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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세상을 바꾼 아이디어 (23) - 1세대 한글 글꼴, 일본에서 복원하다

넥컴박 | 2016-12-02 17:17:15

이번 '세상을 바꾼 아이디어(23)'에서는 한글 디자이너 최정호 선생님에 관해서 알아봅니다. 최정호 선생님은 우리가 쓰는 다양한 한글 폰트들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바탕체'와 '고딕체'를 개발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 폰트를 실제로 사용할 수 있게 한 데에는 일본 회사의 힘이 컸다고 하는데요. 어떻게 된 사연일까요? 자세한 이야기를 한 번 들어보시죠. /디스이즈게임 편집자 주

 



2016년 최정호 탄생 100주년을 맞아 최정호 선생님의 전시 및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최정호 선생님은 1988년 72세로 별세하기 전까지 오늘날 한글 글꼴의 바탕을 이루는 바탕체와 고딕체의 원형을 비롯해 굴림체, 궁서체 등 다양한 글꼴 개발에 힘을 쏟으셨습니다. 

 

일본의 모리사와社는 지난 10월 5일 최정호 선생님이 개발한 서체를 디지털 복원했다고 밝혔는데요. 그동안 오랫동안 잊혔던 최정호 선생님의 서체가 이번의 성공적인 복원을 통해 다시 대중에게 공개되었습니다. 

 

복원 소식을 접한 현직 디자이너들은 “현재 사용되고 있는 대한민국 서체들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최정호 선생의 서체를 언젠가는 꼭 한번 사용해 보고 싶었는데 드디어 그 날이 왔다”며 크게 반기고 있습니다. 혹시 공개된 최정호 폰트 14종의 프로토타입을 보고 싶으면 '//typesquare.com/ko'에 방문하세요. :)  

 

(편집자 주. 복원된 14 서체는 다음과 같습니다. 중명조HAB1, 중명조HAB31, 태명조HA1, 태명조HA101, 활자체HA301, 견출명조HMA1, 견출명조HMA31, 극세고딕HCB501, 세고딕HBC1, 중고딕HBB1, 태고딕HB1, 견출고딕HMB1, 견출고딕HMB31, 중환고딕HBDB1)​

 

 

Type Square 한국판 최정호 서체 목록. 

 

과거에는 실제 크기의 씨글자를 조각가가 도장을 파듯 새겨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원도 활자가 도입되고 나서부터 활자 제작 방식이 완전히 바뀌게 되었습니다. 원도 설계자가 자, 컴퍼스, 붓 등과 같은 레터링 도구를 이용해 한 글자씩 원도를 설계하면 자모 조각기가 활자를 깎는 시스템이 도입된 것 입니다. 

  

이때부터 활자의 완성도는 활자를 조각하는 사람이 아닌 원도 설계자의 능력에 따라 달라졌습니다. 대표적인 원도 설계자이자 한글 글꼴의 아버지라 불리는 1세대 한글 디자이너가 바로 최정호 선생님입니다.

 

최정호 선생님은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어렸을 적 아버지가 내준 숙제를 통해 글씨 쓰는 재미를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루는 글씨 쓰기 숙제를 검사하던 선생님이 다짜고짜 어린 최정호 선생님의 따귀를 때렸다고 합니다. 글씨를 너무 잘 써 부모님이 대신 써준 것이라고 생각했던 선생님의 실수였습니다. 결국 최정호 선생님이 친구들과 선생님 앞에서 직접 글씨를 써서 사실을 증명했을 정도로 어렸을 적부터 명필이었다고 합니다.

 

글씨 쓰기와 그림 그리기에 소질이 있던 그는 고등학교 미술 선생님의 권유로 고등학교 졸업 후 인쇄 미술을 배우기 위해 일본으로 향했습니다. 낮에는 인쇄소에서 일을 배우고 밤에는 미술학원에서 공부하며 힘겹게 일본생활을 하면서도 재일교포를 위한 한글 영화 자막을 쓰는 등 다양한 활동을 하였습니다. 

 

그는 무엇보다 글자의 형태가 아름다워야 한다는 중요성을 깨닫고 아름다운 한글 활자를 만들고 싶다는 의지를 키웠다고 합니다.​ 

 

당시 '최정호활자서체연구소'의 사진.

 

한국으로 돌아온 후 그는 자그마한 도안 사무실을 열었습니다. 이때 동아출판사 창립자 김상문 사장이 찾아와 활자 원도를 설계하자고 제안하였습니다. 교재, 시험지 등을 만드는 작업을 주로 해왔던 터라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매일같이 찾아오는 김상문 사장을 못 이겨 서울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한글은 초성ㆍ중성ㆍ종성 어디에 위치하느냐에 따라 다른 디자인이 필요하므로 원도 설계가 어려웠습니다. 참고 할만한 책도 없어 꼬박 1년 동안 출판사에 기거하며 여러 번의 실패 끝에 1957년, 마침내 활자 한 벌을 완성하였습니다. 이 활자는 ‘동아출판사체’로 최종호 선생님이 처음으로 만든 한글 원도였습니다. ‘동아출판사체’는 <새백과사전>, <세계문학전집> 에 사용되었으며 완성도가 높아 세간에 큰 호평을 받았습니다.​ 

 

최정호의 '동아출판사체'는 이렇게 생겼습니다.

 

당시 한자만 쓸 수 있던 사진식자기의 한글 글자판 개발을 위해 일본 업체인 모리사와 사(社)와 그 경쟁사 샤켄 사​(社)​ 모두 최정호 선생님에게 원도 제작을 의뢰했습니다. 이는 한글 원도 설계자로서 그의 위치를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1972년부터 모리사와 명조체, 고딕체를 설계했고 샤켄 명조체, 고딕체를 비롯해 굴림체와 그래픽체, 공작체 등 수십 종의 글꼴을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품질이 우수하고 다양한 스타일의 최정호 원도를 탑재한 사진식자기가 국내에 널리 보급되어 활판 인쇄를 대체하였습니다. 

 

“글자란 사상이나 뜻을 전달하는 도구이다. 그러므로 읽는 사람이 피로감을 느끼지 않게 글자가 디자인되어야 한다. 글자를 하나하나 쓴다는 것은 예술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글씨를 쓴다고 말하지 않고 자형 설계를 한다고 말하기를 좋아한다.” – 최정호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기보다 오로지 한글 글꼴 설계만을 위해 일평생을 살아온 1세대 한글 디자이너 최정호 선생님. 신념과 철학을 담아내던 그의 한글 서체를 우리나라가 아닌 일본이 복원했다는 사실은 ‘우리’ 글자와 ‘우리’ 문화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에 경종을 울립니다. 너무나 당연하고 익숙하게 받아들였던 바탕체와 고딕체 그리고 한글 글꼴 안에 담긴 최정호 선생님의 뜻을 기립니다.​ 

 

최정호 원도 - 넥슨컴퓨터박물관 소장.

 

 

넥슨컴퓨터박물관은 최정호 선생님의 원도를 기증받아 소장하고 있습니다. 

 

제주에서, 세상을 바꾸는 아이디어 넥슨컴퓨터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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