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E 온라인에 대해 들어보신적이 있습니까?
이 게임에 대한 여러가지 평가가 있지만 그 중 하나는 바로 '가상 경제를 가장 뛰어나게 구현한 MMORPG' 입니다.
경제학 교수를 초빙하여 운영을 하는 노력을 보이며 당시로서는 참신한 모습을 보였고 (요즘에는 여타 온라인 게임 개발사 및 운영진들도 가상 경제에 대한 인식이 높아져서 적극적으로 경제학 관련 인재를 등용한다는군요), 이로 인하여 10년 가까이 매우 안정적인 물가 통제능력을 보여왔습니다.
현실 사회에서 설령 소말리아 같이 치안과 경제가 막장인 곳에서조차도 그 가치를 인정받는 절대적인 기축통화로서는 미국 달러와 황금이 있습니다. 이브에도 이러한 아이템이 있답니다.
바로 플랙스죠.
30 Day Pilot's License Extension, PLEX 라고 불리는 아이템으로서 이브 온라인의 계정 연장을 게임내 화폐를 통해 구매할 수 있도록 해주는 아이템입니다.
게임 돈으로 3억을 벌면, 일명 '현질' 하고 싶어서 플랙스를 20달러 주고 산 유저한테서 플랙스를 구매함으로서 '현질' 한 유저는 간편하게 게임 돈 3억을 얻게 되고 계정 연장에 있어 현금을 지불하고 싶지 않았던 유저는 게임 돈 3억을 대신 냄으로서 계정을 30일 더 유지할 수 있게 된겁니다.
이러한 점 때문에 플랙스는 이브 온라인 내에서 생필품으로서 중요하게 취급되고 있고 이런 이유로 물가 상승률에 대한 기본 척도로서 평가받아왔습니다. (물론 이후 부연하겠지만 여러가지 이유로 인하여 플랙스의 가치는 평균 물가 상승률에 비해서는 좀 더 가파르게 상승한 경향이 있긴 합니다)
하지만 이 플랙스와 전반적인 물가가 최근 1,2년동안 지난 5년에 비해서 가파른 물가 상승율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플랙스 시스템이 처음 등장했을때 책정되었던 기준가 3억원은 현재 7억원을 넘기 직전인 상황이고 많은 유저들이 이에 고통을 호소하며 물가 안정이 시급히 되길 바라고 있습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전 이게 제작진의 의도라고 보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플랙스의 급격한 물가 상승 원인과, 제작진의 의도에 대해 고찰해보고자 합니다.
1. 플랙스 가격 상승의 원인
A. 외부적 요인
아시다시피 국제적으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이후로 경제가 둔화되며 전반적인 소비심리가 경직된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브 온라인의 계정 연장에 있어 현금을 지불하는 건 심리적으로 큰 부담이 되는건 당연합니다. 게다가 그 정액을 게임 내의 자금으로 대체 지불할 수 있다면? 게임 돈으로 플랙스를 구매하려는 '수요'는 늘어나는 반면 '현질' 하며 공급하는 양은 되려 줄어들었습니다. 필연적으로 플랙스 가격이 뛰어오를 수 밖에 없던 겁니다.
하지만 순수하게 이러한 이유뿐이라면 충분히 제작진들이 다양한 완충장치를 도입함으로서 인플레를 억제할 수 있지않았을까 하는게 제 생각입니다. 실제로 경제가 침체되기 시작하고서도 한동안은 물가가 안정적이었으니까요.
B. 내부적 요인
본격적으로 플랙스의 물가가 미쳐 날뛰기 시작한건 인커전이라는 신규 컨텐츠가 도입된 시점에서부터입니다.
이브 온라인이 최초로 서비스 되었을 당시엔 유저들의 낮은 게임 이해도 및 부족한 스킬, 그리고 제작진의 미흡한 운영 등이 겹쳐 할 수 있는게 채광밖에 없다는 비아냥을 담은 '마이닝 온라인' 으로 불리던 굴욕적인 시절도 있었다고 합니다.
얼마 안있어 점진적인 확장팩 추가등을 통해 이브 온라인의 경제 시스템이 본 궤도에 오르기 시작하며 안정되었습니다만, 여전히 제작진들에게 있어 불만족스런 점이 한가지 남아있었지요.
이브 온라인의 우주는 크게 3단계 치안 등급으로 나뉩니다.
High SECurity - 일명 하이섹, 이유없는 물리적 폭행이 가해지면 즉각 경찰이 출동하여 가해자를 응징합니다. 안전하기 때문에 수많은 유저들이 서로 경쟁하고 가치있는 자원 또한 씨가 말라버린 상태입니다.
Low SECurity - 일명 로(우)섹, 경찰이 출동하진 않습니다만, 가해자의 범죄행위를 감시하고 기록하며 시스템적 불이익을 부여합니다. 더불어 최소한의 안전장치도 관리하지요. 위험하기 때문에 유저들의 숫자가 적고 가치 있는 자원이 어느정도 남아있습니다.
Null SECurity - 일명 널섹, 경찰이 감시도 안하고 유저들에게 관리 권한을 위임한 지역이라 일체의 안전장치가 전혀 없습니다. 해당 지역을 점령한 유저들을 제외한 유저들에겐 극도로 위험한 지역이고 따라서 극소수의 유저들만이 막대한 고가치 자원을 독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수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남의 영토도 강탈하려고 전쟁이 수시로 벌어지는 곳입니다.
제작진들은 위험한 널섹 및 로섹에서 유저들이 일확천금을 꿈꾸며 적극적으로 뛰어들고 (High Risk, High Gain) 이 과정에서 해적들이나 먼저 해당 영토를 접수하고 거주중이던 '원주민'들의 저항에 그들이 지닌 배나 장비들을 터트려먹으면서 채광 및 생산업자, 그리고 무역업자들이 재미를 보고, 이런 방식으로 경제가 좀 더 적극적으로 발되길 바랬었던 거죠.
하지만 이러한 제작진들의 기대와는 달리 절대다수의 유저들은 경찰이 지켜주는 안전한 지역에서, 다소 수익이 적더라도 (Low Risk, Low Gain) 안정적인 수익에 만족하고서 더 발전하지 않는 모습만 보여준겁니다.
게다가 유저들의 성장 테크가 패치를 거듭하면서 안정됨에 따라, 다같이 뭉쳐서 활동하는 모습조차도 점점 줄어들고 혼자서 강력한 장비를 갖추고서 적지만 30일 내내 꾸준히만 하면 플랙스를 구매할 수 있는 수익을 유지하며 혼자 노는 모습까지 보이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혼자서 놀기에는 너무나도 힘든 새로운 컨텐츠인 '웜홀'을 추가하고 조금이나마 성과를 보이긴 했습니다만, 근본적으로 이곳 또한 널섹으로서 위험하다는 점 때문에 유저들이 접근하길 꺼려하게 됩니다.
아마 CCP 제작진들은 더이상 이런 상황 유지를 용납할 수 없던 거 같습니다.
그렇기에 현 상황에 변화를 가하는데있어 택한 수단이 바로 '의도적인 인플레이션 유발' 입니다.
인플레이션을 일으킨 직접적 원인인 인커전 컨텐츠의 추가는 한번에 두마리 토끼를 잡는데 성공하였습니다.
첫째, 인커전을 하는데 있어선 끔찍한 난이도 때문에 반드시 여러명이 모여야 했습니다. 그렇기에 자연스럽게 혼자 놀다시피하던 유저들이 자발적으로 뭉쳐서 함께 활동하도록 유도할 수 있던 거였죠.
둘째, 유저들이 사람을 구하고 강력한 적을 상대하는데 있어 보상이랍시고 무지막지한 양의 게임화폐를 뿌림으로서 의도적인 인플레를 유발시키는데 성공합니다.
이러한 의도적인 인플레로 인하여 게임 화폐의 가치 폭락과 플랙스 가격 폭등은 지금껏 혼자 노는데에만 치중해온 유저들에겐 재앙으로 다가옵니다.
혼자서 NPC 해적들을 잡으며 버는 돈은 게임 화폐였고 그 양은 결코 늘어나지 않았거든요. 그런 상황에서 플랙스 가격이 치솟기 시작하자 더이상 느긋해질 수 없게 되었습니다. 더 오래 게임을 하던가, 같이 인커전에 참가하던가, 혹은 위험지대로 뛰쳐나가서 막대한 돈을 벌어 물가 상승을 버텨내던가...(플랙스가 3억원이던 시절엔 시간당 수익 1,2천만 내외로 30일동안 꾸준히 하루 한두시간씩 하던가 주말에 몰아서 대여섯시간만 하면 충분히 플랙스를 구매할 수 있었습니다. 이젠 그 두배의 시간이 필요해진거죠)
여기에 CCP는 플랙스 소모를 부추키는 패치를 연이어서 내놓습니다. 캐쉬템 (성능 향상은 다행히도 없는 스킨 전용) 추가 , 같은 계정 내의 케릭터 슬롯의 동시 성장 허가 (기존에는 케릭터 하나의 스킬을 향상시키자면 나머지 두 케릭터 슬롯은 스킬 성장을 일시중지 시켜야 했습니다. 이제 플랙스를 추가로 지불하면 그럴 필요가 없어졌죠) 등등...
또한, 로섹 컨텐츠도 강화하기 시작합니다. 단순 유저들간의 대립 뿐만 아니라 배경설정으로만 존재했던 NPC 국가들간의 대립에 유저들도 참가할 수 있도록 말이죠. 사실 이건 인커전 이전에 앞서 시도되었으나 그 반응이 시원찮아 실패작 취급받아왔었습니다. 하지만 인커전 이후 인터페이스 개편을 하며 이러한 RvR 또한 시각적 및 시스템적인 개편을 하면서 '인플레이션을 넘어선 초인플레이션'이 일시적이나마 일어날 정도로 (매점매석을 이용한 시세 조작이었다지만, 이를 해낼 수 있을 만큼 막대한 수익을 끌어올 수 있었다는 반증이지요) 이러한 개편된 로섹 컨텐츠에 대한 유저들의 참여 또한 성공적으로 이끌어내는데에 성공합니다.
게다가 새로이 개편된 로섹 컨텐츠는 일종의 마일리지 시스템을 이용하고 있었는데요, 마일리지를 아이템으로 환원하기 위해서는 일정량의 수수료를 지불해야 했습니다. 즉 유사시 인플레이션을 통제할 수 있는 장치도 동시에 마련한 거지요.
이후로도 최근엔 널섹에서의 게임화폐 수익률을 너프함과 동시에 이러한 마일리지로의 지급이 이루어지도록 패치가 이루어졌는데 이는 인플레이션에 대한 간접적 통제이자 지금까지도 남아있는 하이섹에서 혼자 노는 유저들에 대한 압박을 강화(이들 또한 안전지대 전용 마일리지 포인트를 조금씩이나마 받고 있었지만 그 가치는 크지 않았습니다. 근데 널섹에서도 이 마일리지가 쌓이도록 함으로서 공급 증가로 인하여 가치가 더더욱 떨어지게 만든겁니다 - 아직 도입된지 얼마 안되어 기대되로 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한 걸로 보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몇가지 패치를 통해 널섹으로의 진입장벽을 전반적으로 낮추어줌으로서 아직까지 널섹에 진출하지 못한 유저들이 '무단으로 침입하고 활동하기 편하게끔' 배려해주는 패치 또한 진행되었습니다.
이러한 다방면에 걸친 하이시큐 잔존 유저들에 대한 압박 및 로섹 유저들에 대한 직간접적 지원, 그리고 미래의 널섹 진출 희망자들에 대한 배려 등등이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며 하이시큐에서의 생활에만 만족하던 유저들을 점진적으로 로섹 및 널섹으로 진출하게끔 유도하고 있습니다. 로섹은 확실히 성공하였고, 널섹 또한 이러한 정책이 성공할걸로 예상되고 있습니다.
부족한 필력으로 두서없이 장황하게 글을 늘여쓴 거 같은데 마지막으로 요점정리후 글을 줄이도록 하겠습니다.
1. 안전지대에서만 머무르는데 만족하던 절대다수의 유저들을 자극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제작진이 게임내 인플레이션을 일으켰다.
2. 동시에 이 인플레이션을 극복할 수 있는 해법으로서 위험지대로의 진출을 제시하고 정책적으로 후원해주었다.
3. 이러한 정책의 성공으로 인하여 유저들의 플레이 방식이 조금씩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개인적인 추론과 부족한 정보 수집으로 인하여 다소 부정확한 부분이 있을수도 있습니다만, 전체적인 큰 문맥만큼은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하고 관대한 평가 부탁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