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투직 파이의 괴로움 그레이엄 01-29 조회 3,030 공감 1 6

옛날옛날 '생산나라'의 '초보마을'에 파이라는 금발 소녀가 살고 있었습니다.
 
모험자들이 자주 드나드는 여관의 무남독녀로, 귀여운 미소가 아주 매력적인 아이였습니다.
 
어려서부터 봐왔던 모험자들을 동경한 그녀는 성인이 되던 날, 모험가가 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당연히 가업을 이을 줄 알았고, 모험자로 살기가 얼마나 힘든지 잘 아는 부모님들은 반대했으나 꿈 많은 처녀가 된 파이는 올곧게 자신의 뜻을 피력했고, 마침내 이웃집 전사 아저씨에게 개인 교습을 받아 드디어 전사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마을 주변의 토끼를 괴롭히는 늑대들을 잡아 사지 절단을 시키며 차곡차곡 경험을 쌓았습니다.
 
늑대의 날카로운 이빨을 피하는 법에는 달인이 된 그녀는 의기양양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벽에 부딛혔습니다.
 
바로 '곰' 이었습니다.
 
곰은 늑대와 비교도 안 되는 공격력과 방어력, 체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때까지 그녀가 가지고 있던 '여관 주인이 젊었을 때 쓰던 검'과 '숙박비 대신에 받아둔 갑옷'으로는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어쩔 수 없이 새로운 장비를 얻기 위해 파이는 마을 무기 상점에 갔습니다만, 상점 주인 아저씨가 파는 것들은 어째 하나같이 어딘가 모자른 장비 뿐이었습니다.
 
"제대로 된 것들을 장비하고 싶다면 경매장에 가보렴"
 
장비 아이템을 파는 것보다는 잡동사니를 사들이는 일을 더 많이 하는 주인 아저씨의 조언에 따라 파이는 마을 중앙에 있는 경매장으로 향했습니다.
 
경매장은 별천지였습니다!
 
경매장에서 파는 물품들은 외관도 세련될 뿐 아니라 성능 또한 무기 상점에서 파는 것과 비교하는 게 미안할 정도로 멋졌습니다. 게다가 이름도 하얀 색이 아니라 녹색, 파란색으로 번쩍였습니다.
 
허나 너무 비쌌습니다.
 
파이는 소지금을 탈탈 털어 겨우겨우 '곰 잡는 데 좋은 칼'을 구입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곰을 잡아 '곰 가죽'을 얻는 데 성공했죠. 그런데, 파이의 눈을 휘어잡는 보상 아이템 하나가 더 눈에 띄었습니다.
 
바로 '강철검의 날' 이었죠.
 
 
앞서 곰을 잡다가 죽은 누군가의 유품인지, 아니면 곰의 체내에서 이 세계의 이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화학 작용이 일어난 결과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 멋져버린 칼날은 파이의 마음을 휘어잡았습니다.
 
그러나 날 만으로는 아무 것도 못하는 법. 결국 파이는 강철검의 날을 경매장에 올렸습니다.
 
 
이후로도 괴로움의 연속이었습니다. 강력한 몬스터를 물리치기 위해서는 더 좋은 장비가 필요한데, 쉽게 얻을 수 없던 것입니다. 물리쳐도 주는 건 태반이 재료일 뿐, 완전한 아이템을 주는 것은 그야말로 하늘의 별따기였습니다.
 
 
그런 어느날, 파이에게 희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부탁을 들어줘도 능력치가 어딘가 하나 빠진 것들만 주는 '허름한 퀘스트 성'의 옆에 있는 '희귀한아이템던전'의 보스인 '굳건한철면피 대장'을 물리치면 거의 최강급의 아이템을 준다는 소식이었습니다!
 
파이는 달려갔습니다. 그리고는 그동안 모험을 하면서 쌓은 인맥을 총 동원해 던전을 탐험했습니다. 대장을 물리친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겠죠.
 
그러나 대장은 아무 것도 주지 않았습니다. 아니, 주긴 줬죠. 그냥 몬스터를 잡을 때보다는 더 많은 현찰(그러나 생산 아이템을 사기에는 턱없이 부족한)과, 능력치가 영 뭐한 장비 아이템을.
게다가 이 장비 아이템은 뭔가 저주라도 걸려있는지, 한 번 집으면 다른 사람을 줄 수도 없었습니다. 상점에서 비싸게 사주는 것도 아니고요.
 
 
하지만 비빌 언덕은 여기밖에 없어서 파이는 이 던전을 돌고, 또 돌고, 계속 돌았습니다.
 
그런 어느날(이 표현 참 많이 써먹는군)
 
파티 구성원들이 파이를 더 이상 던전에 끼워주지 않는 날이 오고야 말았습니다.
 
파이의 경험이 너무 많이 쌓여서, 보스를 잡아도 아이템을 주지 않을 확률이 커지는 날이.
 
파이는 속으로 울면서 던전을 나왔습니다.
 
 
파이는 신전으로 걸어갔습니다. 그리고 물었습니다.
 
"신이시여. 이 따위로 아이템을 안 줄거면 저런 건 왜 만들었나요?"
 
기적적으로, 신의 답이 들려왔습니다.
 
- 주긴 주지 않느냐.
 
"확률이 너무 낮단 말이에요!!"
 
- 파이야. 생각해 보거라. 만약 던전의 보스를 잡으면 잡는대로, 또는 높은 확률로 강력한 능력의 아이템을 준다면, 생산물품을 사람들이 사겠느냐? 다 보스 잡으러 가지.
 
"그, 그렇지만...... 전 좋은 아이템을 갖고 싶어요."
 
- 쉬운 길은 없단다. 파이야. 좋은 아이템을 갖고 싶다면, 사냥을 하거라. 소재 중에는 값비싼 것들도 있으니 차근차근 모으면 언젠가는 네가 바라는 좋은 아이템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건 쌩노가다잖아요!"
 
파이는 외치고도 스스로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입을 가렸습니다. 쌩노가다라니, 그녀는 지금까지 그런 식의 말을 단 한번도 한 적이 없었습니다.
 
 
- ......아무래도 넌 세계를 잘못 찾아온 것 같구나.
 
"예?"
 
- 이 세계는 사람 간의 경제 활동을 컨셉으로 잡은 세계다. 사람이 만든 장비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세계지. 물론 내 피조물을 물리쳐 그만한 가치를 지닌 재화를 얻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확률은 굉장히 낮지. 이건 네 경험으로 익히 알고있을 것이다.
 
"......"
 
- 네가 경험을 더 쌓는다면, 어지간한 생산 물품보다는 훨씬 좋은 보상을 주는 퀘스트에 도전해볼 수 있다. 하지만 그 퀘스트는 네가 짐작하는 대로 매우 어렵지. 너 혼자서는 절대 할 수 없으며, 다른 국가 소속원의 방해도 있을 것이다.
 
"좀 쉬, 쉽게 해주시면 안 되나요?"
 
파이의 목소리는 이젠 애원조였습니다.
 
- 파이야. 네 사정은 불쌍하다만 그럴 수는 없다. 만약 쉽게 얻을 수 있다면, 그 레벨 대에 대응하는 생산 물품의 가치는 사라질 것이다. 너는 너 하나의 사정을 생각하면 되지만, 나는 이 세계에 거주하는 모든 이의 사정을 생각해야 한다.
 
파이는 고개를 숙였습니다.
 
신의 말이 맞고 안 맞고를 떠나서, 그냥 막 괴로웠습니다. 좋은 장비를 원하지만, 그걸 얻으려면 노가다를 해야 한다. 너무 현실적인 상황에 짓쳐들어온 괴로움 앞에서 그녀는 여린 어깨를 떨 뿐이었습니다.
 
 
고개를 들었을 때, 더 이상 신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습니다.
 
파이는 천천히 경매장을 향해 걸어갔습니다.
 
북적북적한 사람들의 인파를 뚫고, 경매장의 최상급 물품을 구경했습니다.
 
 
 
[명검 엑스칼리버] - 제작자 : 스미스
 
성을 살 수 있는 금액이었습니다.
 
 
 
파이는 조용히 편지를 썼습니다.
 
 
"스미스 님. 저는 전사 파이라고 합니다.
 
던전을 수백 번 돌고, 몬스터 수만 마리를 죽였지만, 좋은 장비를 가지지 못한 저의 부탁을 들어주시길 기도합니다.
 
예. 말도 안 되는 부탁이라는 건 압니다.
 
엑스칼리버를 갖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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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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