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MORPG라는 장르가 울티마 온라인과 에버퀘스트라는 걸작으로 말미암아 태동한 이래, 전쟁이라는 테마는 게임을 구성하는데 있어 중요한 요소로 자리매김해왔다.
패키지 RPG만이 있던 시절, 플레이어는 인공지능과의 싸움으로만 만족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패키지 시절 RPG게임은 스토리텔링에 중점을 맞춰 기획이 되어왔다. 패키지 RPG를 만들던 많은 디자이너들은 전쟁을 제대로 묘사할 수 없었으며 온라인 환경에서 여러 플레이어가 만들어내는 전장을 꿈꿔왔으리라.
그리고 그런 디자이너 중에 울티마 시리즈를 만들던 리차드 게리엇도 있었을 것이다. 그는 DSL이나 케이블모뎀이 제대로 보급되기도 전인 97년에 울티마 온라인을 만들어 서비스를 시작할 정도로 자신이 만들어왔던 패키지 시절의 브리타니아에 대해 불만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어쩄든, 울티마 온라인은 전쟁이라는 테마를 온라인 환경에 구현해낸 최초의 게임이라고 봐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보다 완벽한 자유도를 꿈꾸던 게리엇이었던 만큼 울티마 온라인의 초기 세계에선 구걸, 소매치기, 살인강도 등 불가능한 것이 거의 없었고 오늘날 MMORPG들이 보여주는 그 어떤 PvP보다도 리얼리티가 가미된 PvP 환경을 조성해 주었다.
그런데, 오늘날의 MMORPG에선 울티마 온라인의 체취는 온데간데 없다. 필자를 비롯한 수많은 초기 MMORPG 팬들은 이 사실을 부정하고 싶겠지만 현실은 '울티마 온라인은 없다' 라는 것이다.
울티마 온라인의 무한한 자유도 대신 에버퀘스트가 선사한 꽉 짜여진 레이드 컨텐츠가 WOW를 통해 계승되어 널리 보급되어 있으며 악당이 되어 무차별적인 학살이 가미된 극사실주의 PvP 대신 다옥에서 시작된 RvR이 전쟁의 대명사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쉐도우베인과 같은 울티마온라인의 정체성을 계승하려는 시도가 없던 것은 아니었으나 결과적으로 과거 울티마 온라인만큼의 대중적 인기를 구가하지는 못했다. 거기에 차세대 전쟁게임을 선도하는 다옥의 RvR도 매니악한 컨텐츠라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것이 현실이다.
현재 상황을 단순화해서 보자면, PvE와 PvP라는 컨텐츠에서 대중적 지지를 얻고 소위 말하는 대세로써 MMORPG 시장을 잠식하고 있는것은 PvE라는 것이다. PvP는 대중적 지지를 얻지 못한채 PvE의 양념으로 격하되어 WOW에 포함되고 있는것이 현실이다.
이와 같은 일련의 상황이 발생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PvE와 PvP 컨텐츠가 가지고 있는 속성 탓이다. PvE는 인공지능을 상대하며 플레이어간 협력을 요구한다. 주 목적은 도전의식을 고취시키며 성취감을 맛보게 하려는 데 있다. 굳이 PvE에 한정짓지 않더라도 오락실에서 즐기던 수많은 인공지능을 상대로 하는 게임들이 죄다 같은 맥락에 있다.
반면 PvP라는 컨텐츠는 어떤가? 플레이어와 플레이어가 싸워야만 하는 컨텐츠다. 이건 스포츠와 유사하게 단순히 승부를 겨루는 캐쥬얼한 단계가 있는 반면 자존심을 걸고 혈전을 벌이는 하드코어한 단계까지 만들어낼 수 있다.
문제는, PvP컨텐츠는 사이클을 돌수록 필연적으로 규모가 줄어들 수 밖에 없다는 데 있다.
무슨말이냐면, 승부를 겨룬다는 것은 패자를 도태시킨다는 것과 직결된다는 것이다. 보다 전쟁과 흡사한 PvP 컨텐츠를 만들어낼수록 패자를 확실하게 도태시켜야만 한다. 누가 이기든간에 한쪽은 승자의 쾌감을 만끽하지만 한쪽에선 쓰디쓴 패배감에 젖게 만드는 잔혹한 컨텐츠다.
지금 우리가 논하고 있는것은 게임이다. 여가시간을 활용한 문화생활이며 시간을 소비하고 즐거움을 가져갈 때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잔혹한 컨텐츠를 즐길 수 있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어쩄든 울티마 온라인은 당시 온라인 게임 유저 모두를 하드유저라 부를 수도 있을만큼 대중화가 되지 않던 시기였음에도 하드코어하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다.
이걸 다소 게임이 통제 가능하게 다듬어낸 것이 다옥이라고 본다. 세개의 왕국간 프론티어 존이라고 하는 분쟁지역을 설정해 놓고 서로를 견제한다는 발상은 혁신적이었다고 평할 수 있다.
하지만 다옥 역시 궁극적 목적은 상대 왕국을 점령하는 것이었다. 점령을 하지 않으면 게임이 제공하는 모든 컨텐츠를 즐기지 못한다는 의미와 같다. 언제까지고 팽팽한 힘의 균형이 이루어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느냐만 힘의 균형이 무너지기 시작하면 그 서버는 급격히 쇠퇴일로를 걸을 수 밖에 없는 구조적 결함이 있다.
온라인게임이 유지되려면 무엇보다도 신규유저가 지속적으로 유입되야만 한다. 하지만 다옥과 같은 RvR 게임에서 힘의 균형이 무너져버린다면 신규유저는 특정 왕국으로만 유입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일부러 고생을 하고 싶어할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이런 문제로 다옥에게서 얻은 교훈을 WOW에선 보다 '스포츠 화' 하는 방식으로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전장을 즐겨봤을 것이다. 인스턴스 방식으로 미니게임과 유사한 전장은 다옥의 문제점을 피해갈 수 있긴 했지만 이와 같은 방식은 PvP 컨텐츠의 비중을 축소시킬 수 밖에 없었다.
불타는 성전에 등장한 투기장도 같은 맥락일 뿐이다. 보다 규격화해서 WOW가 자랑하는 화려한 조작성을 십분 활용했을 뿐이다. 아무도 이때의 WOW를 가지고 전쟁게임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국산게임으로 눈을 돌려보자. 국내 게임계는 리니지를 시작으로 전쟁이라는 테마를 집착하다시피 했다. 물론 리니지의 엄청난 성공으로 인해 이렇게 된 것이지만 리니지라는 게임은 어떤 면에선 울티마 온라인과 맥을 같이 했다고 보여진다.
울티마 온라인도 주요 분쟁이 발생하게 되는 이유가 사냥터나 광산과 같은 경제적인 문제 떄문인데 리니지도 사냥터를 놓고 분쟁이 벌어진다.
또한 상대 플레이어를 죽이고 강도짓이 가능하다. 여기에 리니지는 인첸트 시스템에 사행성까지 더해져 아이템의 희소성이 울티마 온라인에 비할 수 없을만치 어마어마하게 높다.
전쟁을 테마로 한 게임중 거의 유일하게 리니지가 롱런할 수 있던 데에는 PvP컨텐츠가 매력적이어서가 절대 아니었다는 것을 봐도 PvP 컨텐츠는 흥행에 크게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PvP 컨텐츠는 없어서는 안될 것이다. 다만 PvP 컨텐츠에 '올인'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전쟁이라는 매력적이지만 다소 피곤한 테마를 어떻게하면 캐쥬얼한 다른 컨텐츠와 연계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끝에 기가막힌 절충안을 제시할 수 있다면 아마 그 게임은 다옥의 뒤를 잇는 PvP 게임의 새 주자로 우뚝 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사족 : 울티마 온라인이 초기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했다면 에버퀘스트에 완전히 밀렸을 거라고 생각한다. 르네상스 패치로 게임 시스템이 어느정도 유저들간의 질서를 잡아줬기에 에버퀘스트의 대대적인 공세와 차세대 MMORPG 틈에서도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