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한 업계에 있을 때. 업계의 하위층이나 중위층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보다 상위 계층에 있는 사람들에게 어떤 기대를 가집니다. 내 위에 있는 사람이 나보다 많이 알고 경험도 더 높다고 생각하는 기대죠.
사실 이게 어느 정도까지는 맞기도 합니다. 제 경우에도, 업계에 있을 때 처음 모신 기획팀장님께 말 그대로 백지상태에서 배웠고, 어느 정도 커리어가 쌓인 뒤부터는 같은 파트의 후배들에게 이런저런 도움을 주려고 노력했으니까요.
하지만 이 규칙?은 최상위로 가게 되면 별로 통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아니면 기대값이 너무 높았을려나요?
커리어 토크 좌담회에서 나온 네 리더급 개발자들의 대화는 실망 그 자체였습니다. 업계 최정상에 서 있는 거인들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한 식견을 날것 그대로 쏟아내는 바람에 보는 입장에서 오히려 당황스러울 정도였습니다.
관건은 철학의 부재입니다.
저는 2000년 5월 1일에 게임업계에 발을 디뎌 2015년 1월 23일에 회사를 그만둔, 약 15년의 경력을 가진 개발자입니다. 뜬금없이 경력 이야기를 왜 하느냐면, 첫 입사한 2000년과 그만둔 2015년 동안 업계에서 바뀐 것이라고는 13개월 연봉제가 사그라든 것 말고는 찾아보기 어렵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입니다. 그나마 13개월 연봉제도 법적으로 퇴직금 규정이 정비되고 나서야 슬그머니 사라졌을 뿐입니다.
한국 게임업계는 겉으로는 눈부신 성장을 했습니다. 2014년 수출액이 3조니 4조니 하는 건 자주 들리는 이야기죠.
하지만 그 안에는 여전히 바뀐 것 없는 열악한 노동환경이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야근은 물론이고 주말 근무를 해도 야근비나 특근비는커녕 공치사 한 번 받으면 만족인 생활, 불충분한 R&D 기간, 어거지인 개발기간을 멋대로 정한 뒤 그 기간 안에서 소화하기 위해 게임을 베끼라고 강요하는 경영진들.
단위 시간 안에 최대한의 이익을 뽑기 위해 게임을 베끼니 창의성은 물 건너 간지 오래고, 컨텐츠 대신 부분유료화 시스템만 발달한 기괴한 괴물이 탄생합니다.
여기에는 어떤 철학도 없습니다. 내가 왜 이런 게임을 만들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리더급 상급자에게 물어보면 '재미있는 게임'을 만들면 된다고 합니다. 이건 '착한 사람'만큼이나 모호하고 달성하기 어려운 목표죠. 그네들도 모른다는 겁니다. 뭘 만들어야할지.
(제가 그만둔 이유 중의 하나는 '개발기간은 10개월, 기획은 1개월 내 완료, 목표는 블레이드 베끼기, 리소스는 기존 폐기작에서 재활용, 참고로 유니티로 만드는데 유니티 경험자는 팀에서 1명 뿐'이라는 멋진 사업계획 때문이었습니다.)
전 일류가 아닙니다. 잘 봐줘야 이류 정도겠죠. 그렇기에 제가 다닌 이류, 삼류 개발사의 리더들이 눈 앞의 이익에 혹해 게임을 찍어내고 돈 벌 생각에 빠져 있는 것과 달리, 업계 톱을 달리는 개발자들은 뭔가 다를 거라는 기대를 갖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좌담회로 제 막연한 환상은 멋지게 박살이 났네요.
최고의 자리에 앉은 사람들이 여전히 예전의 구닥다리 개발법을 고수하고, 자기 변명을 위해 구글 같은 대기업까지 끌고 오고, 업계의 오래된 문제에 대해서는 현상 유지 이상의 복안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이대로 가면 대한민국 게임업계에 미래는 없을 겁니다. 그건 현재진행형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죠. 한국이 그동안 세계 게임업계에 차지한 위상은, 거칠게 말하자면 시장선점효과에 불과합니다. 최상위는 아니지만 중상위급 퀄리티의 게임을 찍어내어 질이 아니라 양으로 시장을 확보한 겁니다. 그것도 온라인 시장에서만요.
하지만 콘솔이 속속 온라인화하며 퀄리티 부분을 치고 들어오고 있고, 시장은 PC 온라인에서 모바일로 대세가 옮겨진 지 오래며, 양으로 찍어내는 게임은 이미 중국이 우리나라를 따라잡은 지 오래입니다. 선점 효과는 사라졌고 한국 게임은 이미 샌드위치로 치이고 있습니다.
이 와중에 근무시간이나 연봉, 복지에서 최상위 인재를 끌어올 메리트가 없는 게임업계에 인재들이 올 리 만무합니다. 미래를 책임질 인재가 안 오는 업계는 발전할 수 없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죠.
여기에 대한 우리나라 개발사들의 대응책?
리니지를 베끼고 와우를 베끼던 회사들이 이제는 중국 게임을 베끼고 있더군요.
몇 년 전만 해도 우리에게 한 수 배워야 한다며 낄낄거리던 바로 그 나라의 게임을 말입니다.
이 정도면 철학의 부재를 떠나서 그냥 철면피죠.
그나마 베끼기라도 잘 했으면 욕과 함께 돈이라도 벌었을 텐데, 성공한 건 몇 개 되지도 않아요.
이게 우리 나라 게임계의 현실입니다.
그래서 전 TIG에 뜬 40대 게임개발자 좌담회 타이틀을 보고 꽤 기대를 했습니다.
40대 이상이 살아남기 어려운 기형적인 이 업계에서 살아남은 동년배 동료들이 작금의 현실에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경영자들이 나오더라고요?
뭐, 저 사람들도 한때는 개발자였으니, 그리고 지금은 업계를 이끌어가는 탑 리더들이니 뭔가 깊은 소견을 갖고 있겠지. 라고 생각하고 기사를 읽었습니다.
솔직히, 전 처음에 기사를 잘못 읽은 줄 알았습니다.
한 번 더 읽어서 잘못 읽은 게 아니라는 걸 알고 나니 분노와 함께 서글픔이 몰려오더군요.
TIG에서는 의외의 반응에 당황했는지 인터뷰영상 전체를 올렸고, 좌담회 후기와 게임무크의 기사도 올라왔습니다.
//nairrti.com/2015/03/01/career_path/
...마는, 기사의 세부적인 부분 일부가 조정될 지는 몰라도, 전체 이미지를 반전할 내용은 아니더군요.
특히 '기사가 왜곡된게 아닌가 해서 풀영상도 찾아봤는데'( //chinesecomic.egloos.com/5787443 ) 에서 코론님이 찾으신 걸 보면 그야말로 뒷목 잡을 내용도 발견되었고요.
그러면, 좌담회에 나온 사람들만 그러할까요?
이 좌담회 기사가 올라온 날을 전후해 넥슨에서는 마영전의 랜덤박스 확률버그?가 터지고, NHN은 뽑기이벤트 후 바로 게임을 종료하는 미친 짓을 선보였습니다.
엔씨는 넥슨과 싸우겠다고 넷마블을 끌어들였고 그 뒤에서는 텐센트가 웃고 있다는 이야기가 들리죠.
텐센트 건이 사실이라면, 고구려 잡겠다고 당나라 끌어들인 신라가 생각나네요.
우리나라 최고의 개발사라는 동네들이 다 이 모양입니다. 제가 있던 우울한 개발사가 아니고요.
이 와중에 사원들의 복지와 이익의 향상, 갈수록 험준해져 가는 세계 게임시장을 돌파할 방법 같은 건 찾아볼 수 없네요.
주식 장기투자하시는 분은 우리나라 게임업계에서 손 떼시길 권합니다.
주절주절이 너무 기네요. 요약하고 마무리하죠.
덧. 사원 월급 떼먹고 나르신 분이 40대 개발자랍시고 나와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모습에서 이미 어그로는 충분히 쌓였습니다.
인선할 사람이 없으면 빼고 3인으로 진행을 하던가, 왜 그런 사람을 데리고 나왔는지 도통 이해가 안 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