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게임 커뮤니티건 나름 전문성을 자부하는 유저들이 모인 게시판이라면 국산게임과 해외 대작간의 퀄리티 수준차이에 대해 한번쯤은 진지하게 다루곤 한다.
한국사람은 대체로 애국자다. 국내에서야 서로 헐뜯는 모습을 보이기 일쑤지만 막상 해외에 나가면 그 어느나라 사람보다 조국에 대한 충성심이 가득하다는 것은 오래전부터 화자되는 이야깃거리이기도 하니까.
게임도 소위 까는 글들이 주를 이루지만 그 이면에는 국산게임이 세계를 호령하길 염원하는 마음이 실려 있음을 굳이 의심하지는 말자. 누구나 김연아나 박태환같은 영웅이 등장하길 바라고 있지 않는가?
서론은 이정도로 하고, 그럼 게임계의 김연아 박태환이 나오지 못하고 있는 원인을 본격적으로 논해보겠다. 예전에 아이온에 대한 얘길 하면서 기본에 충실하지 못하다는 비판을 한 적이 있다. 이번에도 같은 맥락의 주제를 꺼내보려 한다.
패키지 시장 붕괴. 너무 뻔한 주제같지만 국산게임이 해외에 안되는 가장 원초적인 문제는 사실 저거다. 한마디로 이나라는 게임을 만들어서 팔아먹을 온전한 환경조차 없다는 것이다.
마치 백사장 위에 거대한 빌딩을 쌓기위해 안간힘을 쓰는 상황이랄까? 더 좋은말이 있다. 사상누각... 기획이 건물의 골자라 한다면 정품시장은 지반에 해당되는 단계일 것이다.
본래 게임산업이란 패키지를 판매해서 수익을 올리는 산업이다. 콘솔이냐 PC냐 하는 플랫폼의 구분만 있었을 뿐이다. 북미, 유럽은 초기 콘솔기종인 아타리와 애플2 플랫폼을 시작으로 IBM PC로 넘어가면서 오늘날 EA, 유비소프트, 액티비전과 같은 메이저 기업이 성장한다.
일본은 콘솔인지 PC인지 모호했던 MSX를 시작으로 닌텐도가 아타리를 밀어내면서 세계 콘솔시장을 일본의 것으로 만들면서부턴 오로지 콘솔을 통해서만 성장했고 캡콤 코나미 스퀘어에닉스와 같은 유명 기업들이 성장하였다.
이렇듯 30년 남짓한 역사가 그리 길지 않은 게임산업도 엄연히 근간이 있고 이를 바탕으로 한 시장 질서가 확립되어있다. 오늘날 한국은 이러한 질서를 철저히 외면하고 있는것이 근본적 문제라 할 수 있겠다.
왜 국내 시장이 이렇듯 왜곡된 것일까? 이걸 알아보려면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야만 한다.
구미와 일본이 80년대부터 아타리나 패미컴과 같은 콘솔이 일찌감치 중흥기를 맞이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한국의 게임시장은 90년대에 들어서야 겨우 걸음마를 떼기 시작했다.
올림픽 이후 급속도로 경제규모가 성장하면서 교육용이라는 목적하에 정부주도로 80년대 말부터 IBM PC가 보급되기 시작했다. 소프트액션, 미리내와 같은 개발사가 상업용 게임을 개발하기 시작했으며 동서게임채널이 설립되어 해외 IBM PC 게임을 정발하면서 본격적인 패키지 시장이 형성되기 시작한다.
PC용 패키지 시장은 불법복제에 굉장히 취약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무엇보다 복제에 들어가는 비용이 콘솔용 카트리지에 비해 터무니없이 낮았고 개인 단위로 손쉽게 복제가 가능했기 때문에 적발하기도 어려웠다. 하물며 메이저 시장인 구미나 일본에서도 PC용 패키지 시장은 불법복제로 몸살이었는데 한국은 오죽했겠는가?
만약 우리도 좀 더 일찌감치 경제가 발전했더라면 구미나 일본처럼 콘솔이 보급되어 패키지 시장도 콘솔 위주로 형성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불법복제로 인한 피해도 많이 줄어들었을 것이고 지금과 같은 기형적인 구조가 되지 않았을런지도 모른다.
따지고 보면 오늘날 게임시장의 기형적인 상황도 급속도의 경제발전으로 인한 부작용의 하나인 것이다. 이와같은 기형적인 문제가 한국엔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산재해 있는것을 볼 때 이렇듯 게임시장에만 문제점을 토로한다는 것이 부당할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90년대 중반까지 도스 환경에서의 게임개발은 오늘날과 같은 천문학적인 개발비용을 요구하지 않았으며 폭스레인저, 그날이오면과 같은 단조로운 슈팅게임, 어스토니시아나 창세기전 등의 콘솔라이크 RPG는 패미컴, 슈퍼패미컴등에 익숙한 콘솔 유저들을 만족시켜줬으므로 불법복제가 난무하는 가운데서도 내수만으로 현상유지가 가능했다.
95년 펜티엄과 윈도95가 등장하면서 PC환경은 급속도로 변화한다. 부두와 같은 3D 가속 카드가 보급되고 플로피 드라이브 대신 대용량 시디롬이 새로운 매체로 바통을 이어받았다. 이 때를 기점으로 약 5년 남짓한 시간이 PC게임의 마지막 르네상스였지만 국내 업계엔 핵폭탄급의 충격으로 다가온 것이다.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PC 성능에 발맞춰 해를 거듭할수록 게임의 퀄리티가 올라갔고 기술적 수혜를 톡톡히 받으며 발달한 FPS 장르는 물론 타 장르도 다양한 도전과 실험으로 새로운 게임이 쏟아져 나왔는데 문제는 개발비용도 비례해서 올라갔다는 것이다.
손노리와 소프트액션을 비롯해 윈도 환경에 대응하지 못한 대표 개발사들이 도태되었다. 급변하는 환경으로 인해 치솟는 개발비를 대려면 게임을 팔아서 벌어놓은 자금이 있어야 했는데 국내에 만연하던 불법복제로 인해 거의 수익을 내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사태가 벌어진 것이었다.
보잘것 없던 규모인 한국시장이 먼저 초토화를 겪긴 했지만 메이저 시장도 90년대 말 인터넷의 보급으로 인해 불법복제 시장은 네트웍을 통해 기하급수적으로 커지게 되어 개발사로 하여금 PC 플랫폼에 게임을 발매한다는 것에 점차 회의를 갖게 만든다.
2000년대에 들어 많은 중소 개발사가 무너졌고 대신 EA와 같은 기업이 수차례의 인수 합병으로 덩치를 키운 거대 기업으로 급부상했다. 이 시절 개발사들의 선택은 불법복제를 피해 온라인 환경에 도전하느냐 와 상대적으로 안전한 환경인 콘솔로 피신하느냐 둘중 하나였다.
닌텐도의 오랜 콘솔시장 지배구도를 플레이스테이션이 뒤엎어가던 콘솔 시장의 상황은 PC 플랫폼을 주력으로 개발하던 구미 업계들에게 새로운 대안을 제시해 주었다. 소니는 닌텐도, 세가와의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매우 공격적으로 서드파티를 지원했고, 그 결과 EA와 액티비전 같은 구미의 중대형 퍼블리셔가 콘솔로 전향하기에 이른다.
반면 온라인을 선택한 것은 당시로썬 오리진 밖에 없었다. 게리엇 같은 괴짜가 아니고서야 회사의 운명을 아직 검증도 되지 않은 온라인에 맡길리 없었을테니 말이다. 물론 오리진은 울티마 온라인 발매를 전후로 EA에 합병되긴 했지만. 이 때부터 오랜기간 PC와 콘솔로 양분되던 메이저 업계의 구도가 콘솔로 기울기 시작했다.
이런 구도를 확립하게 된건 구미 업계의 지지를 한몸에 받게되는 엑스박스의 출현이었다. 엑스박스로 인해 게임 업계에서 PC플랫폼은 패키지로써의 매력을 상실해버리는 계기를 맞게 되는것이다. 즉, 패키지 시장의 흐름은 2000년대 들어 콘솔로 완전히 넘어갔다.
다시 한국의 얘기로 돌아가자면, 90년대 후반에 한국 게임산업은 결과적으로 도태되었다. 다이렉트X 기반의 윈도 개발환경을 따라잡지 못한것은 물론, 콘솔로 패키지 업계가 넘어가는 흐름도 전혀 따라잡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90년대 말 바람의 나라와 리니지를 계기로 한국 시장은 온라인 일색으로 재편되면서 패키지 판매를 통한 비지니스 모델은 불법복제와 사용자 편의등의 이유로 버려지게 된다.
이것을 가지고 오늘날 한국은 온라인게임 종주국이라고 자평하고 있다. 냉정하게 말해서 한국은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자원에 게임을 접목시킨 모험을 했을 뿐 게임 자체로써는 아무것도 발전한 것이 없다.
벤처기업 붐을 타고 자본 유입으로 절멸의 위기에서 다시 살아나긴 했지만 내수 시장에 안주한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MUG라는 이름으로 출발한 한국형 온라인 게임은 오리진이나 배런트같은 구미 회사가 패키지 RPG를 토대로 온라인 환경에 맞게 만들어낸 울티마 온라인과 에버퀘스트의 게임성에 상대가 되질 않았다.
그래서 오늘날 온라인 RPG게임을 지칭하는 단어가 한국에서 만든 MUG 대신 MMORPG가 쓰이는 것이다. NC, 넥슨같은 선두주자들이 일찌감치 해외진출이라는 야망을 품었다면 과연 오늘날 MUG라는 단어가 사장되었을까?
일본의 경우를 보자면 초창기부터 일본 게임들은 전 세계를 대상으로 만들어져 왔다. 구미의 게임과 구분되는 뚜렷한 성격을 가졌기에 오늘날까지 일본 게임은 게임계의 한 축으로 당당히 자리매김 하고 있다. 만약 일본이 내수에만 만족하고 닌텐도 게임기를 해외에 팔지 않았다면 가능한 일이었을까? 캡콤 코나미가 NC 넥슨처럼 내수에만 만족하고 도전을 두려워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해보라.
어쨌든 NC와 넥슨의 성장과 더불어 이 때부터 국내 게임산업 규모도 눈에 띄게 커져갔다. 커진 규모에 걸맞는 새로운 업적을 세웠어야 하지만 콘솔로 넘어간 구미 패키지 업계가 각종 장르를 쏟아낼 때 이들 기업을 위시한 국내 개발사는 아무것도 한 게 없었다.
대체 뭘 했는가 묻고싶을 정도로 한게 없었다. 이건 리니지와 바람의 나라 이후 국내 업계가 출시한 게임을 보면 쉽게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굳이 얘기해봐야 진부한 스토리기 때문에 언급은 하지 않겠다.
이렇듯 한국 게임업계는 온라인 기반으로 다시 태어났지만 1세대 업계가 가지고 있던 창의성이나 도전정신과는 단절되었으며 더불어 메이저인 구미 일본의 시장 질서와도 단절되버린 것이다.
비지니스 모델만 보더라도 한국 시장은 국제적인 룰이라 할 수 있는 패키지 판매 형식을 전혀 취하지 않고 있다. 당장 눈앞의 이익때문에 패키지 시장을 스스로 죽이고 있는 꼴이다. WOW를 비롯한 해외 온라인 게임들이 그저 인터넷 보급 문제때문에 패키지로 굳이 판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앞서 언급했듯 시장 질서라는게 엄연히 존재한다. 게임 시장의 질서엔 패키지 판매라는 것을 빼놓지 말아야 한다. 공장에서 시디를 찍어내고 케이스와 매뉴얼을 인쇄해서 포장하는 절차를 거치라는 것이다.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역설적으로 이런 비효율적인 판매 프로세스가 산업으로써 격을 유지하게 만드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2세대 한국 게임업계는 이런 일련의 룰을 완전히 무시한다. 국내에서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해외 진출시에도 마찬가지다. 그럴수밖에 없는것이 개발 프로세스 단계서부터 해외와는 따로 놀 수 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아이온과 와우를 비교해보겠다. 와우는 여느 해외 게임과 마찬가지로 온라인 기반이지만 패키지로 판매한다. 한국과 중국같은 특수한 시장을 제외하면 블리자드는 패키지 판매로 1차적인 수익을 내고 2차적으로 계정수익을 낸다.
그리고 정기적인 확장팩 출시로 패키지 수익을 지속적으로 내기 때문에, 개발 프로세스는 확장팩 단위로 나뉘어 있다. 아이온을 보자면 패키지 판매라는 개념이 없기 때문에 확장팩도 당연히 없을 것이고 정기적인 리뉴얼에 상응하는 것을 어필하기 매우 힘든 구조다.
해외 온라인게임에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확장팩은 단순히 상술로만 봐선 안된다. 개발진에게 일정 단위의 개발 스케쥴을 만들어주는데다가 확장팩 판매 수익이라는 모티베이션도 상당하다. 국산게임들의 대규모 업데이트와는 여러모로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국산게임이 구미시장에서 먹히지 않을때 흔히 드는 이유인 컨텐츠 부족도 이런 환경적 차이에 원인이 있음을 무시해선 안된다. 유저 역시 구미의 유저는 구미의 방식에 익숙해져 있는데 한국의 방식은 지금까지의 전례들로 봤을 때 유저들의 비용 부담이 줄어든다는 장점 보다는 컨텐츠 부족과 유지 관리 소홀이라는 단점이 더 부각되고 있다.
이런 문제점을 해결하려면 메이저 시장보다 작은 규모면서 소수의 유력 업체가 주도권을 쥐고 있는 한국이 체질 개선을 하면 되는 것이다. NC산하인 아레나넷이 개발한 길드워는 아이온과 다르게 구미 업계와 똑같은 프로세스로 개발을 하고 있다. 그런데 어째서 같은 NC 게임들은 국내 업계의 프로세스를 그대로 따라가는가 말이다.
이런 기형적인 시장 환경 탓에 2세대 업계가 형성된 이래 한국엔 패키지 시장은 소멸되고 있다. EA와 블리자드 아니면 누가 이 나라에 게임을 발매하려 하겠는가 말이다. 게임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면 NC든 넥슨이든 네오위즈던 국내 시장 질서를 원래대로 복구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언제까지 해외시장 공략한다면서 시장 형성도 제대로 안되있는 동남아나 중국에만 내다 팔 셈인가? 이정도로 규모가 커졌으면 이제 구미시장을 두드려야 하는 단계인데, 그럴려면 국내 환경부터 메이저에 걸맞게 바꿔서 모든 프로세스를 '표준'에 맞춰야 하지 않겠는가?
결론은 이거다. 우리 게임이 메이저 시장에서 제대로 이름을 드날리고 싶다면 먼저 이놈의 패키지 시장부터 살려야 한다. 그리고 그걸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주체는 소위 말하는 빅3를 위시한 유력 업체들이다.
인터넷 시대라 패키지 판매가 구식으로 보인다면 게임 산업에 대한 시각부터가 뭔가 단단히 잘못되어 있는 것이다. 패키지를 손으로 만질 수 있는것과 그저 데이터 상으로 깔리는 것과는 상품의 격이 다른 것이다.
게임은 문화상품이라는 것을 잊지 말자. 그리고 게임이라는 상품의 가치는 판매자가 어떻게 격을 맞추느냐에 따라 달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