의 편집자’라는 칼럼이 있었다. 거리에서 신문을 파는 이들이 톱 기사 대신 1단짜리 기사에 빨간 줄을 쳐서 그날의 주요 뉴스를 다시 편집하던 시대의 풍경을 그렸다. 보도 통제가 사라진 2019년 언론은 스스로의 편집권을 검찰에 넘겨주고 있다.  

 

그때 그 칼럼처럼 ‘히죽이 웃을 수밖에 없는’ 자괴감으로 끝을 맺고 싶지 않다. 언론의 자존심이 살아 있다면 검찰청의 편집자들에게서 뉴스를 되찾아오자. 토론하고 또 토론해서 수사 보도의 원칙을 세우자. 그것이 시민들에게 복무하는 언론의 바른 자세다.

 

권석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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