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크래프트가 그간의 RTS와는 다르게 강한 시나리오 흡착력을 보이는 이유중 하나가, 바로 드라마성입니다.
솔직히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의 시나리오는 드라마를 찾아보기 힘들어요. RPG처럼 세세한 인물 하나하나에 초점을 맞출 여유가 장르의 특성상 없거든요.
하지만 스타크래프트는 조금 달랐습니다. 스타크래프트에는 '커맨더' 가 존재하죠. C&C의 '커맨더' 와 비슷해 보일 수도 있는데, 이 둘의 역할은 엄밀히 말하자면 전혀 다릅니다.
커맨드앤컨커의 커맨더는 주인공이며, 동시에 플레이어 자신입니다. 커맨드앤컨커 프렌차이즈는 플레이어와 주인공을 동일시하여 직접 전장을 지배하는 듯한 느낌을 받게 했습니다.
하지만 스타크래프트의 '커맨더' 는? 플레이어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단순히, 각 진영의 인물들을 클로즈업 해주는 일종의 밀착형 카메라 역할을 할 뿐입니다. 이러한 커맨더의 존재로 인해, 블리자드는 한 거대한 군대의 내부 인물 하나하나를 세심하게 묘사할 수 있었고, 강한 드라마성을 지닌 시나리오를 만들어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스타크래프트2에선, 아예 한술 더 떠서 '어드벤쳐 게임' 을 도입했습니다. 주변에 널린 사물들과 인물들을 직접 두드려봄으로써, 세계관과 인물들을 좀 더 생동감있게 만나보게 하지요. '플레이어' 라는 존재를 완전히 지워버렸긴 했지만.
그런데 블리자드가 이렇게까지 표면적으로 '인물' 을 강조하는 게임 방식을 만들 수 있었던건 무엇일까요...바로 그간 블리자드가 구축해온 스타크래프트 세계관 내의 인물들이 가진 '캐릭터성' 이 아닐까 합니다.
솔직히 전 블리자드가 아주 디테일하게 시나리오를 짜지는 않는다고 봅니다. 워크래프트에서만 하더라도 간간히 데우스엑스마키나로 스토리를 이끌어가는 모습을 보여줬거든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블리자드가 만드는 시나리오가 1등급 취급을 받는 이유는 역시 '캐릭터성' 덕분이라고 봅니다.
정확히는 작품 내 인물들의 심리관계라고 볼 수 있죠..
스타크래프트2 자유의 날개 를 예로 들어보죠.
"자유의 날개" 의 주내용은 반란군 대장 제임스 레이너가 부패한 테란 자치령에 맞서 혁명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표먼적으로는 이렇습니다.
하지만 좀 더 자세히 파고들면...그 혁명의 중심에는 제임스레이너와 테란의 황제 "악튜러스 멩스크" 가 있습니다.
이 둘은 스타크래프트1에서도 출연을 했었죠. 제임스레이너는 무척 교과서적인 영웅상을 가진 인물이었고, 악튜러스 멩스크는 강인한 혁명가적 면모를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악튜러스 멩스크는 자신의 행성이 수천발의 핵미사일에 황폐화 되어버리자, 가족의 복수를 맹세하고 혁명노선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는 수완이 상당히 좋아서 금방 세력을 넓힐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혁명이라는 말은 결코 쉽게 쓰여질 수 없는 말이죠...혁명은 빠르게 체제를 전복시키기 위하여 극단적인 폭력성을 동원합니다. 그렇기에 특별한 사상적 동기나 신념이 없는 혁명은 자칫 무자비한 폭동으로 이어지기 쉽습니다.
악튜러스 멩스크는 이런 면에서 결점을 가진 캐릭터였습니다. 사실 이건 소설책에서 더 자세히 나오는데, 그의 천성적인 사업가 기질과 테란 연방에 대한 불타는 복수심은 그를 점점 더 기회주의적이고 잔인한 책략가로 만들어버립니다.
결국 그는 십자군같은 혁명가에서 부패한 황제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이러한 인물 설정은 당시 전문가들이나 팬들에게 많은 호평을 받았던걸로 압니다. 악역임에도 충분히 매력이 있죠.
그런데 여기서 눈여겨봐야할건 스타2에서 등장하는 제임스 레이너 입니다.
제임스 레이너의 혁명 동기? 특별히 사상적인 동기는 없습니다...오직 레이너가 품고 있는 것은 복수심입니다. 사라캐리건을 잃었다는 복수심이죠.
그렇다면 레이너와 멩스크의 '혁명' 은 상당히 비슷한데요?
그렇습니다. 전 개인적으로 이런 인물구도가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 드는게, 결국 레이너도 스타1의 멩스크처럼 복수심에 가득 찬 테러리스트가 될 확률이 매우 크다는 겁니다.
(실제로 스타2에서는 레이너의 이러한 악한 면을 상징하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가브리엘 토쉬" 라고, 게임상에서 만나보세요.)
그렇다면 설령 레이너가 혁명에 성공한다고 쳐도 멩스크와 다를 바가 있겠습니까? 여기서 딜레마가 시작됩니다.....
즉, "스타크래프트2 자유의 날개" 의 관건은, 과연 레이너는 어떤 식으로 멩스크와 자신이 다름을 증명할 수 있을것인가, 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개인의 사사로운 복수심을 떨치고, 공공의 정의를 위해 일어서는 진짜 혁명가가 되어가는 과정을 그린다고 볼 수 있겠지요. 트레일러 제목 "과거의 유령" 은 바로 짐 레이너의 영웅적 면모를 억누르는 과거의 잔재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고스트의 과거" 라거나 캐리건을 의미하는게 아니에요..) 더불어 레이너의 부관 '맷 호너' 의 말에서도 이러한 힌트를 얻으실 수 있으실 겁니다.
단순히 캐릭터 두 명으로도 엄청 긴장감 넘치고, 한편으로는 상당히 심오한 이야기가 구성됩니다. 전 이게 바로 블리자드가 가진 가장 강력한 힘이라고 생각됩니다. 소설, 망가등의 여러 프렌차이즈를 통해 쌓아진 캐릭터의 심리프로필...그리고 그것들이 엮어내서 첨예한 갈등을 만들어내는 겁니다. 그리고 그런 갈등이 깊어질수록 시나리오의 드라마성은 강화되죠.
좋은 시나리오...솔직히 아마추어 수준도 안되는 입장에서 뭐가 잘쓰인 시나리오인지 구분하기가 무척 힘듭니다. 하지만 게임에서 시나리오적 측면이 부각되고 있고, 게임상의 등장인물들을 이용해 여러 프렌차이즈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블리자드처럼 인물들의 심리적 프로필, 캐릭터성을 잘 창조해내야 한다고 보네요. 단순히 설정이 디테일하다, 반전이 있다, 세계관이 넓다..이런 것들이 좋은 스토리의 척도를 만드는건 결코 아니거든요.
:꿈보다 해몽 이라는 말이 나올 것 같네요.
뭐 어떻게 생각하시든 여러분 자유죠.
그런데 한가지 정말 숙지해야 할것은, 적어도 게임 시나리오 내에서만큼은 블리자드만큼 인물들 심리를 잘 고조시키는 작가들도 얼마 본적이 없습니다. 사실 스타1에서도 인물 하나하나 만드는데 무척 고심한 흔적이 느껴지는데, 안타깝게도 스타1은 특유의 캠페인 방식이 인물들의 캐릭터성을 음미하는데 상당히 방해가 되었죠..
더불어 지금 스타2 관련 싱글캠페인 영상 몇개가 유출이 되서 논란이 되고 있는데, 개인적으로 보고 놀랐습니다. 특히 1미션 영상으로 쓰이게 될 '퍼블릭 에너미' 미션영상.
멩스크의 선전영상을 보며 분을 못이긴 레이너가 끝내 TV를 박살내고선, 이를 갈며 오퍼레이터에게 다짜고짜 병력을 준비하라고 소리치는 모습은...
확실히 레이너가 "복수심에 사로잡힌 반쯤 미친 용병대장" 이라는 사실을 절감할 수 있게 해주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