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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캥거루통신] 근데 왜 노가다야? 그래서홀로 12-04 조회 3,638 공감 2 4
근데 왜 노가다야?
 
'게임제작은 노가다!'라고 절규하던 자들이 그 생산물마저 노가다로 만드는 그 아이러니는 이해했지만, 손가락운동과 온몸운동의 극명한 차이를 나는 어떻게도 좁힐 수가 없었다.
 
 

조금 비약하자면 대한민국에서 안면공개중인 온라인 게임 대부분을 '노가다 게임'이라고 싸잡아 규정지었던 것 같다. '공짜'가 의례 그렇듯 그 단순한 제목들만큼이나 볼륨감 빈약한 싸구려 '경품'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최근 사촌동생과 꽤 친하게 지냈던 탕수육집 사장을 만나고 나서는 뭐랄까. 지금까지 내 생각의 행보를 조금은 수정할 필요가 있었다. "노가다 노가다하는데 나는 이게 꽤 재밌거든. 몹을 잡을때 드는 느낌하며 돈이 떨어지고 그걸 주울때의 만족같은거 말야." 그가 말했다. 역시 장사치다웠다. 고스톱과 포커가 지겨워 리니지2로 시작한 게임인생은 3개월 동안 모은 아덴을 자의반 타의반으로 현금 18만원과 바꿔치기하면서 끝이났었다. 그러다 최근에 '심심'해서 아크로드라는 MMO를 다시 시작했다는 그였다.



씹고 있던 치킨탕수육을 목구멍에 밀어넣고 물었다.
"또 마을 앞에서 착한 벌레들 괴롭히고 있는건 아니시죠?"
"어..왜 난 그게 재밌는데?"
"그 노가다 짓거리가 재밌어요?"
"글치."



내입은 굳어버렸다. 가상의 돈도 돈이지만 마물을 물리치는 힘있는 영웅에 흠뻑 취한 이 순진한 아저씨가 어쩐지 측은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건 게임에 빠진 초기 상태에서나 맛볼 수 있는 아주아주 짤막한 행복이었다. 여기서 더 입을 놀리는건 예의가 아니었다. 그것이 짤막한 행복이라면 그 이후에 찾아올 불행은 아주 길 것이므로.



그래도 전지전능하신 개발자들이 만든 미칠듯이 지루한 몽유도원에서 이 아저씨는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는 셈이었고 어떤 의미에서는 소비자로서 바람직한 모델상이었다. 개발자들이 입버릇처럼 얘기하는 역할모델이니 타격감이니 판타지 라이프같은 자질구레한 겉치레는 다 집어치우고 이 아저씨는 RPG의 근본으로 돌아간 21세기의 돈키호테였다. 탕수육을 만들고 그것을 배달하고 틈틈히 게임을 하는 이 아저씨에게 절이라도 해야되지 않을까 싶었다. 이 대한민국 어딘가에 자신들이 만든 창작물을 푼돈이나 만져보겠다는 심보가 아니라, 이렇게 순수하고 재미나게 즐겨주고 있다는 건 어쨌든 사실이니까.



그가 말을 이었다.
"근데 왜 노가다야? 다른 말도 많은데 왜 하필 노가다냐구?"
"뭐가요?"
"아니 '몹잡고 돈먹기'말야. 왜 그걸 노가다라고 부르냐 이거지. 진짜 노가다가 얼마나 힘든데.."



그랬다. 고등학교 1학년때 친구들 꼬임에 빠져 첫 육체노동의 고통을 알게 된 그날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나였다. '삽질'로 시작해 '공구리'를 비비고 나를 포함 인부 20명이 다닥다닥 달라붙어 옮긴 대형 철근 구조물까지, 16년 생애에서 그날 겪은 낯선 에피소드가 가장 큰 고통이였을 나에게, 돌아오는 용달차 안에서 묻던 감독아저씨의 말은 기가 막혔다. "대학교 생활 재밌죠?" 겨우 세 살을 불려서 나를 대학생으로 여기고 있던 사실은 머리에서는 기쁘다는 말로 몸에서는 무언의 욕지거리가 새어나왔다. 당시에는 또래치고 어떻게든 '연로'해 보이려고 발악하지 않는 놈이 없었으니까. 그나마 나를 일 지지리 못하는 '성인'으로 봐준 감독아저씨의 말에 'x발'대신 "네."라고만 대답했을 뿐이었다.



헌데 어쩌자고, 양귀자 선생님의 말을 빌리자면 "절박한 포즈외에 그 어떤 것도 허락되지 않는 가난한 삶"을 사는 저 밑바닥 인생들의 마지막 밥그릇을, 어쩌자고 마우스 클릭질이나 해대는 숨쉬기 운동만큼이나 '심심한 놀이'에 비유하게 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그냥 누군가 언제부터 그렇게 불러왔고 우연히 나도 거기에 물든거라고만 생각했다. 언제나 시름시름 앓는듯한 표정으로 '게임제작은 노가다!'라고 절규하던 자들이 그 생산물마저 노가다로 만드는 그 아이러니는 이해했지만, 손가락운동과 온몸운동의 극명한 차이를 나는 어떻게도 좁힐 수가 없었다. 나는 그만두기로했다. 차피 그런들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서였다. 도피가 아니라 현실직시였다.


대신 최근에는 누가 어떤 게임에 대해 물으면 그냥 이렇게 답한다.
"그 게임 어때요?"
"음, 좀 심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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