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

'고티' 받은 '제목 없는 거위 게임'에 대한 단상

우티 (김재석) | 2020-02-17 14: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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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이거를?

 


사흘 전 게임 관련 외신을 보다가 깜짝 놀랐다. 인터랙티브 예술 과학 협회(AIAS)가 주관하는 권위 있는 게임 시상식 다이스 어워즈(D.I.C.E. Awards) 결과 때문. <제목 없는 거위 게임>(Untitled Goose Game)이 다이스의 고티(Game Of The Year), 다시 말해서 '올해의 게임상'을 수상했다. <제목 없는 거위 게임>이 꺾은 경쟁자는 <데스 스트랜딩>, <컨트롤>, <디스코 엘리시움>, <아우터 와일드>였다.

 

믿기 어려운 결과였다. 2012년 <저니>의 손을 들어준 다이스였지만, 개발자 제노바 첸이 <플로우>와 <플라워>로 이름을 알린 뒤였고 퍼블리셔도 대기업 소니 컴퓨터 엔터테인먼트였다. <제목 없는 거위 게임>은 <오버워치>(2016), <젤다의 전설: 야생의 숨결>(2017), <갓 오브 워>(2018)의 뒤를 잇는 올해의 게임이 됐다.

 

호주 멜버른의 인디 개발자 4명이 '무슨 장난이 더 골때릴까?' 생각하며 만든 <제목 없는 거위 게임>은 다이스 어워즈의 '최우수 인디 게임'상과 '최우수 캐릭터'상까지 쓸어담으며 3관왕의 영예를 안았다. 대중문화에서 지니는 파급력을 비롯한 많은 요소가 다르지만, 개발사 하우스하우스가 일으킨 돌풍은 영화 <기생충>의 오스카 4관왕과 비견할 만하다.

 

개발사 하우스 하우스의 트윗 갈무리. 상을 받은 쪽에서도 "이상하다(weird)"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 왜 <제목 없는 거위 게임>일까?

 

<제목 없는 거위 게임>은 하늘 아래 완전히 새로운 게임도 아니다. <염소 시뮬레이터>(2014), <나는 빵이다>(2015) 등 인간 세상의 주인공이 아닌 것이 유쾌한 파문을 일으킨다는 콘셉트의 게임은 이전부터 ​적잖이 존재했다.​ (이러한 시뮬레이션 장르를 만드는 건 주로 인디 개발사의 몫이었다)

 

이런 유의 게임은 '보는 게임'의 시대와 함께 인터넷에서 주목받았다. <빅 릭스>나 <스케이트 3>에서 물리엔진 붕괴로 연출되는 우스꽝스러운 장면을 움짤이나 영상으로 만들어 공유하던 유저들은 땡땡 시뮬레이터의 답답함, 괴기, 붕괴를 적극적으로 소비했다. 전자가 의도치 않은 버그나 덤프였다면 후자는 완벽하게 의도된 것이었다. <제목 없는 거위 게임>도 그 연장선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제목 없는 거위 게임>의 조상쯤 되는 <염소 시뮬레이터>

하지만 <제목 없는 거위 게임>은 '후자'들과 구분되는 특징이 있다. 자동차와 비슷한 속도로 달리며 세상 모든 것에게 박치기를 날리거나(<염소 시뮬레이터>), 행인들 밥을 뺏어 먹으며 둥지를 짓고 지키는 수준이 아니라(<비둘기 시뮬레이터>) 퍼즐처럼 주어진 상황을 독창적으로 해결한다. 정원사가 망치에 손을 찧거나, 이웃을 이간질시키는 등 게임 속 상황은 전부 퍼즐처럼 주어지는데, 이 과정에서 플레이어(거위)는 자기만의 시퀀스를 창조한다.

 

플레이어는 마음만 먹으면 눈이 나쁜 소년의 안경을 호수에 빠뜨려 영영 못 찾게 할 수도 있고, 걸리지만 않으면 게임에 등장하는 모든 오브제를 한곳에 모을 수도 있다. 아울러 게임에는 전략성과 잠입액션 요소가 강조됐다. 술집 안에서 난장판을 부리기 위해서는 상자를 찾아 그 안에 몸을 숨겨야 하고 맥주잔을 도랑에 빠뜨리기 위해선 탁자 밑에 몸을 숨기고, 컵이 깨지지 않게끔 살금살금 움직여야 한다.

 

죽지도 다치지도 않는 무적의 거위는 멍청한 마을 사람들(AI)을 무한으로 괴롭힐 수 있다. 개발사 하우스 하우스는 AI에게 'A를 하면 B를 한다' 정도의 간단한 로직만 부여했다. 'A를 하고 뒤에서 A'를 하면 B가 아닌 C를 한다'의 수준까지 미치지 못한 마을 사람들은 거위의 날개짓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뿐이다. 그렇게 멍청하게 당하는 사람들을 실컷 즐기라는 기획이다.

 

ㅎㅇ ㅋㅋㅋ

 

또 <제목 없는 거위 게임>은 같은 세이브 파일 안에서 달성 과제를 일부만 이루고 다시 시작해도 과제가 초기화되지 않는다. 퍼즐을 풀다가 막히는 지점이 있으면 언제든지 재도전할 수 있는 셈인데, 게임의 핵심을 잘 풀어낸 장치다. 게임을 만든 쪽에서 "전략적인 용용 죽겠지, 무한으로 즐겨요"라며​ 'Power Overwhelming'을 쳐준 것이다.

 

이로써 플레이어는 몰래카메라의 설계자면서 동시에 시행자가 된 듯한 경험을 한다.​ 만우절에 옆반 친구들이랑 반을 바꾸고 "지금 수학시간 아닌데요"라는 말에 당황하는 (사실은 알면서 당해주는) 선생님을 보며 낄낄대듯이. 유모차를 끈 엄마가 "제가 지금 똥이 마려워서 그러는데 아이 좀 맡아주세요"라고 하고 사라지면 유모차에서 침팬지 울음소리가 나서 당황하는 몰래카메라 클립을 보며 깔깔대듯이.

 

<제목 없는 거위 게임>의 난이도는 키만 익히면 게임의 엣지를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쉽다. 그런데 유저들 사이에서는 모든 사물을 한곳에 모아놓는 플레이나 빠른 시간에 스테이지를 돌파하는 스피드런에 도전하는 모습이 자주 목격된다. 기획자가 염두했든 하지 않았든, 좋은 게임의 기준을 "배우기 쉽고 마스터하기 어렵다"(Easy Learn, Hard Master)라고 정의한 부쉬넬의 법칙이 떠오른다.

 

"이 슬리퍼는 이제 제 껍니다"

 

 

# <제목 없는 거위 게임>의 3관왕... "굉장히 상징적이네요"


화려한 그래픽, 이펙트도 없다. 깊이 있는 스토리도, 알레고리도 없다. 가벼운 마음으로 온 동네를 쑥대밭으로 만들면 된다. 이런 게임이 다이스 어워즈의 선택을 받은 건 상징적이다. <제목 없는 거위 게임>의 다이스 3관왕은 AAA급​ 인력, 자본, 시간을 들이지 않더라도 '작품의 방향성을 영리하게 구현했으면 평단의 선택을 받을 수 있다'는 사례로 기억될 것이다.

 

그리고 게이머들은 이런 게임에 지갑을 열 준비가 되어있다. 지난 주말, 기자가 유튜브도 보고 카카오톡도 하면서 <제목 없는 거위 게임>의 엔딩을 보는 데 걸린 시간은 4시간 정도다. 게임의 현재 가격이 2만 원이니 한 시간에 5천 원꼴로 즐긴 셈이다. (정말 저렴한 취미 아닌가?)

 

<제목 없는 거위 게임>은 별것 없어 보이지만 막상 뜯어보면 재미있다. 이런 게임이 다이스 어워즈 3관왕을 통해 상징성까지 확보했다. 아직 게임을 즐기지 않은 사람이라면 한 번 맛보길 바란다.​ 마음이 편해지는 드뷔시의 프렐류드와 마당을 나온 거위가 빚어내는 특별한 난장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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