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RPG라는 약자의 기초가 된 「롤플레이」라는 용어에 대해 생각해 보자. 「플레이」라는 단어에는 「연기」라는 의미도 있으므로 혼동되기 쉬우나, 원래 RPG에서 롤플레이란 「야구를 플레이한다」라든가 「피아노를 플레이한다」와 마찬가지로 「역할(role)을 플레이한다」는 의미이며, 연기라고 하는 의미는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은 점에 주의해주기 바란다. 초기의 RPG는 던전을 돌파하여 보물을 갖고 돌아오는 게임이었다. 던전에서는 갖가지 장애가 플레이어들을 기다리고 있다. 이에 장애의 종류별로 담당자를 정하여 협력하여 맞선다고 하는 게임 스타일이 채용되었다. 이것을 구체화하기 위해서 게임 규칙에다 「실체가 있는 몬스터는 전사. 실체가 없는 마물이나 악령에게는 성직자. 함정은 도적. 마법 장치에는 마법사」와 같은 식으로 각각 과제를 맡을 담당을 정한 것이다. - 바바 히데카즈의 마스터링 강좌, 캐릭터 플레이 편 |
롤플레이란 그래서, 플레이어에게 특정 상황에서 반드시 행동을 해야하는 - 전사에게는 전투, 도적에게는 상자나 문을 열어야 하는, 사제에게는 치료가 필요한, 그리고 이외의 상황에 대해서는 마법사가 행동해야하는 - 상황들을 만들어 줌으로써, 플레이 전체에 관심이 없더라도 주도적인 참여가 필요하도록 함으로써, 그 역할(role)을 수행(play)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컴퓨터가 게임의 플랫폼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여러 선구적인 개발자들 - 대표적으로 로드 브리티쉬 - 은 컴퓨터를 통해서 RPG를 플레이할 수 있도록 하자는 생각을 했고, D&D가 가지고 있는 여러 장치들을 활용해서 혼자서 컴퓨터 앞에 앉아 플레이를 하도록 만들게 된다. 이 과정에서 플레이어가 한 사람으로 축소되면서 발생하는 문제들 - 애초에 이야기 하였듯 클래스는 상호 보완적인 것이라 자체가 완벽하지 않다 - 을 해결해야했고, 그래서 초창기의 컴퓨터 RPG들은 클래스를 가지고는 있지만 실제 클래스의 역할을 전투와 대화 정도로만 한정한다.
같은 이유로 결국 클래스 시스템에서 각 클래스의 밸런스는 불가능하다.
즉 도적의 기능이 이제 상자 따기나 문 열기 같은 특수 기술이 아니라 전사의 백업 혹은 어새신으로써의 역할이 우선되도록 변형되기 시작했고, 전사는 도적의 어새신 능력을 보완하기 위해서 탱킹(tanking)을 위주로 설정된다. 마찬가지로 마법사는 범용적인 능력 - 실제로 D&D의 마법은 전투 마법이 전체의 약 20% 이하 - 을 전투로 한정하기 시작했고, 사제의 능력은 치료와 보조(buff)로 이동한다.
이런 전통적인 RPG의 흐름을 컴퓨터 RPG로 옮기는 과정에서 발생한 변형적인 플레이, 즉 솔로잉이 가능한 게임들이라던가 파티가 유명무실해진 경우를 살펴보면 위의 예와 같이 게임의 포커스를 전투로 한정했기 때문에 발생했다. 혹은 일본의 RPG 처럼 퍼즐의 요소가 대부분 장소 이동으로만 제한되고 전투가 유일한 장애물일때 게임에서 클래스가 가지는 의미는 없어진다. 누구나 공격 행위는 할 수 있고 (효율이 다르겠지만) 주요 상황에서 어떤 선택 - 마법이나 백스탭(뒤치기), 치료 - 을 할 수 있는가만 달라질 뿐이다. 전사가 아닌 레인저라고 하더라도 이도류를 사용할 수 있는 전사일 뿐이며, 도적이라고 하더라도 백스탭이 가능한 전사일 뿐이게 된다는 뜻이다.
이와 같은 변형적인 형태는 컴퓨터 RPG가 그 환경을 스스로 한정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며, 발더스 게이트와 같은 정통파 D&D류를 구현하려는 시도에서는 클래스들이 가지고 있는 의미가 완전히 원래의 역할로 돌아오지는 못했지만 전투 외의 것들과 관계하도록 만들었다는데서 큰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변형적인 설계가 이제는 주객전도되어 각 클래스의 역할이 유명무실해졌다고는 하지만, 과일칼을 가지고 병 따개를 더 많이 한다고 과일칼의 기능이 병따개가 되지는 못하는 것처럼 RPG에서 클래스와 파티플레이가 사라졌다고 보는 것은 옳지 않다.
이런 변형적인 플레이에서 또하나 나타나는 것이 최근 RPG의 필수요소라고 부르는 레벨링(leveling)이 있다. 플레이어 캐릭터가 자신의 역할을 올바르게 수행한 것에 대한 보상으로 경험 점수(exp.)를 얻고 레벨을 올려서 좀 더 강한 능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은 게임에 있어서 '동기부여와 보상'의 역할을 할 뿐이지 이것이 RPG의 핵심 요소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런 본말전도 덕분에 최근 플레이어들은 (심지어 개발자들조차도) 전략 게임의 캐릭터에 단지 경험 점수를 포함했다는 것만으로 전략 RPG라는 장르를 만들어냈는가 하면, 액션 RPG라던가 스포츠 RPG라는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넥슨의 서원일 대표가 카트라이더를 RPG라고 부른 예를 상기하자)
경험 점수가 각종 게임에 적용되는 것은 경험 점수라는 요소가 가지는 동기부여의 요소가 매우 강력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전가의 보도 처럼. 모든 게임 플레이어들은 게임 안에서 단순히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으로만 만족하지 않는다.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자신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에 큰 만족감을 느끼듯, 게임 안에서 자신의 성장을 목표로하고 그 성장으로 만족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 다른 어떤 장르에서보다 매력적이기 때문에 어드벤처가 단순히 문제 해결과 이야기만으로 생존하지 못한 것처럼, 액션에 성장의 요소가 들어가고 전략에 경험 점수가 포함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고 본다. 이것은 게임 디자인의 발전이 다른 장르보다 RPG에서 월등히 빠르게 일어난 결과이다.
시대가 움직임에 따라서 사물의 정의가 변화되는 것이야 당연한 것이지만 본래의 의미를 명확하게 이해하고 현재의 모습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를 논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고전적인, 전통적인 RPG가 의미가 다소 변화되어 다양한 게임들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이 변형된 모습들을 RPG의 본질이라고 호도해서는 안된다.
(경험 점수를 통한) 성장의 요소를 가지고 RPG를 정의한다면 이 세상에 RPG가 아닌 것이 어디 있겠는가.
(2005년 5월 14일, 블로그에 적었던 내용을 발췌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