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

알찬 콘텐츠 눌러 담은 국산 SRPG, 로스트 아이돌론스

톤톤 (방승언) | 2022-10-12 22:0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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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한 편도 ‘집중이 안 돼서’ 잘 보지 않는 시대가 됐습니다. 잘게 토막 낸 콘텐츠가 인기를 끕니다. 게임업계도 20~30분 단위로 끊어지는 로그라이크 장르가 몇 년째 대세입니다. 틱톡, 쇼츠, 릴스의 인기가 그 위에 겹쳐 보이는 게 기분 탓은 아닐 겁니다.

반면 넷플릭스의 <수리남>처럼 6시간씩 보게 되는 콘텐츠도 여전히 나옵니다. ‘몰아서 볼 만하다’는 요즘 드라마에 붙는 최고 수식어가 됐습니다. 구글에서 ‘binge-worthy’(몰아서 볼 만한)를 검색하면 실제로 괜찮은 시리즈를 많이 추천받을 수 있습니다.

<로스트 아이돌론스>는 요즘 기준으로는 다소 긴 호흡의 국산 턴제 전략 RPG입니다. 전체 플레이타임은 30시간~50시간, 하루에 3시간씩 해도 클리어에 최소 열흘은 걸립니다. 오랜 시간 질리지 않고 플레이할 수 있을까요? 12시간의 플레이 경험을 바탕으로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 겉모습은 서양, 영혼은 동양?

카카오게임즈의 투자를 받으며 화제가 됐던 개발사 오션 드라이브 스튜디오는 <로스트 아이돌론스>를 꾸준히 ‘턴제 전략 RPG’로 마케팅해 왔습니다. 하지만 스토리 측면에서는 JRPG 장르라고 설명해야 더 이해하기 쉽습니다.

이야기를 따라가며 정해진 전투를 벌이는 선형 구조라는 얘깁니다. 전략 RPG이지만 유저의 자유로운 선택에 따라 스토리라인이 크게 달라지는 <웨이스트랜드 3> 등 서구권 게임과 다른 지점입니다. 실제로 개발진은 영감을 받은 게임으로 <파이어 엠블렘> 시리즈를 언급한 바 있습니다.

기본 설정, 고유명사, 캐릭터 모델링, 아트 등에서 전형적인 서양 중세 판타지 느낌을 주기 때문에 잘 모르고 보면 헷갈릴 만한 지점입니다. <로스트 아이돌론스>의 배경이 되는 아르테미시아 대륙에는 6개 왕국이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게임으로부터 20여 년 전, 정복왕 루디빅터스가 대륙을 통일, 루디빅탄 제국을 세웁니다. 황제는 이후 폭정을 펼쳤고, 제국은 한 세대를 못 가 분열하기 시작합니다.

주인공 이든은 지방 소도시 로네타에서 작은 용병단을 운영 중입니다. 용병단은 어느 날 영주에게 남편을 잃고 강제 혼인할 위기에 처한 여인 ‘세라’를 돕다가 영주에 맞서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의도치 않게 영주를 살해하면서 실제 내란 범죄자가 되어버리고, 오로지 살기 위해 반란 세력에 가담하면서 본격적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 차별성 갖춘 비주얼·오디오 퀄리티

스팀 플랫폼에는 <로스트 아이돌론스> 외에도 마니악한 턴제 전략 RPG가 많이 출시한 상태입니다. 그런데 이들 대다수가 픽셀·레트로 아트 스타일을 선택하고 있어, 실사 지향적인 <로스트 아이돌론스>의 그래픽은 분명 차별화 요소입니다.

디테일한 캐릭터 외관과 환경, 아이템 디자인에 더불어, 전투 시에 펼쳐지는 자연스러운 공격 애니메이션이 보는 지루함을 줄이고 긴장감을 높입니다. 이 애니메이션은 ‘배속’으로 재생하거나 생략할 수 있습니다. 다만 생략했을 경우 캐릭터 간 상호작용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뤄졌는지 파악하기가 다소 어렵습니다. 아이콘이나 약식 모션 등으로 표현해줬다면 더 좋았을 것 같습니다.


한편, 등장 캐릭터가 많은 게임인데도 주요 대사에 전부 음성 녹음이 이뤄져서 스토리 몰입감을 크게 강화해줍니다. 인물의 성격을 생생하게 느끼고 인물 간 관계를 직관적으로 파악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줍니다.

다만 대화씬 구성에 일관성이 없어 다소 혼란스럽습니다. 목소리 연기가 들어간 컷씬, 목소리 없이 애니메이션만 나오는 대화씬, 목소리는 있지만 캐릭터 모델링만 등장하는 씬 등이 교차하는 탓에 높은 퀄리티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으로 다소 불안정한 느낌을 줍니다.

또한 음성 대사와 한국어 자막의 내용이 때로 엇갈리는 것 또한 은근히 신경 쓰이는 지점입니다. 핵심이 되는 내용은 서로 통하지만, 인물의 성격이나 상황의 분위기 등 디테일에서 가끔 두 언어 사이의 톤이 불일치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 전형성과 공감의 갈피에 선 세계관

촘촘한 설정, 방대한 대사, 다양한 인물, 공들인 보이스 액팅 등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로스트 아이돌론스>는 스토리텔링에 큰 힘을 주고 있습니다. 제작진은 출시 전 본지와 인터뷰에서 “SRPG는 일단 내가 왜 이 캐릭터와 전투를 하는지 개연성이 충실하게 제공되어야 한다”며 스토리와 세계관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분명 <로스트 아이돌론스>의 이야기는 큰 틀에서 공감을 살 만합니다. 제국의 사분오열, 폭정에 신음하는 백성들, 겸허하고 인간적이지만 결단력 있는 주인공 일행 등의 익숙한 플롯 장치들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오리지널 스토리임에도 불구하고 설정과 전개에서 독창성보다 익숙함을 더 많이 느끼게 한다는 점은 다른 한편으로 몰입을 깹니다. 예를 들어 최초로 대륙을 통일, 영생을 추구했으며 마탑의 학자들을 파묻었다는 루디빅터스 황제의 설정은 어딘지 진시황을 떠올리게 합니다.


출세보다는 주변 사람을 돕고 유쾌한 삶을 사는데 더 관심이 많은 ‘이든’의 설정과 성격은 분명 마음을 끄는 매력이 있습니다. 하지만 지배자들의 통치철학과 덕성을 중시하고, 군사를 바르게 이끌기 위해 책사를 찾는 등의 인물 빌드업은 서양 중세 판타지보다는 <삼국지>에 가깝게 느껴집니다.

이외에도 툴툴거리는 대사를 계속 내뱉는 세라의 동생 ‘안드레아’나 세련된 맛은 없지만 자신감 충만하고 유쾌한 ‘프란시스코’ 등의 캐릭터 묘사는 일본 애니메이션을 보는 느낌도 듭니다. 한편 ‘마력 폭발’의 가능성 때문에 일부 마법사들이 경원시된다는 배경 설정은 바이오웨어 게임 <드래곤 에이지> 시리즈와 비슷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여담으로 일부 캐릭터 이름도 몰입을 해칩니다. 일례로 '세라'라는 이름은 성서에서 유래했기 때문에 세계관과 충돌하는 느낌을 줍니다. 강력한 우군이 되는 여성 감독관의 이름 '마르셀'은 원래 프랑스 남성 이름입니다.



# 보조무기와 원거리 중시되는 전투

<로스트 아이돌론스>의 전투는 전형적인 타일 시스템 위에서 펼쳐집니다. 가로세로 연결된 네모 격자 위에서 캐릭터를 움직인 뒤, 무기, 마법, 아이템 등 사용하고 턴을 넘기는 방식입니다.

캐릭터 능력치에 따라 방어, 반격, 치명타 등이 일정 확률로 발생합니다. 어려움 난이도 기준 아군 체력은 심할 경우 두 번의 피격만으로 0이 됩니다. 체력이 다 줄어 ‘퇴각’하면 스테이지 내내 사용할 수 없습니다. 난이도 설정에서 ‘매니악 모드’를 켜면 퇴각이 아닌 일종의 사망으로 처리되어 해당 캐릭터를 스토리 컷신에서만 볼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전투 시작 전 저장한 세이브 파일을 불러오면 다시 도전할 수 있습니다.

전투에서 주인공 이든이 퇴각하거나 턴 수 제한을 넘기면 패배 처리됩니다. 전투 도중에는 세이브가 지원되지 않는 대신, 5회에 한해 게임을 원하는 시점으로 되돌리는 기능이 있어 전반적인 전투 스트레스는 크게 경감됩니다.


캐릭터는 무기를 2벌씩 장비하고,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턴 소모 없이) 바꿔가며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 특이합니다. 무기 유형과 방어구 유형에는 상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적절한 무기 선택이 종종 승패를 가릅니다.

주목할 것은 대다수 캐릭터가 디폴트 보조무기로 활을 장비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만큼 이 게임에서 원거리 공격은 중요합니다.

게임 특성상 적끼리 서로 통과할 수 없어 근접 캐릭터들이 길목을 막고 원거리 캐릭터들이 보조하는 상황이 자주 펼쳐집니다. 아군이 적 원거리 캐릭터들에 ‘일점사’ 당해 죽지 않도록 하거나, 체력이 조금 남은 적을 정리해 다음 턴 공격 기회를 빼앗으려면 활과 마법을 잘 활용해야 합니다.


 


 


# 빽빽하게 채워진 전략 요소

기본 시스템은 이처럼 간단하지만, 개발진은 그 위에 수많은 전략 요소를 쌓아 두었고, 이를 여러 챕터에 걸쳐 천천히 소개해 나갑니다. 어려움 난이도 기준으로 플레이타임이 10시간을 넘겨 7~8챕터에 도달한 시점에도 이 소개는 완전히 끝나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 양이 방대하고 복잡한 만큼 익숙해질 시간을 함께 마련해주는 배려로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SRPG에서 기대할 만한 온갖 요소가 망라되어 있으며, 다행히도 대부분은 전략적 흥미를 돋울 만한 것들입니다.

웅덩이, 수풀, 화염 등의 특수 타일이 존재하며, 그 위에서 각 캐릭터는 ‘젖음’, ‘불탐’ 등 여러 효과를 받습니다. 해당 타일 및 캐릭터에 ‘속성 공격’을 가할 경우 특별한 상호작용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불붙은 타일에 독을 뿌리면 폭발하고, 젖은 캐릭터에 화염 공격을 가하면 효과가 반감되는 식입니다.


‘마물’을 상대할 때는 전투 양상이 크게 달라집니다. 마물은 체력, 공격력이 높은 대신 약점 개념이 있습니다. 약점을 특정 무기로 공격하면 반격당하지 않으며, 공격 누적 시 더 높은 대미지를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약점에 맞는 무기가 턴마다 바뀌고, 마물이 공격받을 때마다 몸을 돌리는 바람에 아군이 마물을 완전히 둘러싼 상황에서도 빠른 공략은 쉽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외에도 적의 인접 타일에 들어설 경우 이동이 제약되는 일명 ZOC(적 통제지역) 시스템, 일부 마물이 2턴에 걸쳐 사용하는 강력한 ‘차징 공격’, 우호도 높은 동료와 함께 발동할 수 있는 ‘협력 공격’, 더 나아가 복층 지형, 기마 전투, 특수능력, 소모성 아이템 등 여러 요소가 게임에 복잡성과 깊이를 더해줍니다. 장기적인 전략 요소로는 캐릭터별 전직, 숙련도, 스탯, 장비 등도 고려해야 합니다.



# 넓고, 깊고, 복잡한 캠프 시스템

전투와 전투 사이의 캠프 관리에서는 캐릭터 육성, 파티 재정비 등 활동과 사이드 스토리 콘텐츠가 펼쳐집니다. 제작진은 전투 시스템과 마찬가지로 캠프 시스템에도 여러 기능을 마련해두고, 챕터 진행에 따라 이를 하나씩 풀어나가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캠프에서 주인공은 기존 동료들과 대화, 부가활동, 사이드 퀘스트 등을 진행해 우호도를 높이거나, 캠프를 방문한 신규 캐릭터와 친해져 파티에 합류시킬 수 있습니다. 스토리 진행에 따라 캠프에 체류하는 비전투 캐릭터의 숫자도 늘어나고, 점점 할 일도 많아집니다. 예를 들어 캠프에 새로운 시설을 지으면 동료와의 식사, 대련 등 활동이 해금됩니다. 이들은 각각 우호도 상승, 숙련도 상승 등 효과를 발휘합니다. 

우호도 관련 주요 활동에는 대부분 ‘통솔력’ 포인트가 사용됩니다. 통솔력은 캐릭터 능력에 상관없이 캠프 관리를 시작할 때마다 일정 수치가 주어지고, 남은 포인트는 다음 관리 시점으로 이월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원하는 캐릭터를 잘 골라 우호도 작업을 효율적으로 진행해야 합니다. 캠프를 방문한 캐릭터는 잘 붙잡아두지 않으면 사라져버리기도 합니다.


다만 이렇게 통솔력을 투자에서 선택과 집중을 강조해 놓은 반면, 각 캐릭터와의 우호도 증진이 어떤 결과로 돌아올지는 미리 알기 어려워 시행착오를 겪도록 만든 점이 아쉽습니다.

더 나아가 이러한 대부분의 부가 퀘스트가 캐릭터 방문 및 대화를 필요로 하거나(대신 빠른 이동을 지원합니다), 때로는 숨겨진 물건을 찾는 등의 활동까지 수반하는데, 이것이 너무 길면 가끔 게임의 흐름을 끊어놓습니다.

반면 인물의 성격, 과거사, 주인공 혹은 다른 인물과의 관계 등을 보다 깊이 있게 풀어놓는 좋은 스토리텔링 장치가 되어 주기도 합니다. 주요 인물 주변에 떨어진 편지나 책자를 통해서도 이야기를 더 깊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 인물과 촘촘한 시스템으로 빚어내는 몰입감

<로스트 아이돌론스>는 전략, 육성 콘텐츠를 빼곡하게 눌러 담은 풍성한 게임입니다. 3단계 난이도 구분과 ‘매니악 모드’를 통해 이들 요소를 연구하고 활용할 여지를 충분히 마련해두고 있습니다.

클리셰한 요소가 많은 세계관 구성과 일부 스토리 전개의 설득력 부족은 아쉬운 지점이지만, 매력적인 여러 캐릭터와 이들 간의 깊이 있는 관계 묘사는 개연성이 높아 균형이 잘 맞습니다. 개발진의 말처럼 전투에 ‘당위성’을 부여하기에 충분하며, 이는 우호도 시스템, 연계 스킬 등 게임 메카닉과도 잘 어우러집니다.

스토리와 전투 양면에서 조금씩 해금되는 콘텐츠들은 방대한 시스템을 거부감 없이 소화하도록 돕는데 그치지 않습니다. 긴 호흡의 게임에 꾸준히 새로움을 추가해 질리지 않게 해줍니다. 장르에 애정을 지닌 유저라면 몇 시간씩 즐겨도 질리지 않을, '몰아서 할 만한' 게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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