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자료 2로, 한국 전통 무술의 역사를 간단히 소개해 보겠습니다.
단, 순서는 현대부터 과거로 거슬러 갑니다.
1. 현대의 전통무술
현대의 전통무술이라고 인정되는 것은 딱 3가지 입니다. 국궁, 택껸, 씨름이죠.
이외의 전통무술은 모두 20세기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아니면, 전승과정이 제대로 밝혀져 있지 않아서, 전통무술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선, 태권도도 가라데의 영향을 받아 한국 무술로 성립했다는 게 정설입니다. (그렇다고 일본무술이라는 소리는 아닙니다. 일본 가라데는 중국 무술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것이고, 다시 그것을 받아들여 한국식으로 변형된 게 현대의 태권도죠)
해동검도는 나한일 등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게 법정 공방에서 드러났습니다.
그 이외에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무예도보통지'상의 무술을 수련하는 단체들도 있는데, 그건 과거의 무술을 현대적 무술지식을 바탕으로 '복원'한겁니다. 그래서 복원자에 따라 무술의 해석이 천차만별입니다.
국궁하고 씨름은 유명하니 넘어가고, 그나마 무술이라고 부를 수 있는 '택껸'에 대해 소개하죠.
택껸은 송덕기 옹이라는 분이 초대 무형문화재입니다. 1900년대 초 분으로, 김두한, 시라소니 같은 분들과 동시대를 살았던 분입니다. 전해지는 말로는 그런 분들과 붙어보기도 했다는군요.
현재, 그 분으로부터 세 부류의 택껸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첫번째로 신한승이라는 분이 그분으로부터 무술을 배워 택껸을 정립합니다. 그게 현재의 무형문화재로 정립된 택껸이며, '택껸협회'라는 단체에서 계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한승이라는 분은 원래 다른 무술을 배웠고, 무식한 공무원들이 일본무술처럼 '일정한 형식'을 요구해서, 억지로 택껸에는 없던 품세를 만들어냅니다. 그래서 많이 변형되었죠.
택껸의 기본인 품밟기도 무술의 상리를 벗어난 괴상한 보법이 되고 말았죠.
두번째 단체는 신한승이라는 분의 제자 중에 한 분이 갈라져 나가 '충주택껸'을 만들었습니다. 이쪽은 잘 모르니 그런 단체가 있다는 정도만 알고 계시면 됩니다.
세번째 단체는 송덕기옹의 막내제자인 '도기현'이라는 분이 만든 '결련택껸계승회'라는 단체입니다. 이쪽에서는 송덕기옹으로부터 배운 택껸의 원형을 그대로 수련하고 보존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저는 첫번째와 세번째 단체에서 택껸을 배웠고, 이후 태극권과 태권도 등 여러 무술을 배우면서 스스로 생각해본 결과, 세번째 단체가 가장 원형에 가까운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이상이 현대 전통무술입니다. 특징은 '스포츠화된 맨손무예'가 중심이라는 겁니다. 무기 소지가 불법인데다가, 법체계가 발달해 살상을 중시하는 실전무술보다는 기량을 겨루는 형태로 발전했죠. 그러므로 사람을 죽일 것도 아닌데, 현대 무술에서 '실전성'을 따지는 것은 연목구어라고 생각합니다.
2. 조선시대의 무술
조선시대는 크게 무술이 두가지 형태로 계승됩니다. 군사무술과 민간 전승 무술입니다.
조선시대 만들어진 '무예도보통지'가 대표적인 군사무술의 예입니다.
그리고 조선 중기, 임진왜란 당시에 활약한 '승병'의 무술이 대표적인 민간전승 무술입니다. 그들은 전쟁으로 단련된 일본군과 단병접전을 벌일 수 있는 조선 유일의 군대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무술은 더 이상 전해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물론 경주 골굴암에 승무도 같은 무예가 전해지기는 하지만, 역시 전승과정이 뚜렷하지 않아 전통무예인지 따지기가 애매하죠.
왜냐하면, 이승만 정권 시절에 불교개혁을 위해 깡패들을 절에 몰아넣어, 일본식 대처승들을 몰아냈는데, 그 깡패들이 여전히 스님 행세를 하며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조계종에서 싸움이 나면, 화끈하죠. 그렇게 많은 깡패들이 스님이 된 터라, 조선시대 승병과 이을 껀덕지가 없습니다.
이것은 시대적인 배경과 연관이 있습니다.
우선 조선시대에 대표적인 역사적 변화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번째는 무과의 도입이고, 두번째는 사병혁파이고, 세번째는 화포의 보급입니다.
셋 다 조선 전기에 이루어진 것으로, 이후 조선시대의 무술계에 지대한 영향을 준 부분입니다.
우선 먼저, 무과가 만들어지면서 무과 시험용 무술만 살아남았습니다. 택껸이나 국궁도 그 한 예시죠. 활쏘기는 무관을 넘어 조선시대 선비의 필수교양이었고, 택껸 같은 맨손무술은 군사무술을 배우는데 필요한 기본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시험과목이외의 무술은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마치 현대에서 수능에서 국영수 이외의 과목이 천대받는 현실과 같죠?
그리고 사병이 혁파되면서, 무술을 배우고 익히는 인구 자체가 크게 줄어들었습니다. 즉, 전문적으로 군인이 될 사람이 아니면, 무술을 배워봤자 쓸데가 없어진 겁니다. 그래서 한국의 전통 무술이 대부분 일인 전승으로 이어지다가 사라진 거죠.
게다가 화포가 보급되면서, 더더욱 무술의 필요성이 줄어들었습니다. 예전처럼 단병접전에 능한 전투인원의 필요성이 급감했기 때문이죠.
당장 비슷한 시기의 일본에서 오다 노부가나가 일본을 제패한 것도 조총의 위력이었음을 상기하면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무술 고수가 되려면 수년을 고련해야 하지만, 총을 쏘는 것은 며칠만 배우면 됩니다. 당장 현대의 군대에서도 총쏘기를 배우는 것은 PRI 3일, 영점사격 1일이 끝입니다. 기록사격은 그렇게 배운 사격술을 시험하는 거니까, 기록사격을 빼면 단 4일만에 끝나는 셈이죠.
그러니 당연히 저절로 무술은 쇠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필요성도 줄어들고, 인구도 줄어들었으니까요.
3. 고려시대의 무술
고려시대는 조선시대와 다릅니다. 사병이 있었고, 무관직은 세습직이었으며, 화포도 없었습니다. 화포 자체가 아시다시피, 고려말 최무선에 의해 개발, 도입되었으니까요.
그래서 고려시대 권세가는 사병을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당장 고려말의 이성계도 '가별치'라는 사병집단을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고려를 건국한 왕건도 마찬가지로 사병집단을 키워 고려를 세웠죠.
때문에 고려시대의 무술은 귀족가문의 후원을 받으며 체계적으로 수련되고 전승되었을 것입니다. 심지어 중간에는 무신들이 정권을 장악한 시절도 있었죠. 그들의 권력기반 역시 '사병'들입니다.
체계적으로 밥만 먹고 무술을 배우는 사람들이 존재한데다가, 실제로 무술을 많이 쓰면서 싸웠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다양한 무술이 존재했으리라 추측됩니다만, 기록이 남지 않아 알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고려시대 기록 자체가 워낙 희소하기도 하지만, 무술에 관한 기록은 현대로 따지면 '군사기밀'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실제로 무술 배워보신 분들은 아실테지만 무술은 책으로 보고 배우는 게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죠.
그러나 맨손무예 뿐만 아니라, 다양한 무기를 다루는 무술들이 발달했을 것이며, 전문 무술인은 여러가지 무기를 능숙하게 다루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무려 40여년간 몽고와 싸울 수 있었던 원동력도 전국에 이렇게 무술을 배운 이들이 산재했다는 것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인구비율로 따지면, 현대의 고시생들 숫자만큼은 되지 않았을까 합니다.
4. 신라시대의 무술
통일신라시대는 고려시대와 유사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고려시대가 통일신라시대와 유사하다고 말하는 게 맞겠죠. 군사제도와 역사기록을 봐도, 지방은 사병을 가진 '토호'를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통신과 교통이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입니다. 실제로 중앙집권제도가 제법 발달한 조선시대만 해도, 지방에 대한 지배 자체는 지역 유지들을 통해 이루어졌을 정도이니, 신라시대에는 그 정도가 더 심했습니다.
그래서 지방관 중 소수만 중앙에서 보낸 이들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신라 말, 후삼국 시대에 수많은 세력으로 나뉘어 전쟁을 거듭했던 것이죠.
아무튼 고려시대와 유사하므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5. 삼국시대의 무술
이부분 역시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상세히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사회 자체가 일종의 '군사귀족'제였습니다. 즉, 귀족은 모두가 군사에 능통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귀족중에도 무술에 능한 사람이 많았습니다.
실제로 신라 황실의 핵심인원이었던 김유신도 무술에 능한 사람이었죠.
또한 화랑세기에 따르면, 문노, 비보 같은 사람도 무술, 특히 '격검'에 능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떤 무술을 익혔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때문에 '무기'의 형태에서 무술을 추론해 내는 수밖에 없습니다.
일단 당시 대표적인 무기는 환두대도입니다. 환두대도란, 칼 손잡이에 커다란 고리가 달린 검으로, 그 고리는 끈을 매달아 칼을 놓치지 않도록 하는 역할이었습니다. 그리고 칼날은 한면에만 있고, 그 단면은 삼각형이었습니다. 즉, 날로 상대를 쳐서 상처를 입히는 형태의 칼입니다.
고로 무술의 형태도 그러한 것에 무기를 최대한 활용하는 것에 맞추어져 있다고 보입니다.
단! 인체구조는 그시대나 지금이나 다르기에 무술의 기본원리는 같겠지만, 현대의 전승되는 무술과 형태가 같을 수는 없다고 생각됩니다. 고로 무술의 기원을 삼국시대까지 끌어올리는 건 완전 개소리입니다.
그리고 이때에는 조선시대처럼 활쏘기가 기본이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석궁을 좀 더 많이 활용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전쟁기록에 석궁병에 대한 기록이 있고, 궁병보다 석궁병이 훨씬 키우기 쉽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활은 곡사라 제대로 맞추려면 수년간 활쏘기를 연습해야 하지만, 석궁은 총과 유사하게 직사로 쏘기 때문에 쉽게 익힐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당나라 역사서에 신라의 장인을 불러 신라의 석궁을 만들라고 했으나, 실패했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볼때, 당나라에서 조차 관심을 기울일 정도로 신라의 석궁이 우수하고 활용도가 높았다고 추정됩니다.
그리고 특이사항으로는 주문수련을 통해 신통력을 얻는 형태의 무술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버젓히 김유신의 기록과 활약이 전해지기 때문이지요.
6. 마무리
신라시대 이전의 무술에 대해서는 기록도 없고 자료도 거의 없으므로 넘어가겠습니다.
한국 전통 무술의 전승에 있어 몇가지 중요한 점은 바로 '사병의 혁파', '무관시의 시행', '화포의 등장'입니다. 그런 사회 문화적 변화가 무술에 많은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지요.
때문에 전통 무술을 다룬다고 했을 때에는 무술의 형식 뿐만 아니라, 그 이면의 사회적 배경과 구조에도 충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