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

괴수의 등에 얹혀사는 너 살고 나 살자의 생존 시뮬레이션

톤톤 (방승언) | 2022-09-22 18:3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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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 시뮬레이션 게임 <원더링 빌리지>는 거대 괴수의 등에 문자 그대로 ‘얹혀살게’ 된 피난민들의 이야기입니다. 작품 속의 세상은 땅 곳곳에 독성이 퍼진 탓에 멸망 위기에 몰려 있습니다. 주인공(플레이어)을 포함한 일군의 사람들은 지표의 독성을 피해 방황하던 중, 멸종했다고 알려진 고대의 괴수를 발견해 그 높은 등 위에 붙임성 좋게 정착합니다.

 

괴수의 이름은 ‘온부’. 고대 설화에만 관련 기록이 남아 있다는 설정상 적어도 수백 살은 먹은 듯합니다. 그런데 그 오랜 세월 동안 기른 품성이라고는 고집뿐인지, 온부는 도통 말을 듣지 않는 친구입니다. 자신한테도 해로운 오염 지대에 태연히 드러누워 버리고, 어서 벗어나자고 재촉해봐야 들은 체도 않는 온부를 보면, 울화가 치밉니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온부는 우리와 한배에 올라탄 수준이 아니라 배 그 자체인데요. 온부가 죽어도, 마을 사람들이 죽어도 게임은 끝나버립니다. 함께 최대한 오래 살아남는 것이 게임의 궁극적 목표입니다.

 


 

# 바람계곡의 움직이는 토토로

 

튜토리얼에 등장하는 ‘촌장’의 삽화에서는 어딘지 스튜디오 지브리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화풍이 느껴집니다. 그러고 보면 <원더링 빌리지>는 지브리 작품 몇 개를 섞은 듯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딘지 모르게 지브리 풍인 촌장 삽화

 

‘독성이 퍼진 멸망한 세계’라는 기본 설정은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떠오르게 합니다. ‘움직이는 거주지’와 ‘살아있는 이동 수단’이라는 개념은 각각 <하울의 움직이는 성>, <이웃집 토토로>와 맞아떨어집니다. 생동하는 존재로서의 자연과 인간의 상호작용을 파고드는 주제 의식에서는 <모노노케 히메>가 떠오르기도 합니다.

 

2D로 표현된 마을의 아기자기하고 정감 있는 비주얼은 포스트 아포칼립스라는 우울하고 무거운 테마를 효과적으로 중화해냅니다. 이 또한, 진지한 주제를 동화 같은 터치로 풀어내곤 하는 지브리의 창작 스타일을 연상시키는 지점입니다. 다만 아트 디렉션이 직접적으로 닮아 있지는 않습니다.

 

확대해보면 아기자기함을 느낄 수 있다.

 

 

# 너 살고 나 살자

 

게임은 크게 ‘마을 보기’, ‘온부 보기’, ‘세계 지도 보기’의 세 모드로 나뉩니다.

 

이중 ‘마을 보기’는 도시 경영, 그리고 샌드박스 시뮬레이션의 문법을 따릅니다. 가장 비중이 큰 모드이기도 합니다. 플레이어는 수확, 건설, 연구의 세 가지 주요 활동을 통해 도시를 확장하고, 기술을 발전시키며 주민의 생활 수준을 개선해 나가야 합니다.


‘마을 보기’의 주민 조작 UI는 <드워프 포트리스>, <림월드> 등 동일 장르의 선배 게임들을 참고한 모습입니다. 작업을 지시한 뒤 우선순위를 설정하면 주민들이 알아서 배정돼 일합니다. 별도 건물을 지어 작업 유형별로 전담 인원들을 할당하면 이들은 해당 작업에만 몰두합니다.

 

작업별 적정 인원수를 정확히 가늠하고, 우선순위와 주민들의 이동 경로를 최적화해 전체 생산성을 끌어올리는 메카닉 역시 비슷합니다. 다만 언급된 두 게임에서와 같이 주민과 주민, 주민과 환경 사이의 복잡하고 세밀한 상호작용이나 주민에 따르는 능력치 차이 등의 심화한 시스템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마을 보기' 화면

 

그러나 <원더링 빌리지>는 온부와의 상호작용이라는 측면에서 독자적인 깊이를 만들어냅니다. 온부는 피곤하면 드러눕고 오래 굶으면 목숨을 잃는 어엿한 생명체입니다. 따라서 유저는 ‘온부 보기’ 모드에 종종 진입해 그 상태를 확인하고 허기, 피로, 건강 등을 꾸준히 관리해줄 필요가 있습니다.

 

원활한 상부상조를 위해서는 온부 전용의 여러 기술을 서둘러 연구하고, 관련 시설을 확충해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 소요되는 자원은 모두 마을의 발전과 주민 생존에도 꼭 필요한 것들입니다. 마을 관리를 통해 충분한 생산력을 확보하고 그 생산력을 마을의 발전과 온부의 복지라는 두 가지 요소에 적절히 배분하는 것이 <원더링 빌리지>의 주된 도전 과제이자, 재미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추가로 흥미로운(?) 사실은 주민들이 온부의 ‘고혈’을 빼앗아 쓸 수 있다는 점입니다. 온부의 혈액은 음식 조리나 건설 등 여러 영역에서 귀한 자원으로 쓰게 됩니다. 물론 이것은 온부의 건강에 피해를 줍니다. 온부를 ‘적당히’ 괴롭혀 빠른 발전을 이룩할지, 아니면 공멸의 길에 접어들 것인지는 유저의 장기적 판단과 균형 감각에 달려 있습니다.

 

 

 

# 고집이 센 온부

 

온부와 주민의 생존에 영향을 미치는 또 다른 요소는 ‘세계 지도 보기’에서 관리할 수 있는 온부의 이동 경로입니다. 온부는 정해진 도로 위로 움직입니다. 그리고 도로 위에는 좋은 환경과 부정적인 환경이 랜덤하게 펼쳐집니다.

 

온부가 교차로에 가까워지면 특정 방향을 지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온부는 -지성 있는 생명체 답게- 유저의 말을 거절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온부의 판단이 늘 현명한 편은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불 보듯 뻔한 위기에 스스로 빠져드는가 하면, 좋은 환경을 그냥 지나쳐 버리기도 합니다.

 


독성이 퍼져 있는 땅은 주민과 온부 모두에게 가장 큰 위기입니다. 온부는 직접적으로 건강에 타격을 입고, 그 등(마을)에서는 독성 식물이 자라납니다. 독성 식물은 빨리 제거하지 않을 경우 주변으로 확산해 장기적 피해를 주며 그 과정에서 마을 주민들을 중독 시킵니다.

 

온부에게 내릴 수 있는 명령은 꽤 다양합니다. 달리기, 멈추기, 수면 참기 등 명령을 내릴 수 있고, 기술을 발전시키면 이런 명령이 더 늘어납니다. 하지만 온부가 유저를 신뢰하지 않으면 전부 공염불에 불과합니다. 출시된 지 얼마 안 된 신작 게임이지만 벌써 ‘말 안 듣는 온부’에 관한 공감대가 형성되었을 정도로, 온부의 고집은 상당합니다.

 

다르게 보면 여러 유저가 <원더링 빌리지>의 핵심 테마에 충분히 몰입하고 있다는 의미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아직 얼리액세스 단계인 만큼 테크트리, 랜덤 인카운터 등 측면에서 콘텐츠 부족이 다소 두드러지지만, 시스템의 독창성과 완성도에서 오는 잠재력은 높이 살 만합니다. 현재 게임의 평가는 9월 22일 기준 스팀 플랫폼에서 ‘89% 긍정적’을 기록 중입니다.

 

 

 

# 지구가 온부 같았다면

 

오로지 자멸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온부를 소중히 돌봐야 하는 <원더링 빌리지> 속 주민들의 상황은 인류와 지구의 관계에 대한 아날로지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주민들은 당장의 위락에 쓰일 자원과 시간, 노력을 일부 희생해 온부의 ‘지속가능성’을 확보해야만 합니다. 온부가 몸에 저장해둔 귀한 자원을 이용해 빠른 발전과 안락한 삶을 누리는 것도 가능하지만, ‘속도 조절’에 실패하면 예정된 결말은 하나뿐입니다.

 

이때, 제멋대로인데다 자생 능력도 별로인 온부의 예민함은 차라리 부러운 것으로 느껴집니다. 배고프면 배고픈 대로, 피곤하면 피곤한 대로 모두 티가 나는 온부의 나약한 모습은 공생을 가능케 하는 효과적 경보 시스템이기 때문입니다.

 

 

게임을 플레이하다 보면, 온부가 -그리고 그 위의 인간들이- 죽어버릴지 모른다는 생생한 위기의식이 자꾸만 유저의 뇌리를 파고듭니다. 그리고 ‘게임오버’ 당하기 싫은 일념에 유저는 온부의 복지에 최선을 다하게 됩니다.

 

반면 온부와 비교하면 지구는 한없이 강인합니다. ‘이대로 가면 큰일 나는 건 인간이지 지구가 아니다’는 웃지 못할 우스갯소리가 있죠. 인류가 한날한시에 '게임오버' 당하더라도 지구 밖에서 관찰한다면 뭐가 달라진 것인지 도통 알 수 없을 겁니다.

 

지구가 만약 "돌봐주지 않으면 공전을 멈추겠다"고 을러대는 예민한 생물이었다면 어땠을까요? 기후위기의 심각성에 대한 우리의 태도 역시 조금은 달랐을까요? 기후 재난으로 일국의 3분의 1이 물에 잠기고, 강바닥에 600년간 잠겨 있던 불상이 드러나는 와중에도 크게 바뀌지 않은 우리의 일상을 보면, 마냥 장담할 수는 없을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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