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

[게임예술관] 블리자드의 소리를 전하다, 아토믹사운드의 김정민 대표

무균 (송주상) | 2019-12-30 11: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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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이즈게임은 ‘게임예술관’을 통해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게임업계 금손 아티스트들을 소개합니다. 작품과 함께 작품의 목적과 작업 과정을 소개함으로써 유저들에게는 흥미로운 읽을거리를, 지망생들에게는 참고가 될 자료를 제공하고자 합니다.

블리즈컨 2019에서 <디아블로4>와 <오버워치2>의 멋진 시네마틱 영상을 보고 큰 감동을 한 분들이 많을 텐데요. 특히, 원본 이상의 연기를 담은 한국 성우들의 시네마틱 영상 역시 호평을 받았죠. 

멋진 시네마틱 영상 뒤에는 아토믹사운드 스튜디오(이하 아토믹사운드)의 김정민 대표가 있습니다. 블리자드와 십 년 넘게 협업하며, 대부분의 시네마틱 영상과 인 게임 작업에 참여한 그는 캐스팅부터, 녹음, 중간 프로듀싱, 후반 작업 및 편집까지 도맡아 해냅니다. 블리자드와 관련된 영상 더빙에 대해서는 알파이자 오메가인 셈이죠.

음향 감독님, 엔지니어님부터 단순하게 녹음실 실장님이라 불리는 그를 만나 더빙과 그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토믹사운드의 김정민 대표


# 사과로 시작한 블리자드와의 인연

 

김정민 대표와 블리자드의 인연은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첫 번째 확장팩 '불타는 성전'으로 올라갑니다. 첫 작업은 시네마틱 영상이 아닌, 불타는 성전의 인스턴트 던전을 맡았습니다. 김 대표는 새 형상의 종족인 '아라코아'와 복면을 두른 '무역 연합' 등 독특한 컨셉의 인스턴트 던전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하네요. 특히, 국내 게임 시장이 지금처럼 전문화되지 않아 더 힘들게 작업을 했습니다.
 
"죄송하다"
 
블리자드와의 첫 프로젝트를 끝낸 김 대표가 꺼낸 첫마디는 사과였습니다. 그는 기술과 장비 부족으로 원본 영상에 담긴 '질감'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 아쉬움이 컸습니다. 무엇보다 작업 자체를 쉽게 생각하고 접근한 자신에 대한 자책이 담긴 사과였죠. 하지만 오히려 이걸 계기로 블리자드와 함께 13년째 함께 일하고 있다고 하네요.
 

최근 <디아블로4>와 <오버워치2> 시네마틱 영상도 녹음했지만, <도타2>, <피파 시리즈>까지 한국에 유명한 게임과 시네마틱 영상 중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게 없을 정도입니다. 심지어 완벽한 성우 캐스팅으로 찬양받았던 번지의 <데스티니 가디언즈>도 그를 거쳤습니다. 당연히 원본을 뛰어넘는 연기를 보여준 '케이드-6(성우: 신용우)'의 캐스팅에도 관여했다고 합니다. 

 

역대급 더빙이었던 <데스티니 가디언즈>의 '케이드-6', 김 대표는 신 성우의 연기가 너무 자연스러워 연기인지 실제 성격인지 궁금했다고 전했다.


# 공포 영화에서 영감받은 '디아블로4' 시네마틱 영상 더빙

 

공포 영화를 뛰어넘는 연출로 블리자드 팬들에게 디아블로의 귀환을 확실하게 각인시킨 <디아블로4> 시네마틱 영상. 
 
김 대표가 이 영상을 처음 본 것은 블리즈컨 2019로부터 약 한 달 전입니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영상이었지만, 평소 공포 영화 마니아였던 그는 이번 시네마틱을 보며 공포 영화처럼 연출해도 되겠다는 확신을 했다고 하네요. 의문의 남자에게서는 <헬레이져>의 핀헤드, 마지막 희생자는 <겟 아웃>의 남자 주인공을, 그리고 '릴리트'를 보면서는 <서스페리아>를 떠올리며 성우 캐스팅을 시작했습니다. 
 
그에게는 원본 영상도 일종의 레퍼런스입니다. 김 대표의 가장 큰 목표는 국내 유저에게 더 생생하게 원본영상이 가지고 있는 질감을 전달하는 것이라고 하네요. 아무래도 자막을 보면서 영상을 보면 감동이 반감되곤 하니까요.
 

<디아블로4> 시네마틱 영상 역시 성공적으로 원본 영상이 가지고 있던 공포의 질감을 전달하는 데 성공했죠. 그 중심에는 겁먹은 목소리로 주문을 외우던 마지막 희생자와 거부할 수 없는 목소리를 가진 의문의 남자가 있습니다. 김 대표의 강한 디렉팅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했지만, 그는 오히려 성우의 능력이고, 자기는 성우 능력의 120%를 발휘하도록 편한 분위기를 만들었을 뿐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김 대표가 받는 영상은 미완성 버전이다. 최종 완성 버전은 그 역시 유튜브를 통해 확인한다고 한다.

오버워치2도 마찬가지다. 음성 녹음은 없거나, 초기 버전이라고 한다

특히 마지막 희생자(성우: 이규창)은 첫 녹음에 큰 아쉬움이 있던 성우가 다시 한번 녹음하자 제안해서 나왔다고 하네요. 주문도 완벽하게 외웠고, 원본 이상의 공포와 연기가 나올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감미로운 목소리를 가진 의문의 남자는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의문의 남자는 상대를 하찮게 보면서도 남을 한순간에 설득시킬 듯한 '저항하기 힘든 목소리'를 가지고 있어야 했죠. 상대가 죽음을 받아들이면서도 주문을 외워야만 했으니까요. 이 목소리를 찾기 위해 김 대표는 여러 성우를 만나고, 녹음했습니다. 그래도 쉽게 결정할 수 없었죠. 마감일은 계속해서 다가왔습니다.
 
김 대표는 마지막 희생자를 녹음했던 이규창 성우에게 한 번 의문의 남자도 해보자고 제안했습니다. 희생자의 상황을 잘 이해했기 때문일까요? 그가 의문의 남자까지 맡게 됩니다. 결국 <디아블로4> 시네마틱 영상은 이규창 성우 혼자서 주고받은 셈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약 10일 만에 <디아블로4> 시네마틱 영상 더빙이 완성되었습니다. <오버워치2>나 대부분의 시네마틱 영상 작업에는 일주일 정도 걸리지만, <디아블로4>는 영상 길이도 길어 더 오래 걸렸다고 하네요. 

 

이 둘이 같은 사람의 목소리였다는 게 믿기는가?

음성 파일 작업 역시 반복 작업의 연속이다.


# 캐스팅, 그리고 또 캐스팅

 

시네마틱 영상 더빙부터 인 게임 녹음까지, 김정민 대표의 작업은 '타임 어택'입니다. 대부분 전 세계 동시 론칭이 되지만, 영상이나 콘텐츠 작업이 미리 되어 있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한된 시간 내에서 최고 수준의 퀄리티를 뽑아내기 위해서는 '컴팩트(compact, 촘촘한)'하게 프로젝트를 진행해야 합니다. 
 
프로젝트를 최대한 컴팩트하게 진행하기 위해서는 가장 필수적인 부분은 캐스팅입니다. 게임 속 캐릭터와 어울리는 성우를 찾는 일이 가장 어렵고,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이죠. 김 대표는 이를 위해서 성우의 성격, 목소리, 습관까지 상세하게 기억한다고 하네요. 디렉션이 크게 필요 없는 이유도 캐스팅 덕분입니다. 
 
그렇다고 캐스팅이 어떤 조건에 맞춰 딱딱하거나 계획적이진 않습니다. 오히려, 유동적이고 즉흥적이라고 합니다. 녹음하러 온 성우의 목소리를 듣고 다른 배역이 어울릴 것 같아서 바로 녹음한 경우도 있다고 하네요. <데스티니 가디언즈>의 안전장치도 다른 배역을 녹음하러 온 성우의 목소리를 들은 김 대표가 그 자리에서 캐스팅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캐스팅을 잘하기 위해서는 성우를 잘 기억해야 합니다. 단순히 성우가 아닌, 성우의 성격이나 목소리 등과 함께 이미지를 기억하는 거죠. 그러기 위해서는 성우의 목소리를 소중하게, 더 나아가 짧은 인연도 소중하게 여기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성우들의 작업 공간. 여기서 한국의 '겐지'도, 한국의 '타이커스'도 탄생했다.

작업실은 이런 모습이다.


# 짧은 인연도 소중하다

 

김정민 대표는 '잘 어울리는' 캐스팅을 위해서는 성우와의 만남이 가장 중요하다고 밝혔습니다. 인연이 중요하다는 거죠. 김 대표가 인연을 소중하게 여기는 게 된 일은, 그가 녹음 작업을 처음 시작하던 1990년 후반으로 돌아가지 않을까합니다.
 
그는 밴드의 멤버였기에 '소리' 자체에 큰 관심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녹음실에 취업한 선배 따라 녹음실을 갔고, 다음날부터 출근했다고 하네요. 김 대표는 밴드 경력도 있고, 녹음실은 '밀레니엄'이라는 대목을 앞두고 있어 일손이 부족했거든요. 짧은 인연에서 그의 업이 시작됐습니다.
 

캐스팅도 마찬가지입니다. 김 대표는 더빙을 맡긴 클라이언트의 반대 등으로 성우가 바뀌더라도, 성우의 작업물을 남겨놓습니다. 그는 "맞는 배역에 캐스팅 못 한 제 잘못이지, 실력이 없는 게 아니다"라고 설명했습니다. 다른 프로젝트 진행할 때, 아쉽게 일을 못 했던 성우의 목소리까지 다 듣고, 고민한다고 합니다. 앞서 말했듯, 성우의 성격이나 행동도 고려하고요. 

 

작업실에 있던 기타. 작년까지 밴드를 활동했다고 한다.

 


# 사람의 목소리를 담기 위해서

 

영화 <봄날은 간다>의 남자 주인공 '상우'는 자연의 소리를 채집하기 위해 여행을 다닙니다. 영화 내내 상우는 자연의 소리를 담기 위해 자연에 집중하곤 합니다.

김정민 대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의 목소리를 잘 담고, 표현하기 위해서 사람을 소중하게 여깁니다. 인연을 쉽게 여기지 않죠. 그리고 자신의 역할을 더 충실하게 수행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자기 일을 잘 해내는 것이야말로 성우, 클라이언트와 작품, 그리고 시청자까지 모두 존중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김 대표는 스스로 자신의 역할은 클라이언트의 성우 사이의 가교라고 설명했습니다. 성우에게는 클라이언트의 요구를 잘 이해되도록 설명하고, 클라이언트에게는 성우가 겪는 어려움을 말해주는 거죠. 사람의 목소리를 잘 담기 위해서, 성우와 클라이언트 사이의 인연도 중요하다는 것이 그의 지론입니다.

아직도 그는 프로젝트가 시작하는 날이면, 처음 일한 날처럼 긴장한다고 합니다. 욕심을 담아서, 그가 계속 긴장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좋은 작품으로 우리를 즐겁게 하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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