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

'리갈 던전'이 플레이어에게 죄책감을 전달하는 방식

디스이즈게임 (디스이즈게임) | 2019-09-04 16:31:27

<리갈 던전>은 경찰이 직면한 성과주의의 딜레마를 담아낸 ​어드벤처 게임입니다. 갓 경찰대를 졸업하고 경찰서에 발령받은 수사팀장이 되어 다양한 사건에 대한 조서를 쓰면서 게임을 진행하게 되는데요. 이 과정에서 플레이어는 개인의 인생을 저울질하는 씁쓸함을 맛보게 됩니다. 이 게임은 오는 9월 5일부터 8일까지 열리는 부산 인디 커넥트(BIC)에도 출전하지요.

 

게임을 만든 1인 개발자 소미​(Somi)​는 지난 7월 24일, 게임 웹진 가마수트라(Gamasutra)의​ 딥 다이브(Deep Dive) 코너에 <리갈 던전>의 포스트모템과 같은 글을 기고했습니다. 이 글에는 그가 게임을 디자인하는 과정에서 목표하고 의도한 부분과, 고민하고 개선한 과정이 잘 담겨있습니다.

 

디스이즈게임에서는 소미의 허가를 받고 "Deep Dive: Burdening players with the power of the system in Legal Dungeon"([딥 다이브: <리갈 던전>의 게임디자인)의 한글 전문을 공유합니다. <리갈 던전>의 포스트모템이 많은 게임 개발자에게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 주의 : 아래 내용은 게임의 구조 및 서사의 주요 부분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목표 : 플레이어에게 죄책감을 전달하기 

누구 : 소미(Somi)

안녕? 난 한국에서 혼자서 게임을 만들고 있는 소미야. 2019년 5월에 출시된 경찰 문서작업 어드벤쳐 게임 <리갈 던전>(Legal Dungeon)을 만들었어.

난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고 지금도 법과 관련된 직장에 다니고 있어. 직장생활을 하면서, 인생에서 느껴지는 여러가지 감정들, 특히 내가 가진 죄책감에 관한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 그리고 게임이 그런 생각을 나누기에 아주 적절한 매체라고 생각했지. 

2014년부터 게임 개발 공부를 시작하면서 지금까지 총 4개의 게임을 출시했어. 특히 2016년도에는 <레플리카>(Replica)라는, 타인의 휴대전화를 훔쳐보며 테러 혐의점을 찾는 게임을 만들어서 인디케이드(IndieCade)에서 임팩트 상(Impact Award)을 받기도 했어.

내가 최근에 출시한 <리갈 던전>은 경찰이 되어서 범죄 수사 서류를 작성하는 게임이야. 플레이어는 적게는 7장, 많게는 40장이 넘는 수사서류를 검토하고 이를 토대로 범인을 기소할지, 불기소할지 결정해야해. 모든 선택은 플레이어가 하지만 그것은 분명한 한계가 있지.


무엇을 : 구조의 힘을 느끼게 하는 디자인

<리갈 던전>에서 플레이어의 역할은, 수사서류 뭉치를 검토한 후 ‘의견서’라고 불리는 새로운 서류를 작성하는 거야. 사건 수사는 이미 팀원들에 의해 마무리 되었기 때문에 범죄 현장을 누비며 증거를 찾거나 피의자의 진술에서 모순점을 찾는 것과 같은 흥미진진한 요소는 전혀 없어. 

 

플레이어는 서류만을 읽으면서, 사건 관계자가 어떠한 진술을 했고 어떠한 증거를 제시했는지, 수사대상이 된 행위가 어떠한 죄명에 해당하는지, 관련된 법조문에서 요구하는 죄의 구성 요건은 무엇인지, 유사한 사례에 대해 기존의 판례는 어떠한 결론을 내렸는지를 연구해야하지.



이 과정은 한국에서 수사팀을 총괄하는 팀장이 맡은 역할과 매우 유사해. 심지어는 게임에서 등장하는 문서작성 프로그램인 CIS도 한국 법무부에서 제작하고 실제로 경찰이 활용하고 있는 KICS라는 플랫폼과 상당히 비슷하지. 게임의 스토리를 형성하는 개별 사건들도 모두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들의 주요 사실관계와 쟁점을 변형해서 재구성한 내용이야. 

결국 플레이어는 일반적으로 경찰 수사팀의 장이라면 누구나 일상적으로 판단하고 결정해야하는 과정을 그대로 체험할 수 있게 되는 거야. 세부적인 사건들의 일시, 장소만 다를뿐, 경찰의 의사결정 논리를 그대로 재현한 거지.

 

물론 세부적인 부분을 재현하는 과정에서 게임의 형식에 맞는 변형은 필수야. 예를 들어, 글자를 입력해서 문서를 작성하는 과정은, 게임의 제한된 인터페이스를 고려해서, 필요한 단어나 문장들을 기존 서류에서 ‘끌어서 놓는’ 방식으로 대체할 수 있도록 만들었어. 조직이 전체적으로 지향하는 목표나 분위기, 업무 과정에서 존재하는 무언의 압력과 편견 등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들은 ‘스크린 메이트’가 프로그램 사용방식을 설명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플레이어에게 주입하도록 장치했어.

사는 것이 너무 힘들어…

왜 이렇게 지루한 문서작업 시뮬레이션을 게임에 그대로 넣었냐고? 난 플레이어에게 선택권이 있는지 묻고 싶었어. 현실과 똑같은 구조 속에서 플레이어가 같은 경험을 한다면 과연 일반적인 경찰의 사고방식과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느냐고 말하고 싶었지.


왜 : 어디까지가 개인의 판단 영역일까?

시작 : 네가 경찰이라면 달랐을까?

이 게임은 하나의 신문기사에서 시작했어. 2010년 6월, 양천경찰서 서장이 서울경찰청장의 사임을 요구했던 사건이었지. 당시 경찰서장은 청장이 과도한 실적주의로 직원들에게 무리한 활동을 강요하고 있다고 주장했어. 이러한 주장을 한 경찰서에서는, 형사들 4명이 실적을 쌓으려고 무고한 사람을 고문해서 범죄자로 만들려고 했다가 구속된 일이 있었거든. 이후에 해당 사건은 잊혀졌고, 성과제도는 지금까지도 경찰 조직에 남아 모든 인사와 급여, 승진의 중요한 기준이 되고 있어.

 

<리갈 던전>의 ‘에피소드 1’에서는, 무료 신문을 모아서 팔아 생활비를 버는 노인을 경찰이 실적을 위해 절도범으로 만드는 내용을 담고 있어. 무료 신문도 남의 물건이니 마음대로 가져가면 절도라는 논리지. 여기서 플레이어는 선택할 수 있어. 기소할지, 불기소할지, 아니면 노인을 도와주던 어린 손녀까지 함께 공범으로 기소할지. 하지만 정답은 이미 정해져 있지. 

 

왜냐하면, 현실세계에서 똑같은 노인들을 무더기로 검거했던 여느 경찰관들처럼, 플레이어도 실적으로 압박받고 있으니까. 높은 사람들의 지시사항과 부하 직원들의 한탄은 아주 자연스럽게 노인을 5점짜리 몬스터로 만들지.

 

5점 '짜리'


하지만 이렇게 ‘기소’냐, ‘불기소’냐를 묻는 단순한 선택지를 초기버전으로 제시했을 때, 플레이어의 답은 현실의 그것과는 달랐어. 대부분의 플레이어는 양심과 감정에 따라 되도록이면 노인을 풀어주려고 했지. 결국 이 선택은 게임일 뿐이니까, 지극히 상식적인 선택이 이루어지는 거야. 아무리 게임 속에서 ‘대화’나 ‘점수’를 통해서 ‘기소해야만 하는 이유’를 강요해도 플레이어는 실제로 점수에 목을 매는 보통의 경찰관들처럼 절실하지 않아. 되도록이면 합리적이고 옳은 선택을 하려 하지.

게다가 현실에서의 선택이라는 것은 결정적인 순간 딱 한 번, 게임의 옵션처럼 주어지는 것이 아니잖아? ‘판단하는 자’는 이전에 그 사람이 판단했던 여러 선택들의 연장선 위에 서있어. 즉, 내가 일상에서 결정하는 작은 선택들이 쌓이고 쌓여서 지금의 나를 만든 거야. 중요한 결정을 해야하는 상황이 주어졌을 때, 이미 ‘중요한 결정을 하는 나’라는 사람과 ‘중요한 선택의 결과’까지 모두 정해져 있는 거야. <리갈 던전>은 이에 맞는 대책이 필요했어.

 

초기 버전의 선택지(‘공격’과 ‘자비’)

 

매 순간의 선택이 타인의 인생을 결정한다.

 

결국 <리갈 던전>은 플레이어에게 선택의 순간을 보여주지 않도록 변경되었어. 에피소드 1에서 플레이어는 기소할 것인지 불기소할 것인지를 묻는 옵션을 볼 수 없어. 다만 의견서에 어떠한 단서들을 끌어서 넣을 것인지만 선택할 수 있지. 그러면 플레이어가 찾아낸 단서들이 기소를 위한 단서일 때 기소가 되고, 불기소를 위한 단서일 때 불기소가 되는 거야. 

 

적용한 법조항이 무엇이냐에 따라 유죄가 될 수도, 무죄가 될 수도 있지. 결국 문서에서 단어나 문장 하나를 끌어오는 매 순간들이 연계된 선택지로 이어질 수 있도록 만든 거야.

 

플레이어는 ‘절도’라는 단어를 검색창에서 검색할 거야. 그리고 아주 자연스럽게 ‘특수절도’를 죄명으로 입력하지. 왜냐하면 에피소드를 시작하기 전 플레이어가 다른 형사와 나눈 대화에서 같은 단어를 들은 적이 있거든. 왜냐하면 특수절도죄가 절도죄의 조문보다 더 앞쪽에 배치되어 있기 때문에 검색 결과의 가장 첫 화면에 나오거든. 결국 플레이어는 노인의 손녀까지 공범으로 만들게 될 거야. 

 

그게 아주 자연스러운 흐름이니까. 무고한 자를, 2점짜리 단순 절도범으로, 다시 5점짜리 특수절도단으로 ‘만든’ 플레이어가, 이를 보며 고마워하는 동료들 앞에서 느끼는 죄책감, 무력감, 자괴감. 바로 그걸 이끌어내고 싶었어.

 


 

게임은 바로 이런 방식으로 진행돼. 만약 시스템이 이끄는 선택이 아니라 자신만의 주체적인 사고를 통한 독자적인 선택을 하고자 하는 플레이어가 있다면, 주어진 수사서류의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단어와 문장을 꼼꼼히 봐야할 거야. 왜냐하면 법은 논리와 치밀함을 요구하니까. 아무 단서나 쉽게 용인하지 않거든.

 

 

범인이 누구인지를 보여주는 타임라인

 

<리갈 던전>은 시스템에 관한 이야기야. 양천경찰서에서 무고한 피의자를 고문했던 경찰관들과 이들에 동조해서 어떻게든 실적을 쌓으려고 법과 윤리를 버렸던 경찰관들, 술에 취해 길에 쓰러진 사람을 보고도 돕기는 커녕 이를 미끼삼아 절도범을 잡으려고 숨어서 지켜보고만 있었던 수많은 이 나라의 경찰관들, 성범죄 재범율이 높아지면 감점을 받으므로 성범죄자가 재범인 경우 검거하지 않았던 경찰관들. 

 

이들은 뿔달린 악마가 아니야. ‘아돌프 아이히만’과 같이 아무런 판단 없이 주어진 업무를 해나가기만 하는 단순한 직장인일 뿐이지. 이들이 인간의 형상으로 수많은 사람에게 고통을 주게 만든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일까? 

 

 

 

이 게임은 총 14개의 엔딩과 6개의 도전과제로 구성되어 있고, 범인검거 점수는 코인이 되어 게임 내 상점에서 판매하는 스크린메이트를 구매하는데 이용할 수 있어. 각 엔딩과 도전과제는 플레이어가 피의자에 대한 기소 여부를 변경함으로써 찾을 수 있고, 코인은 피의자를 기소함으로써 얻을 수 있지.

 

플레이어는 <리갈 던전>의 타임라인을 따라가면서, 엔딩을 찾고 코인을 획득하기 위해 노력하며, 평범한 경찰관의 악행을 경험할 수 있을 거야. 그 과정을 통해서, 자신을 악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지, 무엇을 바꿔야 하는지도 알 수 있기를 바라.

 


물론 모든 잘못을 시스템에게 전가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아니야. ‘진짜 범인은 ‘외부’에만 있는 걸까?’ 라는 질문을 동시에 던질 수 있기를 바라. 왜냐하면, 게임에서 주어진 모든 엔딩을 찾고 코인을 모아서 스크린 메이트를 구매하려 노력했던 플레이어들은, 결국 보상을 위해 타인의 인생을 저울질한 꼴이거든. 실적을 쌓기 위해 피의자를 고문했던 양천경찰서 직원들과 스스로의 사이에 어떠한 차이점이 있는지, 고민할 필요가 있을 거야.

결론

  “윤리적 판단에 관한 이야기는 결국 현실에 기반할 수밖에 없어. ‘레플리카’를 만들 때와는 달리 <리갈 던전>을 만드는 과정은 정말 고통스러웠어. 내가 타인의 고통을 창작활동에 소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고민하며, 유사한 사건과 상황으로 인해 상처받았을 누군가에게 또 다른 가해가 될 수도 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며, 서사를 수정하고 또 수정할 수밖에 없었어.”

“타인의 고통은 우리의 외부에 있지. 때문에 공감이라는 것은 불완전하고 순간적인 것임을 잘 알고 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게임을 완성했어. 등장인물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누가 범인인지 드러날 수 있도록. 비록 이해받을 수는 없더라도, 내 생각과 감정이 누군가에게 닿을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실험은 진행 중이야. 그리고 이 실험에 참여해줘서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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