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댓글로 전후 사정 설명 없이 시장의 성숙을 논하여 몇몇 논객분들의 혈압을 폭발적으로 상승시켜드린 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거두절미하고 제가 왜 시장의 성숙에 대해 거론했는지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1. 한국은 게임 개발 도상국이다.
한국은 게임산업의 성장세와 그에 대한 정부의 지원에 엄청난 괴리가 있는 나라입니다.
대작 게임으로 불리고 있는 게임들은 제작비가 기백억이 넘어가는데, 우리가 정부의 게임관련 정책이랍시고 듣게 되는 것은 그러한 게임들이 나오는 게 과연 가능할지 의문이 드는 수준입니다.
여러분들께서 익히 알다시피 근 10년간, 한국의 게임 업계는 괄목할 만한 성장을 보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흔히 산자이 천국이나 복제품 양산 국가라고 부르는 중국보다도, 성장하고 있는 신흥 산업에 대한 지원이 부족합니다.
와우의 서비스가 중국에서 매우 늦어진 것도 중국정부의 입김이 컸습니다.
물론 게임 자체에 중국에서 금기시하는 내용들이 들어가 있는 것도 문제 중 하나였고, 와우를 비롯한 모든 외국게임에 대한 판호(오베를 하려면 판호라는 등록을 취득해야 합니다.)가 오래 걸리기는 하지만, 와우가 입성할 시 성장하고 있는 내수 시장을 괴멸시킬 것이라는 판단이 앞섰기 때문이죠.
하지만 우리 나라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각 부처에서는 각기 다른 게임 업계 규제 관련 법안을 내놓는 실정이고, 커질대로 커진 파이에 빌 붙어 한몫을 챙겨보려는 정부 부처까지 생겨나는 판국입니다.
(여가부의 게임 셧다운제 도입은 삭감된 예산 350억을 다른 곳에서 메꾸기 위함이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이런 와중에 게임 업계 진흥이라는 것이 사실상 가능한 것이라고 보십니까?
과거 70년대 대기업 지원 정책에 힘입어 지금의 삼성이나 현대가 있듯, 앞뒤 안가리고 밀어줘야 클까 말까 하는 판국에 산업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앞뒤 안가리고 달려들어 판을 사분오열하고 있는 형국입니다.
2. 그럼 그런 사람들을 누가 설득해야 했을까.
저는 당연히 게임업계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봅니다.
그들이 말도 안되는 매도로 게임업계를 들쑤실 때, 제대로 방어한 적이 한번이라도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그들이 관계없는 전문가와 확인되지 않은 정보로 게임 업계를 매도할 때, 게임업계는 적절한 반론조차 제기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기에 시장을 선도하고 있는 개발사들, 아니, 개발사가 아니더라도 시장의 판도를 쥐고 흔드는 퍼블리셔들이라도 나서서 그러한 역할을 했어야 합니다.
흔히 어떤 게임의 개발비가 얼마고, 첫주 수익이 얼마라는 이야기는 많이 들어보셨으리라 믿습니다.
그럼 혹시, '게임에 대한 인식개선을 위해 열리는 포럼'에 대한 정보는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이렇듯, 아직까지 게임에 대한 인식이 돈 좀 되는 '사업'이라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자발적인 PR과 부정적인 인식을 개선할 액션을 취했어야 한다고 봅니다.
(지금은 슬슬 일어나고 있지요.)
3. 급격하게 덩치가 커져버린 산업.
게임 산업이 호황을 누리자 여러 거대 자본들이 앞다투어 게임에 투자를 하기 시작합니다.
앞서 말했다시피, 게임에 대한 시장 전체의 인식이 아직 성숙하지 못한 상황에서 시작되는 투자인지라, 산업이 아직 태동기에 불과하고 여러가지 제도 정비나 파이프라인 구축이 시급하다는 점을 간과한 상태에서 투자된 자본에 대한 회수만을 최우선으로 시도하니 점점 문제점이 불거지기 시작합니다.
우선 투자된 자금만을 노리는 가라 개발자들이 생기기 시작했고, 정작 실력있는 개발자들조차 투자된 자본에 쫓기다 보니 좋은 제품이 나오기가 어려웠습니다.
이러한 점이 현재 유저분들이 게임에 대한 전반적인 불신을 가지게 된 원인이 아닌가 합니다.
그리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4.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시장.
한국 게임업계에서 다양한 게임이 나오지 못하는 것은, 다양한 장르의 게임이 나와도 팔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팔리지 않는 게임은 사장되고, 그 뒤로는 유사한(하지만 좀 더 발전된) 시도는 아예 그 근원이 차단되게 됩니다.
나쁜 예는 나쁜 예로 남을 뿐이고, 그것을 참고하여 분명 위기를 벗어날 수 있는 시도도, 과거의 문제를 빌미로 사전에 차단당하고 맙니다.
(물론 한번 잘 나갔던 장르는 아무리 개판을 쳐도 계속 나옵니다. 댄스액션 같은 거요.)
여러분들이 그리워 하시는 많은 명작들(망했지만)들이 현대에서 부활할 수 없는 것은, 잘못된 시도에 대한 반성을 인정하지 않는 시장의 분위기 탓이라고 봅니다.
(물론 인내심없는 유저들도 한몫 합니다. 10년 만에 와우같은 게임이 나올거라고 보시나요?)
5. 끝으로.
GDC의 수장이자 저명한 게임 디자이너인 크리스 크로포드가 환갑을 넘겼습니다.
그는 밸런스 오브 파워라는 게임을 비롯, 자신이 원하는 것을 표현하기 위한 게임을 많이 만들었습니다.
또한 그는 The Art Of Computer Game Design과 같은 저서를 썼으며, GDC라는 국제적 게임 개발 컨퍼런스를 만들어 게임이 단순히 아이들의 놀이나 기업의 돈줄에만 그치지 않도록 선구자적 역할을 했습니다.
지금 한국에 필요한 것은.
아직 우리에게는 크리스 크로포드와 같은 사람이 탄생할 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는 점.
그리고 지금 이 시장에서 크리스 크로포드와 같은 사람들이 자라기 시작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직 한국의 게임 산업은 태동기입니다.
양적인 성장이 성장의 전부는 아닙니다.
아직 우리 게임 업계에는 질적인 성장이라는 과제가 남아있고, 그것은 사회, 그리고 소비자, 생산자가 모두 합심하여 이루어야 하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