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요즘 아이디를 바꿔야 하나 고민중인 즐다이입니다.
언리얼토너먼트3에 대한 감상, 예전에 한창 말이 많았던 XYZ 이야기 이후로 세 번째로 얼굴을 들이밉니다.
반갑습니다.
이 글은 사회생리특수론, 유아교육론, 시장경제론에 의거하여 쓰여졌습니다.
조금 긴 글이 될 것 같으니, 긴 글을 싫어하시는 분은 최하단으로 이동해 결론만 읽으셔도 무방합니다. :)
0. 현대의 사람
사람은 기본적으로 상호작용의 동물입니다. 그래서 인간이라고 하지요.
상호작용을 기준으로 살아가는 생명체들은 기본적으로 작용과 반작용의 테두리 안에서 행동하게 됩니다. 물론 이 작용과 반작용의 기준점은 개개인마다 틀려서, 단순하게 한 가지 사건만 놓고 본다 할지라도 서로 다른 시각의 해석을 내놓기 일쑤입니다.
이러한 작용과 반작용을 조율하는 기준점은 또한 그 개체가 접해온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한 자기기준(자아라고 하겠습니다.)으로 이루어집니다.
지금의 세상에 와서, 사람들은 접할 수 있는 수많은 유희거리들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 유희거리라는 것은 단순하게 양의 문제를 떠나서, 장르를 가리지 않는 다양함도 갖추고 있지요(캬바레 등의 특수문화상품부터 컴퓨터를 통해 흔히들 접할 수 있는 게임에 이르기까지).
더불어, 정보화 시대의 가장 큰 부작용인 정보 범람이 겹쳤습니다. 때문에 사람들은 많은 유혹 속에서 삽니다. 거의 대부분의 상황에서 알게모르게 많은 유혹을 받게 되죠. 하여 현대 생활은 자기절제가 기본이 되고 있습니다.
1. 놀이의 발전
문명의 이면에는 언제나 놀이가 있었습니다. 놀이는 여러 의미에서 인간에게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다 주었지요. 생활의 활력이 되고, 기쁨과 즐거움을 주며, 사회성을 확립하고, 단결과 협동의 가치, 행동의 지혜, 사고력과 지혜를 증진시키는 위대한 수단입니다.
사회성이 있는 동물은 기본적으로 놀기 좋아합니다. 사람은 특출난 지성과 지혜를 가지고 생존했고, 그 때문에 놀이에 대한 욕구는 더 컸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인간 사회에서의 놀이는 많은 범주로 발달해 왔습니다. 단순한 언어 유희로부터 시작해서 그림, 조각, 조소, 방직 같은 직접 유희를 만들어 냈습니다.
물론 가시문화적 측면에 그치지 않고 원초적인 자극을 통한 놀이 문화인 S*X, 사냥, 박투, 살인, 전쟁에 이르기까지 현대 사회를 기준으로 볼 때에는 야만스럽고 비인륜적이라고 취급받는 어두운 면의 유희 문화도 발달했죠.
이러한 유희 문화는 사람의 머리가 커지면서 점차적으로 규모와 질, 범위를 넓혀 나갔습니다. 기술이 발전을 거듭하면서 지금에 와서는 시공간을 초월하는 놀이 수단까지 만들어내게 되었습니다.
이른바, 컴퓨터 게임이죠. :)
2. 유희 해석
그간 현대 문명의 최고의 유희는 영화였습니다. 영화는 회화적 예술성, 특이한 디자인, 음악적 예술성을 한꺼번에 가지고 있었고, 또한 대리경험을 위한 견고한 이야기도 내포하고 있었죠.
특히 시청각을 한꺼번에 자극하기 때문에 관람하는 사람은 강렬한 현실감을 느낄 수밖에 없고, 그 탓에 극의 내러티브에 집중되어 간접적인 체험을 하게 되는 맛 때문에 본질적인 한계와 단점에도 불구하고 각광을 받아 왔습니다.
사람이 만든 것들 중, 여러 의미에서 가장 발달한 놀이 문화는 이 영화였죠. 하지만 영화 역시 관람형 유희였고 관람형 유희들이 가지는 치명적인 단점을 극복하진 못했습니다.
바로 사람의 본질을 자극하는 놀이가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시간과 공간의 제약은 당연했고요).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사람은 상호작용의 동물입니다. 주체는 자신이 되어야 합니다. 헌데 관람 유희는 반드시 관람자에게 주체를 제공자에게 일치시킬 것을 강요합니다.
관람자는 체험의 주체권을 잃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리 체험이 되고, 사실상 컨텐츠의 가치를 100% 체감할 수 없으며, 관찰하는 것 이상으로 몰입될 수 없습니다.
웃기게도 관람자들은 이러한 관람 유희를 즐기기 위해 재가공 작업을 거쳐야 합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게 된 내용을 조합하고, 번역하여 자신의 지식을 기반으로 작용을 판단해 현상에 맞춰 재생합니다. 관련한 지식과 경험이 없다면? 관람자들은 내용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단지 유추할 수는 있겠죠.
이러한 에뮬레이션 특성은 유아들에게서 쉽게 알아낼 수 있습니다. 사회와 생활 경험이 모자라고, 기반 지식이 쌓여 있지 않은 유아들은 대부분 극의 내러티브에 집중하지 못합니다. 내러티브에 집중하지 못하기 때문에 관람에 집중하지 못합니다.
내러티브에 집중하지 못한 유아들은 영화를 관람하면서 현상에 집중합니다. 그들에게 있어 영화는 대리체험의 수단이 아니라 현상입니다. 강렬한 시각 자극과 청각 자극은 당연히 관심을 불러 일으킵니다. 그리고 그러한 외부 자극은 단편적인 감정을 발췌하고 자극하지요.
결과적으로, 유아들은 영화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들이 이해하는 것은 현상 뿐입니다. 그들의 뇌리에 남는 것은 영화 내용 중에서 특히 관심을 불러 일으킨 장면에 국한됩니다. 내러티브를 이해하지 못했으니 장면의 상호작용을 이해할 리가 없습니다.
영화를 이해하려면? 지식과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유아들은 영화를 재단하기엔 가진 게 미천하네요.
저연령층을 대상으로 한 애니메이션이 정말로, 단순히 유치하기만 한 걸까요? :)
3. Hyper-Entertainment
컴퓨터 게임은 공간과 시간에 많은 제약을 받던 이전의 놀이 문화 한계를 단숨에 뛰어넘었습니다. 컴퓨터 게임이라는 놀이는 그 자체로 이전의 모든 유희를 아우를 수 있는 초월성도 가지고 있었죠.
대부분의 경우에 사람들은 시간과 공간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이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놀 거리인 게임을 찾을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게임을 하는 데에는 특별히 다른 도구가 필요한 것도 아니고 굉장히 많은 단발성 추가 투자금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아주 손쉽게 접근할 수 있고, 또 손쉽게 체험할 수 있죠.
덕분에, 너무나 견고해진 기성사회의 틀 탓에 생존의 문제에 직결하여 시간과 공간의 제약에서 자유롭지 못한 현대인들은 게임이 가진 회화적 예술성, 견고하고 색다른 디자인성, 청각을 자극하는 멋들어진 음악성, 대리경험에 도움이 되는 이야기, 본능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는 격렬함에 매료되었습니다.
게다가 현대 사회의 유희문화에서 상실되었던 가장 중요한 작용점이 부활했습니다. 바로 상호작용성이지요!
게임은 사람들에게, 일방적으로 내러티브를 강요하거나 조건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전통적인 옛 놀이들이나 보드게임으로 칭해지는 말판놀이들을 접해보셨습니까? 게임은 마치 윷놀이처럼, 카탄처럼 말판을 깔아주고 룰을 정해줍니다. 그 이외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영화처럼 자동적으로 시작하는 것도 아닌데 왜 매료되었을까요? 자신이 무언가를 해야 반응이 돌아오기 때문이었습니다. 간단해 보이지만 대단한 부분입니다. 내가 어딘가로 이동하고 싶으면, 이동하기 위한 룰을 지켜 명령하면 됩니다. 어떤 행동을 하고 싶으면, 룰을 지켜 명령하면 되죠. 명령하지 않으면 자체적으로는 어떤 반작용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 환상성이란! 발전한 게임들에서 사람들은 판타지아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영화에서처럼 손댈 수조차 없는 그림의 떡이 아니라, 건드려 볼 수 있는 진짜 판타지아가 닥친 것과 다름없었지요.
사람들은 잊어버렸던 원초적인 자극과 함께 지금껏 이룩했던 문명의 유희를 한꺼번에 수용할 수 있는 꿈의 수단을 찾은 것이었습니다. 몇 번이나 강조해도 모자람이 없을 만큼 대단했습니다. 사람들은 실제와 같이 동작하는 그 세계에서 이전과는 질이 다른, 완벽에 가까운 대리 체험을 할 수 있었지요.
이 완벽에 가까운 대리 체험은 또한 사람들에게 새로운 배움의 기회를 제공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해 본 적이 없던 일이라도, 게임으로서 그 컨텐츠가 제공되기만 한다면 모든 사람들이 일단 체험해 볼 수가 있다는 건 정말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혁명입니다.
신의 선물에 가까운 특성 탓에, 게임은 단순한 엔터테인먼트를 뛰어넘게 되죠. 바로 하이퍼-엔터테인먼트의 등장과 군림입니다.
4. 배움과 사람
앞서 말씀드렸듯, 사람은 작용과 반작용을 통해 경험을 쌓습니다. 그리고 경험에 기반하여 새로운 정보를 가공해 지식을 쌓지요.
여기에는 모든 인종을 초월하는 대단위의 법칙이 존재합니다.
사람이 지식과 경험을 쌓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지성에서 야기되는 호기심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여러 가지 자극에서 많은 호기심을 나타내고, 사람에 따라 정도와 방향은 다르지만 그 호기심을 해결하려고 노력합니다.
호기심을 해결하는 와중에 성공도 할 수 있고 실패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경험은 고스란히 지혜로 저장됩니다. 아 이 상황에서는 이렇게 하면 안좋겠구나. 이럴 땐 이렇게 하는 게 좀 더 좋구나.
한 번 저장된 지혜는 지능을 통해 정련됩니다. 특정한 행동을 할 때에 이러한 방법이 좋았다면 서서히 그게 귀찮아지기 시작하죠. 좀 더 편하게 하는 방법은 없을까? 이러한 사고의 끝에서 사람들은 보통 세 가지 정도의 패턴을 보입니다. 귀찮음을 다른 귀찮음으로 포장하거나, 당면한 귀찮음을 해결하기 위해 다른 귀찮음을 희생하거나, 귀찮으니까 그냥 스스로 손해를 감수하죠.
현상에 대한 경험을 통해 지혜를 쌓고, 지능을 통해 행동을 정련하면 다음부터는 습득에 필터를 적용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게 나한테 이득이 될까? 이득이 되지 않는다면 재미는 있을까? 귀찮지 않을까? 아이구... 같잖은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무네요. 이런 거 생각하기가 귀찮지 않습니까?
결국 사람들은 지금까지 겪었던 기초 경험을 벗어난 자극에 대해 새로운 판단 기준을 마련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현상의 유지 여부-호기심 척도-피해의 추산]으로 연결되는 사고과정입니다.
경험을 통해 새로운 것을 맞닥트리는 게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힘들다는 건 곧 귀찮다는 거죠. 새로움이 자신의 생활에 미치는 영향이 어떨지, 얼마나 흥미가 동하는지, 결과적으로 희생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고려해보게 됩니다. 특히 생존에 결부될수록 시간과 공간에 자신을 옥죄게 됩니다. 아 이건 하기 어려울 거 같은데... 그래도 해보고는 싶어. 어떻게 맛만 볼 방법은 없을까? 이봐요. 욕심이 과하네요.
아무래도 위험을 감수하긴 귀찮다면, 새로운 경험은 어떻게 쌓을까요? 간단합니다. 대리체험을 하는거죠. 지금껏 쌓아온 지혜화 지식이 있으니 거기에 맞춰 새로운 걸 보면서 재단해 받아들이면 됩니다. 우와 이런 귀차니즘 말기 같으니라고!
헌데 대리체험이 완전하지 않다는 걸 곧 눈치채게 됩니다. 완전하게 경험을 해 보려면 아무래도 직접 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죠.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기서 체험의 지속 여부를 결정하게 됩니다. 보통은 대리체험이 한계를 보이는 상황에서 이만큼 맛봤으니 뭐... 하고 손을 떼게 됩니다. 귀찮거든요. :)
네. 사람은 결국 귀찮아하는 존재입니다. 노는 건 좋은데 귀찮은 건 질색. 그래서 기술이 발전에 발전을 거듭했죠. 지식의 전달 수단은 원론적으론 귀차니즘 때문에 발생했습니다. 그와 더불어 놀이는 점차 복잡해지고 인간을 배우는 수단으로서의 숨긴 가치를 지니게 되었죠. 귀차니즘 만세!
그리고 귀찮음이 한계에 도달하면? 사람은 새로움에 관심을 끊거나 현상을 유지하기 위해 새 귀찮음을 배척하죠.
5. 완성형 놀이
컴퓨터 게임을 만드는 기술이 점차 발전하고, 점점 실제 사회를 표현할 수 있게 되면서 사람들은 단순하게 흥밋거리였던 게임을 완전히 다른 시각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애초부터 놀이는 대리 체험의 수단으로써 작용하긴 했지만 이득에 비해 복잡하고 강렬함은 떨어졌으니까요.
컴퓨터 게임은 이러한 사람의 귀찮음을 초월하는 영역에서 거의 완벽에 가까운 대리체험을 가능하게 만든 유일한 매체였습니다. 말 그대로 기술의 승리였죠. 지금까지 현실생활의 판단 기준을 차지해 온 귀찮음은 더 이상 굴레가 되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생각해보세요. 농사 한 번 지어보고 싶은데, 곡괭이질부터 시작해서 땅을 얼마나 파야 하고 어느 정도나 고르고 볍씨는 어떤 걸 선택해야 하고 또 어떻게 심어야 하는지... 어떻게 어떻게 어떻게의 연속입니다. 하나를 배우면 두 개의 문제가 튀어나오는군요. 귀찮을 만 합니다.
헌데 그건 단순히 부담을 감당하기가 난감해서일 뿐입니다. 만약 이러한 실제 부담이 거의 없다면 어떨까요? 곡괭이를 사 볼까요? 하고많은 상점중에 철물점과 대장간을 찾고 곡괭이를 취급하는 상점을 찾고 곡괭이의 모델을 찾고 알맞은 곡괭이의 알맞은 규격 제품을 선택하고 가격이 얼마인지 물어보고 대금을 지불하고 곡괭이를 챙기고 가져와서 사용하기까지의 모든 과정이 마우스 클릭질 몇 번으로 끝납니다. 딸깍딸깍.
마우스의 클릭은 "행동"을 의미하죠. 그게 룰이니까, 컴퓨터 게임을 하는 사람들은 귀찮더라도 그 정도는 배웁니다. 뭐 크게 부담이 되지도 않잖아요? 마우스 클릭질과 더불어 시각적 자극과 청각적 자극을 통한 반작용은 유저에게 행동의 연관관계를 경험시킵니다. 단순한 마우스 클릭이 행동의 연계로 승화하는 것입니다.
단순한 표현에 불과하지만, 사람은 그것을 보고 경험에 기반한 지혜로 지식을 에뮬레이션 할 수 있습니다.
소지품에서 곡괭이를 더블클릭하면 곡괭이를 장비합니다. 아 내가 가진 곡괭이를 손에 쥐어야 하는구나.
곡괭이를 사용하면 땅을 향해 내리깝니다. 아 곡괭이는 이런 식으로 쓰는구나.
곡괭이를 사용하고 나면 대충 땅이 파인 것 같습니다. 아 곡괭이를 쓰면 이렇게 땅이 파이네.
소지품에서 씨앗을 사용하면 판 구멍에 씨앗을 심습니다. 오호. 파종이란 게 이런 거군.
물을 주고 비료를 주면 뾰록~ 하고 새싹이 돋아나네요. 음. 물과 양분을 주면서 관리하면 이렇게 크는구나.
유저들은 컴퓨터 게임을 통해 놀면서 경험해보지 못한 과정을 체험해보고 거기에 대한 지식을 얻게 됩니다. 이러한 장점은 귀차니즘마저 초월한 단계에 있습니다. 현실에서 체험해 볼 수 없거나, 위험하거나, 부담이 되는 것들 모두를 해볼 수 있습니다.
6. Death and Drop
자. 여기서 문제가 발생하죠? 게임이라는 것은 최적화된 대리경험의 수단이기 이전에 엔터테인먼트 상품입니다. 상품의 기준은 뭐죠? 네. 당연히 수익을 얻어야 합니다. 수익을 얻기 위해선? 팔아야죠.
상품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게임은 개발 방향의 자유를 상당 부분 억제당합니다. 사람은 각기 다른 취향과 판단 기준을 가집니다. 그런데 사람이 한둘이던가요? 대략잡아도 60억이 넘습니다. 이 중에서 유효 가용 인원을 10%로 잡는다고 해도 6억입니다.
상품으로서의 가치를 고수하면서 6억 명에 달하는 사람들의 취향을 모두 커버해낼 수 있을까요? 불가능합니다. 이론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가능할 수가 없는 문제죠. 그럼 상품으로서의 가치를 지니기 위해 개발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방향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가장 많은 수요층이 있고, 가장 중첩이 두터운 취향을 기본으로 선택해야 합니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엔터테인먼트를 즐기는 이유는 대리만족을 위해서입니다. 자신이 실제로 하기 힘들거나, 하지 못하는 일을 다른 방법을 통해 체험하고 거기서 만족감을 얻기 위해서죠.
이 부분에서 다시 사람의 본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네요. 사람은 착하고 못되고를 떠나서 반드시 억제된 잔혹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잔혹함이 억제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사회 체제 때문이고 그것이 문명을 유지하는 데 필수불가결하기 때문이죠? 억제된 잔혹함은 억제되었기 때문에 정상적인 잔혹함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마다 각기 다른 야성을 표출합니다.
그렇다면 사람에게 있어 가장 강렬하게 드러나는 야성은 무엇일까요. 바로 약육강식과 부모성입니다. 가치 기준에 따라 다른 존재에게 해를 입히는 것을 정당화하고, 자기 이득 중시의 행동을 하게 만드는 원초적인 잔혹함이죠.
재미있는 점은, 사람이 세상을 살면서 가장 많은 스트레스를 받는 부분도 역시 약육강식이라는 것입니다. 현대 문명의 사회 체계는 매우 정교해서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것 같지만 사실 지배층과 피지배층이 엇갈리는 약육강식의 룰을 기반하고 있습니다.
사회에서 이탈하거나 패패한 사람은 죽습니다.
죽는다는 것은 더 이상의 기회가 없다는 뜻이죠. 사람의 존재 가치는 자신이기 때문에 자신이 없는 세상은 사람에게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생존을 위한 스트레스는 생각보다 강렬하고 때문에 거기에 대해 강력한 욕구를 발산합니다. 보통 파괴본능이라고 하죠?
스트레스와 현실의 패널티 앞에서 사람은 갈등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스트레스가 정도선을 넘어가지 않는 한도 상황-즉 이득 계산을 위한 이성을 유지할 수 있는 보루가 있다면 사람은 절대로 목숨을 거는 모험을 하지 않습니다. 죽으면 끝이니까요.
반면에, 컴퓨터 게임에서는 죽음이 없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모든 대리 체험에는 죽음이 없죠.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냐구요? :)
사람은 컴퓨터 게임을 즐기기 위해 크게 2가지의 자기 요소를 희생해야 합니다. 기회와 비용. 현대의 사회생활에서 기회와 비용이 개개인에게 미치는 엄청난 영향력은 모두들 아실 거라고 봅니다. 자신의 생존력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니까요.
기회와 비용을 지불하면서까지 컴퓨터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은, 돌려 말하자면 관람권을 구매한 것입니다. 유저가 컴퓨터 게임을 즐기기 위해 소프트웨어를 구입하고, 자신의 PC에 설치하고 실행하는 것은 그리 복잡한 개념의 행동이 아닙니다. 아주 단순하게, 자신의 관람권으로 체험을 시작하는 것일 뿐입니다.
게임은 실행과 종료를 통해 두 가지의 작용을 합니다. 하나는 관람 지속. 다른 하나는 관람 보류.
지속과 보류의 관계는 매우 간단합니다. Play from Last Point / Pause
곰플레이어 따위의 동영상 프로그램을 생각하시면 편하죠. 재생 버튼과 일시정지 버튼.
완전정지는 관람을 끝낸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관람 종료는 플레이 권리를 포기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패키지 게임으로 따지자면 세이브 데이터를 삭제하고 게임 소프트웨어를 언인스톨하는 것이 관람 종료입니다. 온라인 게임에서는? 캐릭터 데이터를 삭제하고 회원 탈퇴를 하는 것이죠.
요즘의 많은 게임들은 유저와 캐릭터를 동일시하는 현상을 보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컴퓨터 게임이 점차 정교해지고 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아바타와 본신을 동일시할 수 있다는 것은 사회 현상과 구조를 재현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하거든요.
때문에 유저가 잘못된 행동을 하게 된 경우에 대한 패널티를 보다 확실한 표현을 통해 경고합니다. 흔히들 "캐릭터가 죽었다"고 표현하곤 하는, 바로 그 상황이 연출되는 거죠. 그런데, 여기서 이 연출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 착각하시면 안 됩니다. 게임은 놀이입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대리 체험입니다.
캐릭터가 죽는다는 것은, 사실은 "너는 잘못된 행동을 계속했으니까, 더 이상 이번 판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게 되었어" 라는 통보입니다(좀 간결하게 말하자면, 기회를 잃었다는 정도로 표현될 것이지만, 현실상에서의 기회는 게임상에서의 기회와 동일시하기 어렵기 때문에 기회라 하진 않겠습니다).
컴퓨터 게임에 따라서는 여러 가지로 이 패널티를 벗어나 놀이를 재개할 수 있는 방법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구조의 근간에는 바로 사회의 약육강식 체제가 있습니다. 강렬한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도리어 현실의 사회 체계를 축소한 룰로 겨뤄 보는 셈입니다.
특정한 상황에서 내 행동을 시험해보고 결과값을 얻을 수 있다. 컴퓨터 게임의 결정적인 부분은 바로 이 점입니다. 유저는 실제로라면 위험 부담이 매우 커서 시도할 수 없는 행동을 해 볼 수 있는 자유를 얻게 됩니다. 관람권의 특혜죠.
이러한 가상 경쟁에서 밀려난 플레이어는 해당하는 경쟁에서의 참여 권한을 잃을 뿐입니다. 간단히 실패라고 합니다. 플레이어는 단순히 실패했기 때문에 얼마든지 다시 해 볼 수 있습니다. 참여 권한을 잃은 판은 실패한 판에 한정되니까요. 그 부담은 크지 않습니다. 귀차니즘을 자극할 만한 것이 아니죠.
컴퓨터 게임에서 이탈하거나 패패한 것은 죽음이 아닙니다.
관람을 종료하거나, 보류하거나, 실패한 것들은 모두 예외를 의미할 뿐입니다. 좀 더 단순하게 정의하자면 Drop에 가깝죠(간혹 여러 칼럼들이나 관련글에서 Die Out으로 표현하곤 하지만 잘못된 것입니다. 체스에서 말이 먹힌 것은 Drop된 것이지 Dead된 것이 아닙니다).
Drop은 관람 권한이 보류되었다는 느낌에 가까울 뿐입니다.
7. Stand-Alone Paradox
간편하게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은, 바꿔 말하면 중독성을 가지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게다가 사람은 놀기 좋아하기 때문에 더 취약한 편이죠. 그리고 사람은 억제된 잔혹함을 내포하고 있고 모든 경험에 대해 자신의 지혜와 지식에 의한 필터링을 가하기도 합니다.
기존의 놀이들과 별 다를 것 없는 이 상관관계 속에서 컴퓨터 게임은 완전함에 가깝기 때문에 더 치명적인 결점 하나를 가지게 됩니다.
이 결점은 사실 컴퓨터 게임 자체의 결점이 아닙니다. 다만 사람의 결점입니다.
앞서 간략하게 말씀드렸던 사람의 배움에 관한 메커니즘은 특히 어린 나이의 사람들에게 위험하게 작용합니다. 명확한 판단기준이 없기 때문에 경험하는 모든 것을 필터링할 수단이 없습니다. 때문에 지식과 경험의 공급이 잘못되면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 수 있게 되죠.
사람이 살아가면서 자기 자신으로 존속하려면 자아, 즉 Ego를 확립해야 합니다. 이 자아가 바로 정보 필터의 기준이 됩니다. 헌데 이게 하루이틀만에 되는 것도 아니고, 얼기설기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추상적인 것도 아닙니다. 매우 많은 지혜와 지식이 필요하고, 또한 그 지식과 지혜는 양질의 것이어야 합니다.
사람이라는 개체는 지성으로부터 유도되는 호기심을 타고납니다. 어린 아이들일수록 그런 성향은 더욱 강합니다. 어린 아이들이 여러가지 지식을 스폰지처럼 빨아들여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은 바로 호기심 때문이죠.
호기심은 이토록 긍정적인 작용을 하지만, 모르모트 등의 생쥐를 이용한 실험에서 볼 수 있듯 사람 본인에게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게 되기도 합니다. 이 치명적인 결점은 특히 현대 사회와 같이 정보가 범람하는 세상에서는 더더욱 위험합니다.
정보 범람의 위험성은 여러분들도 익히 아시고 계실 겁니다. 모르신다구요?
광우병 쇠고기가 뭐가 위험하다는 걸까요? 우리나라가 정말 광우병 쇠고기에 안전한가요? 감이 오시나요?
일반적으로 정보는 친절하지 않습니다. 지식 전달의 수단인 정보는 대부분의 경우 특정 기준에 의해 가공되어 있습니다. 이는 효율성 문제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온전한 정보가 아니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가공된 정보는 보통 어떠한 기준 시각을 가집니다. 같은 광우병 인자 연구 결과라도 어느 것에 집중하는가에 따라 가공된 정보의 형태가 틀립니다. 광우병 인자의 무해함을 증명하기 위한 발생 요인 추적과, 광우병 인자의 유해함을 증명하기 위한 발생 요인 추적은 서로 다른 결과를 내놓습니다.
어린 나이의 사람은 자신의 기준에서 판단할 필터가 없기 때문에, 한 쪽의 정보를 보게 되면 (그것이 가공된 정보임에도 불구하고)정보 원천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고양이와 쥐의 생리와 상성관계를 모르는 어린 아이가 톰과 제리 애니메이션을 보게 되면 고양이는 항상 쥐에게 당한다라는 정보를 사실로 받아들입니다. 정보 원천으로 취급되는 거죠.
이런 이유 때문에 특정한 정보를 제공하는 데 있어서는 각별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한쪽으로 치우친 정보를 받게 된다면, 정보 원천을 제공할 수는 없더라도 최소한 그 반대에 해당하는, 그와는 의견이 다른 정보를 제공하여야 하는 것입니다(물론 그것은 정보 원천의 사실에 근거하는 내용이어야 합니다.).
컴퓨터 게임은 근본적으로 완성된 유희 장치입니다. 이는 사회성으로부터 격리되어, 사회를 에뮬레이션하여 대리만족을 선사하는 놀이 도구죠. 컴퓨터 게임을 즐기는 데에는 특별한 요건이 필요하진 않지만 판단의 주체가 자신이어야 한다는 전제는 존재합니다.
지금까지 지적되어 오는 게임중독의 가장 큰 사회적 난점은 여기에서 발생합니다.
충분한 정보를 제공받아 지혜와 지식이 쌓인 사람이 아니라면, 컴퓨터 게임에서 다루는 여러가지의 축약된 사회생리는 접근자에게 정보 원천으로 작용할 소지가 있습니다. 특히 컴퓨터 게임은 사회와 작용을 간략화하고 축약하여 접점을 극대화한 것이기 때문에 작은 행동에도 강렬한 반응을 불러옵니다.
요즈음 유행하는 온라인 게임들이 제공하는 사회성은 단순하게 압축됩니다. 패와 대립과 교류가 그것인데 이는 사회생리를 집약한 것임과 동시에 터무니없이 과정을 단축시킨 경우에 해당합니다.
사회생리의 과정을 충분히 겪었고, 그에 대한 지식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현실생활과 같은 사회성은 불편함만 가져올 뿐입니다. 그것은 지나치게 복잡해 간결하지 않고 때문에 접근성도 떨어지며 굳이 투자할 가치가 없기 때문이죠.
하지만 사회생리를 충분히 겪지 않은 사람에게는, 그것이 실제 생활과 너무도 닮았기 때문에 그러한 컨텐츠들을 사회 생리의 전부라고 인지할 위험이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던 부분을 다시 끌고 내려와서, 게임에서 표현하고 있는 캐릭터의 Drop은 죽음을 빗대었을 뿐 죽음 자체를 표현한 것이 아닙니다. 죽음 자체는 체험을 위해 표현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미디어에서도 죽음과 관련한 표현은 단순한 연출일 뿐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판단할 근거 지식이 부족하다면, 사람은 단순한 연출을 실제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실상에서 사람은 죽으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죽음 이후에 기회는 없습니다. 영적인 레벨에서의 새로운 탄생 어쩌구 하는 종교적인 부분이야 존재하지만, 실물사회에서 죽음은 그것으로 더 이상 어떤 기회와 작용도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여담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영적인 부분을 다루는 종교단체나 종교인들은 어린 아이들을 가리키는 데에 더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당신들은 미래의 사람들에게 생명의 가치를 잘못 인식시킬 수 있습니다!)
헌데 게임에서는 죽는 것을 비유한 연출이 있습니다. Drop 되는 것을 표현한 것일 뿐이지만, 생명의 가치에 대해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면 이 연출을 통해 생명을 죽이고 살리는 것이 기분 내키는 대로 해도 될 만큼 간단한 것이라고 인지할 위험이 매우 크다는 것입니다. 죽어서 부활했다 라는 표현에는 이런 함정이 숨어 있습니다.
사람은 살아가기 위해 반드시 자아를 형성해야 하고, 자아를 형성하려면 반드시 배워야 합니다. 헌데 쉽게 만날 수 있는 정보들은 대부분 은닉되고 가공되어진 정보들이고, 특히 게임은 이러한 가공된 정보의 집약체입니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을 첨언하자면, 이러한 기준 선상에서 영화나 드라마와 같은 일방적인 소비형의 기존 유희 상품은 게임보다 미치는 초기 영향력이 더 큽니다. 게임은 상호작용에 근거한 반작용을 보일 뿐이지만, 영화나 드라마와 같은 영상은 처음부터 끝까지, 원하던 원하지 않던간에 일방적으로 가공된 정보를 강요합니다.
비디오 공익 광고 기억하시나요?
옛날 어린이들에게는 호환 마마 전쟁등이 가장 무서운 재앙이었으나, 현대의 어린이들은 무분별한 불량/불법 비디오를 시청함으로써 비행청소년이 되는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한편의 비디오가 사람을 바꾸어 놓을 수 있습니다.
절대 우스갯소리가 아닙니다. 정보의 편파성과 가공성은 게임이나 영화나 드라마가 모두 가지고 있는 사항이고, 특히 영화나 드라마는 온가족이 교류하듯 즐길 수 있는 기성 매체입니다. 단순히 재미로 생각하고 넘어가겠지만 제대로 된 첨언 교육이 없을 경우, 같이 시청한 어린 아이들은 그것을 기정 사실화시켜 당연한 가치관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럼 영화는 잡아 찢어버려야 할 만큼 유해하고 공익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해악 덩어리일까요? 드라마는 반드시 없애 버려야 할 공공의 적입니까? 그럼 유희 수단의 원판인 마당놀이, 바둑, 장기 등은 물질적 생산성을 저해하고 생활나태를 초래하는 쓰레기일까요?
닭보다 계란이 먼저일까요? 계란보다 닭이 먼저일까요?
책임을 아직도 컴퓨터 게임으로 돌리시겠습니까?
END. Under-Kind Society
게임은 완성에 가까운 유희 매체이기 때문에, 사실 그만큼 취급에 주의를 요구합니다. 추가적인 지출이라고 생각하실 분들도 계시겠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게임을 즐기기 위해 요구되어지는 두 가지 요소 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각국의 연구 결과에 따라서는, 잠재된 폭력성과 스트레스 한계로 인한 폭주, 즉 실생활에서의 임계 수위점이 게임을 즐기는 사람보다 게임을 즐기지 않는 사람에게서 더 많이 발생한다는 내용도 있습니다.
물론 게임이 사고(지성과 지혜)에 영향을 끼쳐 범죄 위험을 증가시킨다는 이야기가 허황된 내용은 아닙니다. 그것은 분명히 게임에 내포되어진 위험성입니다. 헌데, 이건 게임에 국한되는 이야기도 아니고 영화나 드라마 같은 간접 유희 매체들 또한 내포하고 있는 문제점이죠.
중요한 것은, 미디어 자체에서의 해법 도출은 주먹구구식의 조치밖에 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관련 제도의 확립은 분명 중요한 것이고, 또한 자세한 규정은 명확한 가이드라인이 되기 때문에 공권뿐만 아니라 매체 생산자의 입장에서도 많은 참고가 될 것이지만 사실 중요한 건 그게 아닙니다.
돌이켜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은 인성 교육을 합니까?
원인을 지목하여 그것을 수정하려 노력하지 않고, 현상에만 급급하여 억압과 제한만을 강요하면 그것은 발전이 아닙니다. 나랏님들이나 기득세력이. 나아가 여러분이나 부모님들이 위험성과 부담 때문에 귀찮음을 느껴 탓만 한다고 해서, 현상이 나아집니까? 제도와 규칙이 궁극적으로 원인을 해결할 수 있다고,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는 겁니까?
사실 게임 중독을 해결하기 위해선 교육이 필요할 뿐입니다.
교육은 멀리 있는 것도 아닙니다. 교육의 다른 말은 관심입니다.
관심을 가지고 단편적인 정보로는 얻을 수 없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이 바로 인성교육입니다.
그리고 교류를 통해 더 나은 해법을 찾아갈 수 있습니다.
두리뭉실하다구요? 말만 번지르르하다구요? 정말 그렇습니까?
지금 우리 사회는 세계를 암묵적으로 뒤흔드는 이해 관계를 만들고 거기에 고착되고 있을 뿐입니다. 모든 상황의 개선은 자기부터입니다.
물론 힘든 일입니다.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인성교육은 제도적 장치가 필요한 것도 아니고 법규가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당연히 귀찮겠죠. 헌데 앞으로 다가올 위험성은 그 귀찮음을 상회할 만한 것이 아닙니까?
모두들 좀 더 차분히, 본질적으로 생각해봅시다.
Add. 게임중독
컴퓨터 게임은 놀이입니다. 놀이는 본질적으로 중독성을 가집니다. 사람은 놀기 좋아하기 때문에 노는 것이 싫을 수가 없습니다.
본문에도 언급했지만 게임의 중독성은 바로 작용과 반작용에 따른 확실한 반응성 때문입니다. 게다가 컴퓨터 게임은 인류가 창조한 놀이 문화 중 가잔 간편하고 대단한 산물이기 때문에 원초적인 중독성을 거세할 수는 없습니다.
게임의 중독성을 법률이나 규정으로 거세할 수 있다거나, 게임 자체의 중독성을 메이커의 자발적인 노력으로 거세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지나친 오만입니다.
그러면 현상에 대한 해법은 무엇일까요?
일반적으로 인지가 완성된 성인들이 게임에 중독되는 것은 불편하고 복잡한 사회상이 압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게임에서는 굉장히 단순한 논리로 약육강식의 법칙이 이행되고 여기에는 특별한 방법을 쓰지 않는 한 불합리성을 유발하는 참여요인이 없습니다.
즉, 내재적인 판타지아에 대한 욕구 때문에 1차적인 중독 증상을 보이게 되는 것인데, 이 상황에서 실제 사회 생활의 여가 선택이 차후 중독 여부에 큰 영향을 끼칩니다.
게임의 중독성에 가장 큰 예방 효과를 가지는 것은 바로 정신적 풍요입니다. 정신적 풍요는 여러 의미에서 발생할 수 있습니다. 충분한 지적 호기심의 충족, 대화, 운동, 식사 등등의 실제 욕구를 충족하는 여러 행동은 정신적 풍요를 가져옵니다.
이러한 유발요인 중에서도 특히 효과가 좋은 것은 바로 그룹 생활입니다.
군대 말이냐구요? :)
사람이 가장 큰 정신적 풍요를 느낄 때에는, 혼자가 아니라고 느낄 때입니다. 그리고 그와 연계해 나와 연관이 있는 사람의 행복과 슬픔을 나눌 때에 다른 욕구에 대한 사고는 인지활동에서 큰 퍼센티지를 차지하지 못합니다.
이러한 관계를 가장 잘 내포하는 것이 바로 친우들과의 그룹 생활이며, 특히 친우들과의 집단 활동에서 오는 만족감은 게임이 가진 절차적 자극의 강도보다 우선합니다.
평소에 하고 싶었던 게 있으신가요? 음악을 해보고 싶다구요? 친우들 몇이 모여 밴드팀 활동을 해보는건 어떠신가요? 음악의 질이나 연주의 질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림을 그리고 싶으시다구요? 마치 출판을 하거나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처럼 작품집을 만들어 보는 건 어떠신가요? 그림의 실력이나 작품집의 질은 문제가 안됩니다. 누구나 시작은 미약합니다. 요는 노력과 협동, 그리고 거기에서 오는 동질감과 소속감입니다.
가상 세계의 어떤 욕구라도, 사실 원전은 현실 생활의 불만족에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활에 좀 더 신경을 써보세요.
특정인과의 관계에 불만이 있다면 차분하고 신중하게 대화를 통해 결론을 도출해 보세요.
사람은 언제나 좋고 편한 것을 갈구하는 귀차니즘 중독자들이기 때문에, 이런 행동들로 얻게 되는 정신적 풍요는 언제나 긍정적인 작용을 하게 됩니다.
ps. 글이 길었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세계에는 이미 수많은 증거가 널려 있습니다.
가르침과 배움의 위대함을 믿습니다.
꿈의 필요를 믿습니다.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