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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리오 라이터 이야기 듀란달 06-02 조회 13,984 공감 6 39
아퀼리페르 님의 시나리오 라이터의 현황을 보고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어 적습니다.



아퀼리페르님은 시나리오 라이터의 입지 전망이 흐리고 비라고 말씀하셨으며 현 상황에서 볼 때 그것은 매우 옳은 견해입니다. 

하지만 그 이전에는 입지 전망이 폭우 레벨이었다는 것을 보충하고자 합니다.



2000년대 중반이 될 때까지 게임기획자 중에는 시나리오 라이터라는 직책이 공식화된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당시에는 기획이 지금처럼 시스템, 레벨디자인, 시나리오라이터, 스크립터 등으로 세분화된 것이 아니라 기획이라는 큰 틀에 뭉뚱그려진 것이었습니다. 기획자는 이 모든 걸 잘 해야했죠. 

저도 업무 시작하자마자 두 번 다시 안 보리라 생각했던 수학의 정석을 다시 사들인 기억이 나네요.

이 시기에는 게임업계에서 시나리오로 먹고 사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이야기였습니다. 차라리 그 당시 붐이던 판타지 소설 유행에 따라가 글을 쓰는게 라면값이나마 버는 데 더 도움이 되었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런데 이런 암울한 상황이 어느 게임의 등장으로 빛이 조금씩 보이게 됩니다.

블리자드의 다중접속역할수행게임, 월드오브워크래프트였죠.



워크래프트와 디아블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스타크래프트로 대다수의 한국 게이머들에게 세계 제1의 게임사로 자리매겨져 있던 블리자드가 처음 내놓은 MMORPG인 와우에서는 그동안 한국 게임에서 원시적인 형태로 존재하던 컨텐츠인 퀘스트를 체계적으로 정립해 한 차원 발전한 퀘스트 시스템을 탑재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퀘스트는 워크래프트의 세계관을 심도깊게 담은 스토리 기반으로 전개되고 있었죠.

처음에 개발자들은 '누가 퀘스트 읽고 게임 하겠냐. 시작하자마자 무기 들고 마을 밖으로 뛰어나갈텐데.'라고 비웃었지만, 생각 외로 수많은 사람들이 와우의 잘 만들어진 퀘스트에 빠져들어 세계관을 흡수하고 난상토론을 하는 것을 보고 충격받게 됩니다. 

물론 대다수의 사람들은 여전히 칼을 들고 마을 밖으로 뛰어나갔지만 적어도 내가 잡는 이 보스가 어떤 배경을 갖고 있는지 알게 되면 거기에 흥미를 갖게 된다는 건 확인하게 되었지요.

이 때 이후로 게임회사에서는 게임의 스토리 전달력과 그것이 갖는 매력에 대해 숙고하게 되었고, 이때부터 스토리텔러가 게임회사에 영입되는 계기가 됩니다.



제가 시나리오라이터가 아니라 스토리텔러라는 단어를 썼음을 상기해 주십시오.



네. 그 당시만 해도 게임회사들은 스토리의 파워에 대해서는 알게 되었지만, 이를 어떻게 게임에 적용시킬지에 대한 문법은 모르는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가장 직관적인 방법으로, 당시 유행하던 판타지 소설 작가를 게임회사로 끌어들여 시나리오를 쓰게 했지요. 성공한 판타지 작가의 경우 그의 소설을 게임화하는 방법을 쓰기도 했습니다.

이 방법은 아직도 게임회사들이 쓰는 방법입니다.



물론 나쁜 방법은 아니었습니다. 

작가들은 능력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들 세계관을 구성하고 그것을 문장으로 표현하는 데 익숙하고, 그 안에서 캐릭터들을 뛰어놀게 하는 데 익숙한 사람들이었으니까요.



하지만 문제가 있었습니다.

스토리텔러, 즉 판타지 작가들은 세계를 문장으로 표현하는 데 익숙하지만 그것을 배경 그래픽, 캐릭터, 애니메이션, 이펙트로 표현하는 데는 당연히 초보라는 점이었습니다. 

문제는 이것이 게임의 문법이라는 점입니다. 

게임의 문법이 지배하는 0과1의 세계에서 소설의 문법으로 표현하려니 당연히 아귀가 안 맞을 수밖에 없었지요. 유저들은 텍스트로만 설명되는 세계와 임무에 대해 짜증내기 시작했고 개발자들은 당황하기 시작했습니다. 

피터 드러커의 표현을 빌면 '전문가'인 작가들의 이야기를 게임 문법으로 녹여낼 '매니저'가 필요한 상황이었습니다만 그런 인물을 별도로 고용하기도 힘들 뿐더러 그런 역할을 능숙하게 수행할 수 있는 개발자도 드물었습니다.

이 때의 충격 때문에 몇몇 핵심 개발자들은 시나리오 라이터를 안 쓰겠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프로젝트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게임은 스토리가 필요한 것과 필요없는 것으로 나뉘며, 스토리가 필요한 게임에서 스토리가 없었던 지금까지의 한국 온라인 게임 시장에서, 스토리를 탑재하는 것은 점점 확대되는 대세가 되고 있습니다.

지금의 한국 게임 시나리오 라이터 분야는 확실히 흐리고 구름, 가끔 비인 상황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들이 업계에 뛰어든 결과이며, 이 상황은 조금씩이지만 계속 나아지고 있습니다.

스토리 전개에 있어 선구적인 게임인 와우의 역분석, 지금까지 스터리를 달고 나온 게임들의 패인 분석, 유저의 반응에 따른 스토리 전개 방법의 재검토 등등, 현업 시나리오 라이터들 또한 부지런히 노력하고 있으며 그 결과물들이 계속 비축되고 있습니다.


그 결과들이 쌓여가는 한 변화하는 게임시장에 발맞춰서 게임의 시나리오 또한 더 세련된 방법으로 전개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기에,

저는 오늘도 우산을 준비하면서 햇빛이 들 날을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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