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

플로렌스, 사랑과 성장을 보여주는 이토록 아름다운 방식

너부 (김지현) | 2018-03-02 18: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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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적 사운드와 동화 같은 아트, 사랑과 자아 찾기라는 주제까지. 밸런타인데이에 출시된 인터랙티브 게임, <플로렌스>는 몽환적 그래픽으로 유명한 <모뉴먼트밸리> 개발사의 신작이다. 

 

<플로렌스>는 주인공 '플로렌스'와 첼로 연주가 '크리시'의 사랑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풋풋한 첫 만남과 사소한 다툼, 그리고 이별의 과정까지 적나라하게 담고 있다. 물론 사랑이 게임의 전부는 아니다. 연애라는 일련의 과정을 통한 플로렌스의 성장기라 보는 것이 맞다.

 

게임은 드래그나 터치 같은 단순 조작의 반복으로 진행된다. 하지만 같은 방식의 조작으로도 컷마다 사랑, 외로움 등 새로운 감정을 전달하는 점이 특징이다. 25세 여성, '플로렌스'의 입장에서 전개되는 게임이기 때문일까? 같은 장면에서 유저들의 감상은 조금씩 엇갈렸다.​ 성별도 나이도 연애 경험도 모두 다른 TIG 두 기자가 느낀 <플로렌스>는 어땠을까? 함께 후기를 나눴다. /디스이즈게임 김지현, 김영돈 기자

 


  

<플로렌스>는 진부한 일상을 반복하던 주인공 '플로렌스'가 젊은 첼로 연주가 '크리시'를 만나 사랑에 빠지면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게임은 대화 없이 그림과 단순한 상호작용으로만 진행되는 것이 특징인 인터렉티브 게임이다. 

 

개발사: 스튜디오 마운틴스

플랫폼: iOS

가격: 3.29달러

다운로드 링크: //goo.gl/N7DvBR

 

※ 이 글에는 <플로렌스> 스토리 스포일러가 아주 많이 포함돼 있습니다. 다만 글을 읽었을 때와 플레이했을 때 게임이 주는 감정이 매우 다릅니다. 리뷰를 읽으셨더라도 직접 플레이하시길 권장합니다.



Scene #1. '추억'

 

무료한 직장 생활을 이어오던 플로렌스. 집을 청소하던 그녀는 벽장에서 어린 시절 사용하던 물건들이 담긴 작은 상자 하나를 발견한다. 상자 안에는 어렸을 적 색종이로 만들었던 나비 그림이 들어 있었고, 이를 본 그녀는 미술을 좋아하던 어린 시절과 지금은 소홀해진 어릴 적 친구들을 회상한다.

 

 

수기파: 어렸을 적 일기나 사진 같은 거 모아두는 억 박스, 집에 하나쯤은 있죠?

너부: 당연하죠친구들한테 받았던 편지나, 어렸을 때 그렸던 그림 노트 같은 것도 넣어두고 했었어요. 가끔 청소할 때 눈에 띄면 꺼내보기도 하는데 재밌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한 묘한 기분이 들 때가 많아요. 그래서 그림을 바라보는 플로렌스의 무표정만 봐도 어떤 감정을 말하는지 예상이 가더라고요.

 

 



수기파:  이 챕터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을 꼽자면 이 장면을 꼽고 싶어요. 그림 아래의 시곗바늘을 돌리면 시간이 흐르면서 친구들과 플로렌스 사이가 점점 멀어지잖아요. 

 

어린 시절 친구가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친구들과 멀어진다는 느낌이 너무 생생했어요. 어렸을 때의 나는 지금의 친구들과 멀어질 거라는 생각을 못 했을 거 아니에요. 근데 지금 제 나이에서는 친구들과 소홀해지는 느낌을 확실히 체감하니까 괜히 시계를 돌리기 싫더라고요.

 

너부: 저도요. 맨날 학교에서 보던 애들을 지금은 1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하잖아요. 시계가 나오자마자 어떤 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될지 짐작이 가니까 시계 돌리기가 머뭇거려지더라고요.

 

수기파: 지금의 모습이 싫은 것도 아니고,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을 되돌아보고 시간을 돌리는 것뿐인데, 일반적인 게임에서 평범하게 퀘스트를 수행하는 거랑은 전혀 다른 오묘한 감정을 느꼈어요.

 

 

Scene​ #2. '음악'

 

음악을 들으며 길을 걷던 중 핸드폰 배터리가 닳아 헤드셋을 집어넣은 플로렌스. 그녀는 길거리에서 감미로운 첼로 소리를 듣게 된다. 자신도 모르게 연주 소리를 따라 길을 걷던 플로렌스는 첼로를 연주하는 '크리시'를 처음 마주하게 되고 그에게 반하게 된다.

 

 

수기파: 배경이랑 플로렌스는 회색빛인데, 핸드폰 안에 있는 사진만 밝고 화려하네요.

 

너부: 내 일상은 여전히 재미없는데, SNS에 사람들이 올린 일상은 너무 행복해 보일 때 ​열등감 느끼긴 하죠. 실제로 게임에서처럼 파티하는 사진이나, 애인과의 셀카, 여행 사진처럼 본인의 행복한 모습만 SNS에 올리기도 하고요.

 

수기파: 심지어 사진 속 얼굴이 딱히 자세히 보이는 것도 아니예요. 사실 남의 게시물을 그렇게 자세히 보지도 않고, 나한테 중요한 내용도 아니지만 다른 사람이 행복해 보이는 것만으로 기분이 착잡할 때가 있죠. 전 게임을 할 때도 새로고침 버튼만 눌렀지 '좋아요'는 안 누르게 되더라고요.

 

너부: 크리시 만나는 장면이 너무 좋았던 게, 계속 무채색이었던 플로렌스가 크리시의 첼로 소리를 따라 걸으면서 점점 밝은 색깔로 표현되잖아요. 이성에게 처음 반하는 순간이 서정적으로 잘 표현된 것 같아요.

 

수기파: 맞아요. 로렌스만 변하는 게 아니라 배경도 밝아지고, 표정도 좀 더 행복한 표정으로 변하죠.

 

 

Scene​ #3 '충돌'​​

 

평소와 같이 평범하고 반복적인 일상을 보내던 플로렌스. 그녀는 자전거를 타고 거리를 지나던 중 우연히 길을 걷는 크리시를 발견한다. 크리시를 바라보는데 정신이 팔린 플로렌스는 어딘가에 부딪혀 넘어지게 되고, 넘어진 그녀를 크리시가 일으켜주면서 둘은 처음 대화를 나누게 된다. 그리고 이 사건을 계기로 둘은 서로의 연락처를 교환한다.

 


 

너부: ​여기서 라디오 주파수를 찾는 것처럼 눈금을 돌리면서 그림의 초점을 맞춰야 스토리가 진행되잖아요. 플로렌스가 어딘가에 부딪혀서 넘어진, 어질어질한 상황뿐 아니라 플로렌스랑 크리시의 '충돌', 첫 만남의 느낌을 생생하게 느껴지더라고요.

 

수기파: 사람과 사람이 서로 다른 삶을 살고 있다가 어떤 사건을 계기로 대화를 나누고, 아는 사람이 되는 것 자체가 충돌이라고 볼 수 있는 것 같아요. 주위의 커플한테 물어봐도 첫 만남은 항상 사고 같다고 하잖아요. "우리는 꼭 만나야 하는 운명이었어."라고 말하는 사람 없죠. 

 

 

Scene​ #4 '첫 데이트'

 

연락처를 주고받은 후, 처음으로 데이트를 하게 된 두 사람. 서로 어색하기만 했던 첫 만남과 달리, 데이트를 반복할수록 둘의 마음은 통하게 되고, 결국 플로렌스와 크리시는 연인이 된다.​

 


 

너부: 퍼즐로 대화를 표현했다는 점이 너무 좋아요.
 
수기파: 사람의 대화가 퍼즐 맞추기랑 비슷하다는 걸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는데, 게임을 하면서 정말 그렇다고 느꼈어요. 일반적으로 퍼즐은 맞추기 쉬운 가장자리부터 맞추잖아요. 대화도 처음에는 서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조심스러우니 꺼내기 쉬운 얘기들로 시작하고요.
 
너부: 저도 남자친구 처음 만났을 때,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니까 무슨 얘기를 꺼내야 할지 모르겠는 거예요그래서 처음에는 쉽게 얘기를 꺼낼 수 있는 영화나, 최근 이슈로 대화를 시작했는데 좀 더 가까워지면서 얘기할 수 있는 주제도 늘어나고 대화 자체도 아주 편해졌죠. 그래서 대화를 퍼즐로 묘사한 걸 처음 봤을 때 약간 감탄했어요.
 
수기파: 연인과의 대화뿐 아니라 일반적인 대화도 퍼즐에 비유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처음에는 어떤 얘기를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지낼수록 상대방과의 공감대가 만들어지죠. 퍼즐 조각 수가 줄어들고 맞추기 쉬워지는 것처럼 말이에요.

 

 

Scene​ #5 '꿈'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난 플로렌스와 크리시. 유명한 첼로 연주가를 꿈꾸는 크리시는 대화를 나눌 때 종종 본인의 꿈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고, 플로렌스는 이를 흐뭇한 표정으로 듣는다. 하지만 플로렌스는​ 그의 꿈 얘기를 들을 때마다 접어뒀던 자신의 꿈을 회상하며 씁쓸한 표정으로 집에 돌아가곤 하는데...​

 

 

수기파: 저는 여기서부터 좀 더 감정을 이입하게 됐어요. 이전까지는 플로렌스의 삶을 관찰하는 느낌이었고, 크리시도 한 명의 등장인물일 뿐이었죠. 근데 크리시가 플로렌스에게 꿈에 대해 말하는 걸 보면서 왠지 저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단순히 잘 먹고 잘사는 게 아니라 자기가 잘하고 싶은 분야에서 인정받고 싶다는 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꿈이라 생각해요그런 모습을 크리시를 통해서 잘 보여준 것 같아요. ​

 
너부: 전 인이 하고 싶은 꿈을 가지고 있는 것 자체가 부러워요.
 
수기파: 크리시가 플로렌스에게 꿈 얘기를 한다는 건 서로 많이 가까워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정말 친한 사람한테만 꿈에 관해 얘기하는 모습을 크리시를 통해 보여주는 것 같아요.
 
너부: 원래 친한 사람, 특히 연인한테는 본인이 하고 싶은 것 이런 걸 얘기하는 편이에요?
 
수기파: 저는 그랬어요. 꿈이나 하고 싶은 일은 내가 사람들한테 보여주고 싶은 솔직한 모습인데아무한테나 보여줄 수는 없거든요. 제 주변의 남자친구들을 보면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주저하는 친구들이 있어요. 현실성이 조금이라도 떨어지는 얘기라고 생각이 들면 쉽게 말하기 힘들어하죠친구들한테 말하면 서로 비웃거나 공격하기도 하고, 남자들 사이에서 꿈 얘기는 술주정 정도로 할 수 있다고 해야 하나? (웃음)
 
너부: 그만큼 꿈은 쉽게 꺼내기 어려운 주제긴 하죠. 저는 크리시도 그렇지만 플로렌스의 저 흐뭇한 미소가 공감돼요. 저도 남자친구가 그런 얘기를 할 때마다 듣는 것만으로 행복해요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이런 꿈을 꾸고 있으면 멋있기도 하고 도와주고 싶은 생각도 들고요.
 
수기파: 이런 얘기를 들으면 응원하고 싶고, 밀어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는 거예요?
 

너부: 그렇죠. 남자친구가 잘 됐으면 하는 건 당연하고, 사실 행복하게 말하는 모습만 봐도 기분 좋죠.

 

 

Scene​ #6 '식료품 사기'


​식료품을 사기 위해 장을 보러 온 플로렌스와 크리시. 둘은 장을 보던 중 사소한 말다툼을 겪게 되고, 토라진 둘은 서로 한마디 말도 없이 집으로 향하게 된다. 하지만 참다 못한 플로렌스가 크리시에게 먼저 말을 걸면서 두 사람은 무사히 화해하게 된다.​​

 



수기파: 왜 하필 식료품 사기일까요? 대단한 일도 아닌데 말이죠.

너부: 연애 초반 다툼은 정말 사소한 부분에서 시작되잖아요. 사람들 대부분이 연애 초반에 엄청 싸워요. 서로의 공감대나 취미에 맞춰서 데이트하고, 대화하긴 하지만 둘은 전혀 다른 삶을 살아왔잖아요. 사소한 부분부터 안 맞는 부분이 많을 수밖에 없죠.

수기파: 이 챕터에서 둘의 대화를 보여주는 카메라 연출이 인상 깊었어요. 크리시가 말을 할 때 카메라 앵글이 크리시 쪽으로 돌아가면서 퍼즐이 맞춰지는 모습을 보여주고, 플로렌스가 말할 차례가 오면 유저가 직접 시점을 플로렌스 쪽으로 옮겨서 퍼즐을 맞춰야 하죠. 그리고 내가 퍼즐을 다 맞추면 다시 크리시 쪽으로 시점이 옮겨지면서 퍼즐이 맞춰지죠. 정말 말을 주고받고 대화하는 분위기가 나요.

너부: 다툼에 대한 묘사도 좋았어요. 둘이 싸우기 시작하면 퍼즐 조각의 연결 부분이 둥글다가 각진 모양으로 변하기 시작해요. 다툼이 시작되면서 딱딱해지는 대화 분위기를 대사가 아니라 퍼즐 조각만으로 묘사한 거죠. 싸움이 고조될수록 말이 빠르게 나오는 것처럼 조각이 맞춰지는 속도도 좀 더 빨라지고요.

말싸움의 클라이맥스(?)에서는 둘의 대화를 함께 보여주는 것도 좋았어요. 정상적으로 대화를 할 때는 말을 주고받으면서 이야기가 진행되잖아요. 근데 말싸움할 때는 상대방 말이 끝날 때까지 안 기다리거든요. (웃음) 본인이 하고 싶은 말만 하는 거죠.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한번 해보자." 식으로 말이죠.

수기파: 말을 얼마나 하느냐에 따라 캐릭터 일러스트가 시소처럼 오르락내리락하는 것도 정말 싸우는 느낌이 나요. 계속 말을 안 하면 일러스트가 내려가고, 왠지 지는 느낌이 나서 나도 말풍선을 빨리 만들게 되더라고요.

너부: 말싸움하다 보면 누가 이 대화에서 우위를 잡고 있는지 느껴지죠. ​경쟁하는 것도 아닌데.

수기파: 맞아요. 갑자기 상대방만 말하고, 대화를 주도하고 있으면 뭔가 화나고 억울한 느낌이 들긴 하죠. 괜히 상대방이 말을 막 쏟아내면 나도 그만큼 쏟아내고 싶고요.​

 

 

Scene​ #7 '이사 옴'

 

순조롭게 연애를 하던 플로렌스와 크리시. 연애 시작 후 6개월이 지난 어느 날, 둘은 동거를 결심하게 되고크리시는 플로렌스의 집에 이사를 오게 된다. 그리고 크리시는 자신의 물건을 플로렌스의 집에 하나씩 꺼내기 시작한다.

 



수기파: 저는 플로렌스 물건 중에서 빼기 싫은 물건이 너무 많았어요. 집에 있는 물건 대부분이 여자친구의 삶 자체니까요. 그래서 저는 최대한 여자친구 짐은 두고, 제 물건은 최소한으로 뺐어요.

 

예를 들어서 책은 많으니까 하나 치워도 될 것 같고, 가족사진은 중요한 물건이니까 안 뺐죠. 그리고 여자친구도 피규어 하나 있으니까, 나도 균형을 맞추기 위해 내 피규어도 하나 빼고. 여자친구도 사진 있으니까 나도 균형을 맞추기 위해 사진 하나 놓고.

 

너부: (웃음) 저도 그건 동감해요. 같은 카테고리에 있는 물건들은 원래 있던 물건을 치워서라도 옆에 놨어요. 예를 들어 플로렌스도 슬리퍼가 있고, 크리시도 슬리퍼가 있으면 플로렌스 슬리퍼 옆에 크리시 슬리퍼 뒀어요. 똑같이 운동화가 있으면 플로렌스 운동화 옆에 크리시 운동화를 나란히 뒀죠.​그런 거 있잖아요. 커플 아이템을 차곡차곡 쌓아두고 싶은 느낌?

 

그리고 크리시한테 정말 소중한 물건은 꼭 놨어요. 크리시는 음악을 좋아하는 친구잖아요. 내가 플로렌스고, 내가 크리시의 꿈을 응원해주는 사람이라면 크리시한테 소중한 물건은 나한테도 소중한 물건이니까요.

 

수기파: 저는 정말 크리시 시점에서 물건을 놨어요. 네 삶은 네 삶이고, 내 삶은 내 삶이니 최대한 여자친구의 삶을 존중하는 방향으로요.

 

너부: 그러니까 여자친구의 삶은 최대한 건드리지 않되, 내가 정말 필요한 물건만 놓자 그거군요.

 

수기파: 그렇게 중요한 장면은 아닌데, 남자와 여자가 각자 어떤 입장에서 서로를 대하는지 보여주는 것 같아요.

 

 

 

너부: 다른 물건은 엄청 많은데, 화장실에는 칫솔 하나 두는 거 너무 웃기지 않아요? 진짜 이러나요?

 

수기파: 클렌징폼이랑 칫솔만 있으면 되죠 뭘...

 

너부: 정말요? 드라마나 영화 보면 남자들이 여행 갈 때 "칫솔만 들고 왔어" 라고 말하는 장면 있잖아요. 저는 그냥 꾸며낸 얘기인 줄 알았어요.

 

수기파: 아, 방금 그 장면이 그런 걸 묘사한 거였어요? 딱히 특별하다고 못 느꼈는데.

 

너부: ...?

 

 

Scene​ #8 '침식'​​

 

플로렌스와 크리시의 동거가 시작된 지 1년, 둘에게 권태기가 찾아온다. 누구보다도 음악에 열정을 다하던 크리시는 아카데미에서의 생활에 점차 지쳐가고, 플로렌스는 크리시를 만나기 이전처럼 반복되는 일상에 무료해하는 모습으로 돌아간다.

 



수기파: 이 장면은 이 게임을 해본 사람이라면 가장 슬프다고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노란색으로 칠해져 있는 크리시를 손으로 긁으면, 무채색에 가까운 현실적인 모습으로 변하죠. 연애 초반에 꿈 얘기를 할 때만 해도 반대였잖아요. 무채색 말풍선을 손으로 긁으면 노란색으로 빛나던 크리시의 모습이 나왔는데 말이죠.

 

너부: 개인적으로 이 장면은 꿈이 현실로 다가왔을 때를 나타낸 것 같아요. 크리시가 상상하던 본인의 모습은 행복한 얼굴로 첼로를 연주하고 있고, 꿈을 나타내는 것처럼 음표들도 크레용으로 그려져 있었죠

 

꿈이 현실이 된다는 건 행복한 일일 수도 있지만, 언젠가는 장벽을 마주하게 되요. 사실 사람이 좋아하는 일과 잘하는 일은 다를 수 있잖아요. ​크리시도 마찬가지예요. ​크리시는 연주하는 걸 좋아하지만, 아카데미 안에서는 학생들 간의 경쟁이 있을 테고, 그 누구보다도 연주를 잘 하려면 고난의 시간을 보내야겠죠. 더 이상 크리시한테 음악이 꿈이 아니라 현실이 되었고, 그래서 지친 것 같아요.

 

수기파: ​저는 플로렌스가 가지고 있던 크리시의 첫인상이 변한 것 아닐까 생각했어요. 한 마디로 콩깍지 벗겨졌다는 거죠. 맨 처음 크리시를 만난 장면이나 바라보는 장면들은 대부분 꿈처럼 묘사됐잖아요. 

 

조금 더 객관적으로 바라보면 사실은 오른쪽의 그림이 진짜 크리시의 모습이 아니었을까요? 지금까지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지만, 서로 익숙해지면서 좀 더 현실적인 모습을 보게 된 거죠. 크리시 개인의 변화일 수도 있지만 연애하면서 콩깍지가 벗겨지는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으로도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Scene​ #9 '다툼' & '흩어짐'​​

 

잦은 다툼으로 서로에 대한 악감정이 쌓인 플로렌스와 크리시. 평범하게 집안일을 하던 중에도 둘은 서로에게 날카로운 말을 주고받게 되고, 결국 대화는 말싸움으로 이어지게 된다. 계속되는 싸움에 지친 둘은 연애가 끝났음을 직감하며 쉽사리 잠에 빠지지 못한다.

 

 

너부: 지금까지 나왔던 대화랑 많이 달라요. 말풍선도 붉고, 크리시가 말을 꺼낼 때 퍼즐이 올라오는 속도도 빠르고요. 게다가 말풍선이 지나가는 게 아니라 머리 위에 쌓여요. 

 

수기파: 싸움이 가장 고조됐을 때는 즐 조각을 맞추는 게 아니라 조각 하나만 올려도 말풍선이 완성되잖아요. 이걸 보고 전 서로에게 상처 되는 말을 일부러 내뱉는 거라 생각했어요. 서로가 들었을 때 가장 기분 나쁜 말을 알면서도 거르지 않고, 직설적으로 하는 거죠.

 

너부: 연애 기간이 길어질수록 편해지는 만큼, 말도 거칠게 나올 때가 많아요. 서로를 잘 알고, 친할수록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대화인데 플로렌스와 크리시는 험한 말까지 쉽게 뱉을 정도로 악감정이 쌓인 상태인 거죠.

 

평범하게 대화할 때는 여러 조각의 퍼즐을 맞춰야만 말풍선이 올라가지만, 싸우기 시작하면서 말풍선 퍼즐 조각이 하나가 돼요. 일상적인 대화보다 험한 말을 하는 게 더 쉬워진 사이가 됐다는 걸 말하는 것 같아요. 권태기 연인의 상황을 정말 잘 표현한 부분이죠.

 

 


 

수기파: 다툼이 끝나면 플로렌스랑 크리시의 모습이 퍼즐 조각으로 나오죠. 이 게임을 해본 사람이라면 퍼즐이 맞을 거라 생각하고 조각을 맞춰볼 거에요. 그런데 플로렌스와 크리시, 큰 조각 두 개는 맞출 수가 없어요. 서로를 안 맞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된 거죠.

 

너부: 이별을 직감하는 순간이 딱 이런 느낌이죠. 어떤 방향으로 맞춰도 맞지 않다는 게 체감되고, 억지로 붙이려고 해도 붙지 않죠. 보통 이런 싸움이 반복되면 서로 느끼죠.

 

수기파: 저번에 보니까 두 조각을 어떻게든 붙여보시려고 하더라구요.

 

너부: 저 상황 생각만 해도 끔찍하죠. 마주 보게도 놓고, 등 돌린 모양으로도 놔봤어요. 저는 안 맞을 거라는 생각을 전혀 못 했거든요. 그래서 이 장면이 약간 충격이었죠. 감정이입하면서 한참을 맞춰봤어요.

 

 

Scene​ #10 '조각'​​

 

크리시와 헤어진 후 집에 혼자 남은 플로렌스. 집 안에서뿐만 아니라 오랜 시간 일상을 공유해오던 크리시의 부재에 허전함을 느낀 그녀는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소식을 알린다.​

 

 

수기파: 이 장면은 이별을 이겨내는 장면일까요?

 

너부: 이겨낸다기보다 공허한 거죠. 우리도 그렇잖아요. 아침부터 잘 때까지 계속 카톡 하던 친구가 하루아침 사이에 없어지거나, 주말마다 데이트하다 어느 순간 집에만 틀어박혀 있으면 상당히 허전하겠죠.

 

엄마한테 전화하는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돼요. 엄마는 언제나 내 편에 서주는 가장 가까운 사람이잖아요. 정말 위로받고 싶다면, 엄마한테 연락할 수 있겠다고 생각해요.

 

수기파: 맞아요. 엄마한테 전화했다는 건 내가 정말 힘들다는 거예요.​ 

 

 

Scene​ #11 '깨어남'​​​

 

이별 후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크리시에 대한 그리움과 슬픔을 이겨낸 플로렌스. 그녀는 과거 크리시에게 받았던 미술용품을 꺼내 들고, 예술 활동에 몰두하기 시작한다. 그 외에도 소홀했던 어머니와의 시간을 보내거나 스케치 모임에 참석하는 등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한 시간을 보내기 시작한다.​

 


 

너부: 저는 플로렌스가 깨어나는 장면이 인상 깊었어요. 저 손바닥 버튼은 크리시를 음악 아카데미로 들이밀 때 처음 나오거든요. <플로렌스>에서 손으로 누군가를 미는 것은 응원하는 행동이나 마음으로 표현했다고 생각해요.

 

이 챕터에서 플로렌스가 응원하는 대상은 자기 자신이에요. 과거의 플로렌스는 크리시만 응원해왔었죠. 지금은 이별의 상처를 치유하고 자신을 위한 삶을 살아야겠다 다짐한 것 아닐까요?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자신을 지지하고 밀어주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말이죠.

 

수기파:  그다음 장면이 인상적이었어요. 플로렌스가 그림을 그리고 있고, 시계를 돌리면 플로렌스랑 배경에 색이 더해지면서 점점 화사해지는 장면이요. 이전까지랑 다르게 처음으로 시계를 돌리고 싶었어요.

 

 


 

너부: 자신을 위한 활동으로 삶을 가득 채우는 모습도 보기 좋았죠. 크리시와 추억을 쌓아온 과정이 나쁘다는 게 아니라, 연애할 때와 다르게 온전히 나를 위해 사는 모습이 보기 좋다는 거죠.

 

수기파: 시곗바늘을 돌리는 상호작용처럼 지금까지와 똑같은 방식으로 스토리가 진행되면서도 느껴지는 감정이 전혀 다르죠.

 

 

Scene​ #12 '마음의 정리'​​​​

 

예술 활동을 이어온 플로렌스는 회사를 그만두기로 하고 짐을 정리한다. 짐을 정리하던 중, 크리시와 찍은 사진을 발견한 플로렌스는 사진을 바라보며 밝은 미소를 지은 후, 회사에서 사용하던 짐과 함께 사진을 보관한다.

 

 

너부: 처음에는 상자에 전 애인의 사진을 보관한다는 걸 이해 못 했거든요.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플로렌스>에서 마음의 정리는 '소중히 간직한다.'는 의미보다는 나에게 불필요한 물건과 감정들을 '접어둘 수 있게 됐다.'는 것을 뜻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결국 헤어졌지만 크리시는 플로렌스의 꿈을 다시 꺼내준 중요한 사람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좀 더 행복한 마음으로 접어둘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이 드네요.

 

수기파: 저도 그 얘기를 들으니 좀 더 공감되는 것 같아요. 근데 저는 마지막 장면까지 크리시가 궁금했어요. "크리시는 잘살고 있을까?" 하면서요. 크리시에 몰입을 많이 하다 보니 헤어진 이후의 이야기는 마치 전 애인의 얘기를 듣는 기분이 들었어요. 너무 찌질한가요

 

너부: 이런 찌질함 좋아요. 크리시 입장에서 바라봤을 때 이 엔딩 어때요? 씁쓸한가요?

 

수기파: 씁쓸하죠. 저는 닫힌 결말인 점이 싫어요. 딱히 재회를 바라는 건 아니지만 플로렌스에 완전히 몰입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야기의 결말을 보여줘서 조금 몰입이 깨지기도 하고요.

 

 

너부: 여전히 크리시에 몰입하고 있어서 그런 것 아닐까요? 제 주변 남자분들이 마지막 챕터부터 이입을 제대로 못 하는 것 같아요. 개인적인 생각인데 남자 유저들의 대부분은 어느 정도 크리시에 자신을 투영했을 거란 말이에요. 근데 결국 크리시랑 헤어졌으니...

 

수기파: 찌질한 파트니까 제가 말할게요. 이 스토리의 결말대로 진행되면 크리시는 이제 없잖아요. 그런데 잊히고 싶은 남자가 세상에 어딨겠어요. 플로렌스 입장에서 좋은 엔딩으로 끝난 점은 좋지만, 사실 별로 이입하고 싶지 않은 결말이긴 해요.

 

너부: 저도 똑같은 생각을 했어요. 남자친구도 플레이하는 내내 크리시랑 플로렌스랑 연애하는 중에는 흐뭇하게 보다가 헤어지니까 말이 급격히 없어지더라고요.

 

수기파: 그래서 남자의 시점에서 바라보는 게임도 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이 들었어요. <플로렌스>는 여성의 입장에서 전개되는 게임이다 보니, 남자의 심리는 전부 말해주지 못하는 것 같아요.

 

플레이해보니 <플로렌스>는 영화 라라랜드랑 스토리 구조가 꽤 비슷해요. 남자와 여자가 사랑해서 만나고 이별하죠. 하지만 영화는 여자와 남자, 두 명의 결말을 모두 보여주는 편이라 앞으로 인물들의 삶을 상상이라도 할 수 있지만 <플로렌스>는 그런 면에서 조금 찝찝하긴 하죠.

 

너부: 아무래도 플로렌스가 주인공이니 어쩔 수 없이 생기는 아쉬운 부분이죠. 

 



 

# <플로렌스>, '게임'으로서 그리고 '인터렉티브 콘텐츠'로서 어땠어요?

 

​Q. <플로렌스>, 게임으로서 어땠나요?

 

너부: 게임으로서는 딱히 특별한 점은 없는 것 같아요. 단순한 상호 작용으로 진행되는 인터렉티브 게임은 많은 편이잖아요. 시스템적인 부분이나 스토리를 풀어가는 방식에서는 특별한 점은 없었던 것 같아요.

 

수기파: 게임의 범주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다르긴 한데, 저는 게임을 '유저에게 스토리를 따라갈 수 있는 과제를 주고, 그걸 잘 따라갈 수 있도록 설계한 것'을 게임이라고 봐요.

 

이 관점에서 봤을 때 <플로렌스>는 좋은 게임이라 생각해요. 모든 상호작용이 단지 이야기 전개를 위한 인터렉션이 아닌, 유저가 스토리를 완전히 이해하고 녹아들 수 있도록 잘 설계됐다고 생각합니다. 

 

 

Q. <플로렌스>만의 특별한 점이 있었다면?

 

너부: 다른 인터렉티브 게임보다 몰입하기 좋았어요. 인터렉티브 게임 대부분이 사랑이나 외로움 같은 특정 감정을 주기 위한 게임이 많잖아요. <플로렌스>는 이런 감정들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요소들을 섬세하게 설계한 게임이예요. 대화를 퍼즐로, 인물과 인물의 만남을 초점 맞추기로 표현한다는 게 캐릭터가 처한 상황뿐 아니라 감정까지 잘 표현해줬죠.

 

수기파: 저도 그 부분은 동감해요. 게임에 등장하는 상호작용 유형은 꽤 적은 편이에요. 퍼즐을 맞추거나 초점을 맞추거나, 시계를 돌리는 등 적은 개수의 상호작용을 스토리의 상황과 감정에 적합하게 배치했죠. '이런 장치를 넣으면 이 감정을 줄 수 있겠다.'는 고민을 정말 많이 했다는게 느껴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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