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

[게임미술관] '롤' 아리와 바이 디자이너 라이엇게임즈 제로니스, 이 남자가 사는 법

우티 (김재석) | 2019-08-12 09:5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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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이즈게임은 ‘게임미술관’을 통해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게임업계 금손 아티스트들을 소개합니다. 작품과 함께 작품의 목적과 작업 과정을 소개함으로써 유저들에게는 흥미로운 읽을거리를, 지망생들에게는 참고가 될 자료를 제공하고자 합니다.

라이엇게임즈 폴 '제로니스' 권

오늘 만날 폴 '제로니스' 권은 2012년부터 지금까지 라이엇게임즈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리그 오브 레전드>의 아리, 바이, 제이스 등 굵직한 챔피언이 그의 손을 거쳐 탄생했으며 얼마 전에는 K/DA 프로젝트의 일원으로 참가하기도 했습니다. 

한국계 미국인인 제로니스는 입사 이전까지 한국의 문화를 잘 몰랐다고 합니다. 그는 아리와 K/DA를 작업하며 한국 문화를 공부했고, 이제는 K팝의 팬이 되어 BTS와 블랙핑크의 공연까지 봤다고 하는데요. 지난 6월 11일, 캘리포니아 산타 모니카에 있는 라이엇게임즈 본사에서 제로니스를 만났습니다. 

 

<리그 오브 레전드> 바이의 스플래시 아트


# 괴짜, 캐릭터 디자인을 꿈꾸다

 

제로니스는 어렸을 때부터 그림에 소질이 있었습니다. 아버지 친구의 도움으로 맥주 캔의 디자인이나 공룡, 스파이더맨, <스타크래프트>나 <파이널 판타지>의 캐릭터를 따라 그리며 자연스럽게 그림을 그렸다고 합니다. 무더운 애리조나에서 유년기를 보냈던 그에게 그림은 최고의 취미이자 친구였습니다. 

이후 캘리포니아의 로스앤젤레스로 이사한 제로니스는 '아트 센터 칼리지 오브 디자인'에 입학했습니다. 산업 디자인과 일러스트레이션 분야에서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학교로 꼽히는 곳인데요. 이곳에서 제로니스는 '미친 듯' 그림을 그려냈다고 합니다. 그곳에서 그는 재능 있는 아티스트들과 때로는 경쟁하고 때로는 협업하며 많은 성장을 했다고 합니다. 

자신을 '엄청난 괴짜'(huge nerd)라고 소개한 제로니스는 나만의 캐릭터를 만들고 싶은 욕구를 늘 품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 그에게 '나만의 캐릭터'를 실현할 수 있는 회사는 바로 블리자드였습니다. 그에게 <스타크래프트>는 그가 괴짜이자 예술가가 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친 작품이었다고 합니다. 세 세력이 충돌하는 몰입력 있는 줄거리와 외계 인종의 존재는 그에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제로니스는 2010년, 블리자드에 입사했습니다. 비록 인턴이었지만 그에겐 열정이 가득했습니다. 그는 회사에서 캐릭터 디자인을 하고 싶었지만, 그에게 주어진 업무는 <하스스톤>의 카드 아트 디자인이었습니다. 새내기 아티스트였던 제로니스가 블리자드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습니다.  <스타크래프트: 고스트> 관련 작업도 맡았지만, 게임은 세상의 빛을 보지 못했죠.

괴짜였던 그를 품어주기에 블리자드는 이미 안정기에 접어든 회사였습니다. 자신의 캐릭터를 만들겠다는 강렬한 욕구를 버리지 못했던 제로니스는 결국 인턴을 마치고 프리랜서로 돌아가 개인 작업을 계속했습니다. 그랬던 그에게 손을 내민 것은 바로 스타트업 라이엇게임즈였습니다. 

 

<스타크래프트 고스트>에서 노바와 울트라리스크의 일전을 그린 콘셉트 아트


# '최고의 대학' 라이엇게임즈와 함께하다

 

당시 라이엇게임즈는 50여 명 규모의 직원이 일하고 있는 작은 회사였습니다. 블리자드 인턴을 마쳤던 제로니스는 프리랜서로 라이엇 게임즈의 아트 디자인을 돕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그는 "풀타임에 관심이 있느냐"라는 제안을 받았지만, 그의 마음은 아직 블리자드에 있었기 때문에 거절을 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거절을 했던 제로니스였지만, 라이엇게임즈가 독창적인 캐릭터가 잔뜩 등장하는 게임을 만들고 있다는 소식을 알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흥미를 느꼈던 제로니스는 2012년  라이엇게임즈의 정식 합류를 결정합니다. 라이엇게임즈의 게임은 '롤', <리그 오브 레전드>죠. 

제로니스는 7년 동안 라이엇게임즈와 함께한 <리그 오브 레전드>의 산증인입니다. 그는 처음에 <리그 오브 레전드>가 이 정도로 성공할 줄은 몰랐다고 고백했습니다. 하지만 게임은 한국을 비롯한 글로벌 시장에서 연일 히트를 기했고 그는 "믿지 못할 만큼의 성공"이었다고 말했습니다. 

라이엇게임즈와 <리그 오브 레전드>가 자신에게 어떤 의미를 묻자 그는 수줍게 웃으며 "나에게 이곳은 재능있는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다양성을 결과물로 만들 수 있는 귀한 공간"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일하며 많은 것을 배웠기 때문에 "내게는 최고의 대학"이라고 비유했습니다.

 

<리그 오브 레전드> 헤카림 콘셉트 아트


# 아리, 바이, 제이스에 얽힌 '썰'

 

오랜 세월을 <리그 오브 레전드> 하나에 바쳤다 보니 그에겐 애착이 가는 작업물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런 그에게 대표적으로 3명의 챔피언만 꼽아보자고 말했습니다. 

그는 아리를 가장 먼저 떠오르는 챔피언으로 꼽았습니다. 아리는 프리랜서 시절 무작위로 주어진 업무를 수행하던 그에게 처음으로 주어진 미션인데요. 회사는 그가 아리를 만들 가장 완벽한 사람이라고 말을 했고, 제로니스는 거기에 보답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합니다. 

아리는 처음에 스케치만 있었고 한국 문화를 담을 수 있는 특수성을 어떻게 담을지 고민했다고 합니다. 아리는 구미호라는 기본 콘셉트만 있었던 거죠. 사실 제로니스가 한국계 미국인이지만 그동안 그에게 '한국적인 것'을 접할 기회가 많지 않으며, 한국인이라는 정체성도 강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저 콘셉트에 맞는 레퍼런스를 열심히 찾았고 많은 이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방향으로 아리를 디자인했습니다. 기획 당시 아리는 여우 마스크를 쓰고 있었는데 직접 얼굴을 드러나게 바꾸고 세줄 스크래치를 냈습니다. 간소화한 한복 차림과 잘 어울리면서도 변화무쌍한 꼬리 9개를 추가했죠. 여기서 포인트는 9개의 꼬리가 따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게 한 것이라고 하네요. 

 

제로니스가 그린 <리그 오브 레전드> 아리

2019년 그가 새로 그린 아리

바이 역시 제로니스의 대표작입니다. 분홍색 머리와 '메카닉' 풍 로봇 손, '성깔' 있는 여성과 스팀 펑크의 이미지를 한 번에 담아내야 했습니다. 아리의 얼굴에 세줄 스크래치가 난 것처럼 바이의 얼굴엔 VI 레터링이 들어가있죠. 

기획 당시 바이는 제이스의 팬 걸(fan girl) 느낌이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롤러스케이트를 태웠다고 하지만 터프함을 더하기 위해 롤러스케이트를 빼고 자신의 두 발로 온전히 서 있는 모습을 그렸고 대신에 얼굴에 VI를 새겼다고 하네요. 

얼굴에 문신이 있든 말든, 자기 얼굴보다 몇 배는 큰 로봇 손이 무겁든 말든 신경 쓰지 않는 강한 전사의 인상을 주기 위해 노력했다고 합니다.  

 

 

 

그는 제이스의 '해머 건'을 만드는 데에도 일조했습니다. 흔치 않은 무기를 게임에 집어넣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는데 피자 박스의 봉을 연결해서 들고 휘두르면서 적합한 모션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고 하네요. 

 

제이스의 해머 건

 

# K/DA와 함께하며 K-Pop 공부하다

 

그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K/DA 프로젝트의 일원이기도 했습니다. 워낙 많은 라이어터(Rioter, 라이엇게임즈의 구성원을 뜻하는 말)들이 참가한 프로젝트였다고 합니다. 처음엔 걸 그룹 콘셉트의 스킨을 만드는 것인 줄 알았던 프로젝트는 점점 확대되어 <리그 오브 레전드>를 대표하는 IP의 반열에 올랐죠. 

회사의 아트 디렉터로서 프로젝트의 초창기 스케치에 참가했던 제로니스는 직감적으로 K/DA가 "뜨겠다"라고는 생각했지만, 이 정도로 히트할 줄은 몰랐다고 합니다. 결과물도 그에 대한 반응도 모두 제로니스의 예상 이상이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제로니스는 한국 문화에 대한 이해가 그리 높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K/DA를 작업하면서 K-Pop에 빠졌다고 합니다. 2000년대 후반에 마지막으로 K-Pop을 들었던 제로니스는 K/DA를 만들면서 수많은 연구와 스케치를 했습니다. 제로니스는 자신의 프로젝트에 도움이 되기 위해 K-Pop 댄스 수업까지 들었고 이 분야에 전문가가 되겠다는 마음가짐으로 KCON 2018과 BTS의 LA 콘서트까지 찾아갔다고 합니다.

 

인터뷰하는 제로니스의 모습

그는 자연스럽게 K-Pop의 매력에 매료됐고 요즘도 K-Pop을 찾는다고 하네요. 제로니스는 기자에게 "새로운 주제를 다룰 때마다 기억에 남고 의미있는 방법으로 플레이어들에게 반향을 일으키고 싶다. 그렇게 하려면 그 주제를 몸소 이해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K/DA는 제로니스가 라이엇게임즈에서 8년 동안 작업한 것 중 가장 힘들고 복잡한 프로젝트였다고 합니다. 그에 대한 극복 방법은 단순했습니다. 많이 대화하고, 토론하고, 정리해서 복잡함을 극복했을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K/DA 콘셉트 아트



 

# "마음을 정직하게 먹고 좋아하는 일을 하세요."

 

제로니스는 라이엇게임즈라는 큰 회사의 시니어 아티스트가 되었습니다. 아티스트 간의 의사소통을 조율해야 할 책임이 어느 정도 생긴 것이죠. 그에게 아티스트 사이에 이견이 생기면 어떻게 해결하는지 물었습니다. 

 

돌아온 대답은 간단했습니다. 서로의 장점을 이해하고, 서로를 신뢰하면 된다. 오랫동안 함께 해온 사람들끼리 호흡을 맞출 수 있으면 최고의 결과물을 낼 수 있기 때문에 상대를 존중하면서 명확한 의사소통을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상대방과 의견이 맞지 않으면 그것이 어디서부터 오는지 따져보고 그다음엔 무엇을 할지 알아내면 된다고도 말했습니다. 

 

참으로 교과서적인 대답이 돌아왔습니다만, 이런 교과서적 대답을 내면화하고 또 실천했기 때문에 그가 이 자리에 오를 수 있었겠죠? 

 

이제는 한 발짝 뒤에서 주니어 아티스트들을 돌보기만 하면 될 법한데 그는 아직도 많은 연구를 하고 참고 자료를 수집합니다. 작년에 댄스 수업까지 받은 게 대표적인 사례겠죠. 별 수호자 스킨 콘셉트를 잡을 때엔 많은 마법 소녀 애니메이션을 보고 거기에 현대적 패션 요소를 덧붙이려 노력했다고 합니다.  

 

<리그 오브 레전드> 별 수호자 신드라

<리그 오브 레전드> 별 수호자 스킨 앨범 커버

제로니스에게 그림을 그리지 않을 땐 뭘 하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그림을 그리지 않을 때? 회사 그림을 그리지 않을 땐 그냥 내 그림을 그린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정말 그림에 미친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는 요즘 포토샵보다 아이패드의 프로크리에이트(Procreate)를 선호한다고 합니다. 어느 곳에서나 수준급 작업을 간편하게 할 수 있어 애용한다고 하네요. 제로니스는 라이엇게임즈뿐만 아니라 많은 미국 현장에서 프로크리에이트를 사용하는 추세이니 배워두는 게 좋다고 귀띔해주기도 했습니다. 

회사 그림도, 자기 그림도 그리지 않을 땐 뭘 하는지 물어봤습니다. 그는 <비트 세이버> 같은 VR 게임도 하며 운동을 한다고 합니다. 최근에는 K-Pop에 푹 빠져 LA 공연이 언제 잡히나 학수고대하고 있다고 하네요. 올해는 블랙핑크를 보고 왔다고 합니다. 쉬는 날에는 레스토랑에 가서 맛있는 걸 먹고 넷플릭스나 유튜브, 한국 예능을 보기도 한다네요. 

취미로 양궁도 하고 테슬라 자동차로 하는 트랙 레이스도 즐긴다고 하네요. 그림을 그리지 않는 동안에는 최대한 활동적으로 움직이려고 합니다. 그것이 그에게 새로운 영감을 주기도 하고요. 주야장천 그림만 그리는 줄 알았는데 그건 또 아니었습니다. 

제로니스와 한국의 게임 아티스트 지망생 사이에는 차이점이 많을 거라 별다른 조언이 나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국가도, 조건도, 들어갈 수 있는 회사도 아주 다르니까요. 하지만 예상과 달리 그는 자신의 아티스트 인생이 담긴 담백한 대답 한 마디를 던지고 사무실로 사라졌습니다. 

 

 

마음을 정직하게 먹고 좋아하는 일을 하세요. 
힘들어도 계속 노력하면 큰 일을 이룰 겁니다.

아래는 그가 그린 작업물 모음입니다. 더 많은 작품은 아트스테이션(링크)과 인스타그램(링크)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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