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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전투 게임에 대한 잡상 듀란달 05-08 조회 12,251 공감 7 11

정의는진다 님의 자동전투 관련 게시물에 답글을 달다가 너무 길어져서 따로 게시물로 올립니다.

 

제가 보기에 국내 자동전투 게임의 문제는 자동전투+방치형 게임이라도 거기에 맞는 게임성이 부가되어야 하는데, 국내 게임들은 직접 조작하는 타입의 게임에 자동화를 억지로 집어넣으면서 이도저도 아닌 것이 된다는 게 문제라고 봅니다.

 

'칸코레'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이 게임에서 유저인 제독은 유닛에 일일이 명령을 내리지 않습니다. 함선을 개발하고 육성하며 맞는 장비를 쥐어주고 전장에 내보내기만 하죠. 전투는 함선들이 알아서 진행합니다. 

하지만 해역의 특성에 따라 어떤 함대를 보내느냐가 크게 갈라지고, 거기에서 선택지가 또 파생되기 때문에 제독들은 자신이 보유한 함선들을 이리저리 배치하고 장비를 변경해 보면서 최적의 조합을 찾아내기에 부심합니다. 

그렇게 찾아낸 조합으로 출격한 함선들이 적 보스를 물리칠 때의 재미는 직접조작계 게임과는 또다른 재미입니다.

 

그러나 지금 국내에 나오는 대부분의 자동전투 게임이 어디 그러하던가요? 

 

액션RPG를 예로 들어보지요. 이 장르는 직접 조작하여 적을 썰어버릴 때의 쾌감이 메인인 게임입니다. 타격감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자동전투를 하게 되면 이 액션성이 싹 죽어버립니다. 남은 건 ARPG의 껍데기를 쓴 자동육성 게임이지요. 별로 바뀐 것도 없는 화면 안에서 레벨 숫자만 올라가는 걸 보고 기뻐하는 기괴한 게임이 됩니다. 

이러니 해외 개발자들이 우리나라의 자동전투 게임이 만들어지고 팔려나가는 것에 영문을 모르겠다고 하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나라만한 갈라파고스도 없는 셈입니다.

 

저는 이 현상이 우리나라 특유의 '놀 줄 모르는 문화'에서 비롯되었다고 봅니다. 

 

우리나라의 어른들은 참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경제개발 시기에 쉴 시간을 아껴가며 일에 몰두하여 지금 세계 수위권의 경제를 가진 국가를 만들어낸 것에 경의를 표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놀 줄 모르는' 사람이 되어버린 어른들은 자식에게 노는 방법을 가르치기는커녕 자신이 못다이룬 꿈을 자식에게 떠넘기는 억압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나마 자신들은 어릴 때 술래잡기나 자치기를 하며 놀았지만 아이들에게는 그럴 놀이를 할 공간도 친구도 없습니다. 

모두 학원에 있으니까요. 

가난한 집 아이들이 부모님에게 학원에 보내 달라는 이유가 공부를 위해서가 아니라 거기에 친구들이 있기 때문이라는 보도는 우리를 서글프게 합니다.

 

학교와 학원으로 쫓겨다니는 아이들이지만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잠깐잠깐이나마 게임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어떻게 놀아야 되는지 모르기 때문에 치트 플레이를 꺼리지 않고, 놀이 상대를 어떻게 배려해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온라인 상에서 온갖 욕설과 모욕이 난무합니다. 

이를 감독하고 가르쳐야 할 어른들도 매한가지입니다. 놀 줄을 모르지만 이기고는 싶으니까 빠른 길을 선택합니다. 

애니팡 붐일 때 어른들이 동기나 친구들을 이기고 싶어서 게임 잘 하는 자식에게 '자동전투'를 시킨 것은 흔한 에피소드죠. 

롤에서 대리랭이 사라지지 않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노는 방법을 모르니 놀이의 재미보다는 경쟁에서 이기는 재미를 추구하는 겁니다. 그게 익숙하니까요.

학교에서 학원에서, 성적 더 잘 받아라, 옆자리의 친구를 이기고 올라가라는 것만 세뇌처럼 주입당하는 아이들에게 경쟁은 재미를 찾아내는 데 익숙한 놀이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한 차례 더 고약한 문제가 일어납니다. 

게임성을 파악하고 제대로 즐기기에는 시간이 너무 부족합니다. 그러니 즉물적인 흥분을 위해 현금을 지불해서라도 순위에서 남보다 앞서고, 누구보다 빠르게 고랭이 되려고 합니다. 

이 현상의 극단으로 치달은 것이 직접조작계 게임의 자동전투입니다. 

 

이쯤 되면 본말이 전도된 셈이죠.

 

전직 업계인으로서 참으로 참담하고 부끄러운 일입니다만, 국내 게임업계는 그런 시류에 올라탔습니다. 

아니 뭐, 당장 협력을 중시하는 게임을 내놓는다고 해서 그게 잘 팔려나가고 사람들의 생각을 바꿀 수 있으리라는 얼토당토 않은 생각을 하는 게 아닙니다. 

 

하지만 적어도, 보편화된 자동전투를 고려해서 자동전투로도 느낄 수 있는 게임성을 연구하고 찾아내 게임을 개발하는 것이 아니라, 당장 인기 있는 장르에 자동전투를 얹어서 고민 없이 돈을 벌려고 하는 행태가 창피하다는 이야기입니다.

 

(덧붙임)

개인적으로 저는 정부의 규제보다도, 현실에 안주하여 과거를 답습하는 것으로 편하게 돈을 벌려는 게임회사들 때문에 한국판 아타리 쇼크가 일어나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습니다. 

셧다운제 이후 1조원이 넘는 시장위축이 있었다느니, 게임산업의 성장률이 크게 감소했다느니 하는 기사들이 들려옵니다. 

그러나 과연 정부의 규제만이 모든 문제의 원인일까요? 외국산 게임인 리그 오브 레전드가 온라인 게임 순위 부동의 1위를 지키고 있는 것에서 생각해 봐야 할 점은 없을까요?

 

우리나라의 게임산업은 수많은 굴곡을 거쳐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러나 그 와중에 일종의 공복 환상이 배어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패키지 시절의 배고픈 감각을 잊지 못해서 어느 정도 안정권에 자리잡은 지금도 개발투자나 서비스 강화보다는 당장 더 많은 돈을 벌 방법에만 골몰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거죠. 

뭐, N모사라고 찍어서 말은 안 하겠습니다만.(쓴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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