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최근 생산 컨텐츠를 내세우는 게임들이 많습니다. 전투 일변도의 컨텐츠를 다양화하고, 생산 컨텐츠에 호의적인 여성 유저를 유치하고, 한편으로는 생산 재료로서 전투 전리품의 가치를 올리기 위하는 등, 여러 목적이 있겠죠.
여기서 상당수의 게임들은 생산 레벨=숙련도를 도입해, 레벨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전투를 잘 하듯이 숙련도가 높아질수록 생산을 더 잘하는 시스템을 차용하고 있습니다. 기왕 생산 컨텐츠를 만든 거, 유저들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생산 유저들에게 인센티브를 부여하기 위함이겠죠.
근데 여기서 감히 하나 질문 하나 하고 싶더군요. '어쩌면, MMORPG의 레벨 시스템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나쁘게 말하자면 아무 생각 없는 기획 아닌가' 라고요.
-현실 세계에서의 최적 생산 원리 = 최적 가격
자본주의에서 '얼만큼 생산하느냐 (How many)'라는 기준을 제기하는 것은 '가격'입니다. 생산품을 하나 판매해서 가격만큼 보상을 얻을 수 있다면, 생산자는 그 보상을 보고 얼만큼 생산할지 정하죠.
예컨대 가격이 1만골드면 하루 세개 생산하고, 2만골드면 하루 6개 생산하고, 3만 골드면 9개 생산하겠다는 식으로 정하는 게죠.
반대로 소비자는 가격이 싸질수록 더 많이 소비하려 합니다.
이렇게 되면 소비자와 생산자는 딜을 합니다.
소비자: 1만 골드에 9개! vs 생산자: 우리 3개밖에 못 판다 그 가격에는.
생산자: 3만 골드에 사면 내가 9개 팔지! vs 소비자: 3개만 사갈거다, 뭐냐 그 가격이.
소비자: 그럼 2만 골드에 6개 사갈게 = 생산자: 그 정도라면 판매할 수지 있지, 6개 가져가라!
이런 식으로 최적 가격과 최적 생산이 주어지면, 소비자는 자기가 원하는 가격에 원하는 물건을 살 수 있고, 생산자는 자기가 원하는 가격에 원하는만큼 판매할 수 있어 둘 다 만족하게 됩니다.
-숙련도 별 차등 보상이 존재하는 온라인게임 생산 원리 = 숙련도 채우는만큼
그러나 생산 숙련도가 존재하고, 숙련도 별 차등 보상이 주어진다고 가정해봅시다. 그 숙련도 별 차등 보상을 얻지 않으면 생산 활동을 지속적으로 하지 못한다고 또 가정하고요. (더 좋은 물건을 생산할 수 없다든지, 더 빠르게 생산할 수 없다든지, 특정 재료를 채집하지 못한다든지)
그래서 생산자는 생산 레벨업을 위해서는 생산품을 무조건 9개 만들어 숙련도를 올려야 한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러면 이런 현상이 발생합니다.
생산자가 9개를 생산하려면 3만골드는 받아야 수지타산이 맞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소비자에서는 9개나 살 거라면 개 당 1만 골드씩 지불하려 합니다.
이 경우 소비자 제시가격에서 거래가 성립되고, 생산자는 붉은 박스만큼의 손실을 입게 되죠.
-생산 숙련도로 인한 피해
(1) 생산자 입장: 과다 생산으로 인한 생산자 전체의 손해
소비자가 원하는 이상의 물건을 생산해 전체 시세가 폭락한다면, 생산직 유저들은 손해를 봐가면서 생산을 해야 합니다. 사실 상 이 손해를 감당할 수 없다면, 그 사람은 생산을 할 수 없게 되죠.
결과적으로 생산 컨텐츠가 '그들만의 리그'가 될 가능성이 있고, 초보자는 진입장벽 때문에 좌절할 수밖에 없는 현상이 필연적으로 나타날 겁니다.
실제로 생산 RPG의 대표작 마비노기도 생산 스킬 숙련하려면 부자 유저여야 한다는 인식이 팽배했고요. 그 생산 시스템을 차용한 마비노기 영웅전도 마찬가지입니다.
(2) 생산자 입장: 재료 아이템의 폭등으로 인한 폐해
생산 유저들이 너도 나도 숙련도 올린다고 재료를 경쟁적으로 사들이다보면, 재료 공급보다 수요가 많아져서 재료값이 폭등합니다.
이로 인해 생산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장 자기가 입을 장비를 만들어야 하는 유저' 혹은 '다른 용도로 그 재료 아이템을 필요로 하는 유저' 는 불필요하게 비싼 값으로 재료를 사야 했습니다.
(실제 마비노기 영웅전에서 '재봉'을 하려면 거미줄이 필요합니다. 근데 당시 마법사 캐릭터 이비가 파티원 힐링을 해주려면 '힐링 룬'이라는 소모 아이템을 만들어야 했고, 이 힐링 룬 재료 중 거미줄이 있었습니다. 생산 패치를 한 뒤 몇 주 간은 거미줄 가격이 너무나 폭등해서, 힐링 룬을 만들 엄두를 못 내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3) 소비자 입장: 완제품 폭락의 빛과 그림자
물론 생산 숙련도 시스템이 도입되면, 상당수의 장비는 과다 생산이 되므로 소비자에게는 이득이 됩니다.
허나 그게 손해로 작용될 수도 있는데요. 바로 소비자가 자신의 장비를 중고로 팔아야 할 때, 그 장비가더 폭락됐을 때입니다.
예컨대 1만골드로 장비를 마련한 소비자가, 다음 레벨 장비로 옮겨타기 위해서 기존 장비를 팔아치워야 한다고 합시다. (계산 편의 상 공급이 늘지 않는 한 중고품은 기존 장비와 동일한 가격으로 팔린다 가정합시다)
이 상황에서 숙련도 채우겠다는 생산자들이 더 늘어서 제품이 더 많이 쏟아져 나와서, 1만골드짜리 장비가 5천 골드로 하락해버리면? 소비자는 중고 장비를 처분해서 그 돈으로 신장비를 마련하기가 더욱 힘들어지게 됩니다.
(4) 소비자 입장: 소수의 숙련 생산자만이 등장해 과점 생산체제가 나타났을 때의 폐해
숙련 생산자로 가는 유저들 중에서는 생산으로 인한 손해를 감당할 수가 없기 때문에, 전체 생산 유저 중 극히 일부분만이 숙련 생산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숙련 생산자들이 그 동안의 손해를 만회하기 위해, 자신들끼리 단합해서 레어한 생산 아이템을 터무니 없이 비싼 가격에 팔게 되면, 소비자 중 레어 아이템을 장비할만한 고렙 유저들이 '높은 물가'에 시달리게 됩니다.
(5) 게임사 입장: 컨텐츠의 유명무실화
숙련도 시스템으로 과다 생산이 일어날 수밖에 없게 된다면, 유저는 과다 생산으로 인한 생산품 폭락과 손실을 우려해 생산 시스템에 손을 대지 않게 될 수 있습니다. 기껏 시간, 돈, 노력을 투자해서 1만명이 즐길 수 있는 컨텐츠랍시고 생산 컨텐츠를 만들었더니, 고작 500명만이 그 컨텐츠를 즐긴다면? 그러면 나머지 9,500명은 여전히 컨텐츠가 없다고 호소하겠죠. 컨텐츠를 만들었는데도 컨텐츠가 부족하다는 소릴 들으면 허탈하지 않을까요?
(6) 게임사 입장: 재료 아이템 시장으로 진출한 작업장 업자들에 의한 폐해
생산 유저는 늘어나는데, 재료 공급이 따라가지 못해서 가격이 폭등한다면, 작업장 업자가 다수의 계정과 오토핵을 이용해 이를 생산할 수 있습니다.
당장은 재료 공급을 작업장 업자가 해주니 시세 안정에 도움이 되는 듯 합니다. 하지만 재료 아이템 시장에서 막대한 자본을 얻은 작업장 업자가, 그 거대 자본으로 시세 조작을 하게 된다면...? 게임 내 경제 질서가 엉망이 되어버리겠죠.
-생산 숙련도 시스템 말고도 다른 시스템 장치는 얼마든지 있다
물론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생산 숙련도 시스템과, 숙련도 별 차등 보상이 없으면 누가 생산 컨텐츠를 하겠는가' 라고요. 혹은 '숙련도 별로 생산을 제한하지 않으면, 다수의 계정을 무분별하게 만들어 과다생산을 초래하지 않겠는가'라고요.
전자의 경우, 숙련도 별 차등 보상이 목적이 될 필요가 없다, 다른 '목적'에 따라서 유저들은 기꺼이 생산을 할 준비가 되어있다라고 반론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대항해시대 온라인의 생산자는 단순히 '숙련도 올려서 더 다양한 배, 다양한 대포를 만들겠다'라는 동기만으로 생산하지 않습니다. '국가 간 해전이 벌어졌을 때, 자기 나라, 자기 길드 연맹이 이기도록 하기 위해 더 좋은 물건들을 재어둔다'라는 동기로도 생산을 하죠.
사실 상 숙련도 별 차등 보상은 목적이 아닌 '수단'이고, '대규모 유저 간 분쟁에서의 승리'라는 목적을 위해 생산을 하는 셈입니다.
아니면 아키에이지처럼 단순한 흥미 때문에 나무를 많이 심고, 집을 짓고, 배를 만들 수도 있고요.
후자의 경우 생산품에 들어가는 재료, 혹은 노동력을 제한해버리면 그만입니다. 생산량은 노동과 자본에 비례하니까요. (자본=재료, 생산 수단 구비하는 돈-> 재료량과 비례)
즉 숙련도 시스템이 과다생산을 촉진하는 것이 자명한데도, '게임 내 경제질서를 지키기 위해 숙련도 시스템이 존속해야 한다'라고 말해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는 겁니다.
결론: 숙련은 부산물일 뿐. 목적으로 추구하도록 해서는 안된다
초등학교 아이들에게 RPG 게임이 뭐야 하면 얘네들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레벨 올리는 게임!'
확실히 레벨이란 요소가 있지만, 그건 RPG의 특성이지 RPG의 정의가 아니죠. 경우에 따라서 만렙을 낮게 잡아 유저들 모두 컨텐츠를 고루 즐기도록 할 수 있고, 만렙을 높이 잡아 고렙 유저의 자존심을 높일 수도 있습니다.
생산도 마찬가지입니다. 숙련도 시스템이 아예 없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하지만 초등학생들이 RPG를 레벨제 게임이라고 생각하듯, 기획자가 '이건 RPG니까 숙련도같은 걸로 생산레벨제도를 꼭 만들어야 해!'라고 무비판적으로 생각하면 곤란하다는 거죠.
현재 생산활동이 전적으로 숙련도에 따라 이뤄지는 게임들이 위와 같은 많은 폐해를 일으켰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좀 더 비판적으로 접근하고, 필요없다 싶으면 숙련도 시스템과 숙련도 별 차등 보상을 아예 폐지해도 되지 않은가 싶습니다. 숙련도에 따라 생산활동을 딱히 제한하지 않는 아키에이지처럼요.
오히려 저는 숙련도로 유저들의 생산을 컨트롤하려 하지 말고, 경제적 이익, 혹은 유저 간 전쟁, 유저 간 영토 경쟁 등, 하우징, 등등의 엔드 컨텐츠로 생산 동기를 자극하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덧1) Q: 본문은 생산 숙련도 시스템을 목적으로 보지 말라고 한다, 하지만 생산 숙련도를 높이는 유저들 상당수는 그로 인한 경제적 보상을 목적으로 하지 생산 숙련도 자체를 목적으로 두지는 않는다. 현존하는 생산 숙련도 시스템이 '숙련도를 목적으로 본다'라는 본문은 지나친 비약 아닌가?
라고 비판하실 분이 있을 거 같아 말합니다. 말장난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나중의 경제적 이득을 위해 숙련도 채우는거나 숙련도를 위해 숙련도를 채우는 거나 결국은 같은 말입니다.
왜냐면.... 솔직히 말해서 생산으로 인한 손해를 참아가며 생산스킬 찍는 유저들, 그 대부분은 '나중의 경제적 이득'이 얼마나 되는지 계산 못하거든요. 그냥 '높으면 나중에 돈 되겠지' 그 생각으로 생산 스킬 찍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말로는 '나중의 이익'이라는 명분을 가지고 있지, 실제로는 그냥 숙련도 올라가는 것만 바라보며 생산을 하도록 몰아붙이는 게 지금 시스템의 현실입니다. 마치 지금 입시생처럼, 말로는 '내가 더 좋은 삶을 살기 위해 좋은 대학 가려고 공부한다'라고 말하지만 그 게 '좋은 대학 가려고 수능 공부한다'라는 말과 별반 다를 게 없는 것처럼요.
덧2) Q: 현실 경제에서도 숙련도는 생산 활동에 큰 영향을 끼친다. 가장 현실에서 이를 벤치마킹하는 게 잘못되었단 말인가?
현실경제에서 숙련도는 생산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얻어지는 부산물입니다. 하지만 엔드 컨텐츠가 분명하지 않은 게임들은, 그냥 '숙련도 자체가 목적이나 다름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항해시대 온라인, 이브 온라인처럼 경제 개념이 확실한 게임은 논외)
본질이 부산물인 요소를 '목적'으로 벤치마킹하려 하면 어딘가는 꼬일 수밖에요. 개념 자체가 다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