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

[기자수첩] 스크린 밖으로 나와버린 전쟁, 우리가 할 일

톤톤 (방승언) | 2022-03-02 12:3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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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과 가상의 경계가 날이 갈수록 흐려지는 추세다. 전 세계가 여기에 메타버스라는 오래된 이름을 다시 붙여 열광 중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철저히 스크린 안에만 머물러야 할 뿐 현실로 튀어나와선 안 되는 것들도 있고 전쟁은 그중 으뜸이다. 현실이 아니길 바라는 여러 사람의 염원이 무색하게도, 2월 24일 러시아가 정말로 우크라이나 국경을 넘으면서 양국의 전면전이 시작됐다.

사실 러시아 일대의 무력 분쟁은 전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이번 전쟁의 빌미 중 하나인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의 친러반군 대 우크라이나군 분쟁은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 이래 지속해 왔다. 표면상 ‘내전’이라고는 하지만, 러시아군이 개입한 정황이 있다. 거슬러 올라가면 러시아는 1994년부터 분리독립을 선언하는 체첸공화국을 상대로 1,2차 전쟁을 거쳐 2009년까지 전쟁을 지속했다. 2008년에는 선공당한 남오세티야를 지원해 조지아와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현대에 펼쳐지는 국가 간 전면전이 주는 충격은 여전히 강하다. 비전투원의 희생이나 일국의 주권 상실, 그리고 이어지는 인권유린의 가능성 때문이다. 세계대전의 재발 우려 또한 전 세계가 두려움을 느끼는 이유다. 

러시아 주력 부대의 국경 침투 장면을 다시 보기 바랐던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거의 없는’ 몇몇에 의해 결국 그 장면은 현실이 됐다. 첫날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러시아명 키예프)에 벌어진 공습으로 최소 137명이 사망했다. 28일 발표에 따르면 민간인 피해자는 총 352명으로 늘어났다. 그중 14명은 어린이다. 3월 1일에는 제2도시 하르키우의 민간인 거주지역에 본격적 공습이 발생해 다시 한 번 많은 민간인이 죽고 다쳤다. 양국 군대의 전사자는 수천 명 규모로 추정된다.

러시아군의 폭격 후 우크라이나 대통령 집무실이 CNN에 제공한 사진 (출처 : 트위터)


# 악당 이미지 강화된 러시아

북미와 서유럽 창작물에서 러시아(그리고 소련)는 꽤 오랫동안 ‘위험한 국가’였다. 구소련과 대립하며 냉전 질서를 유지하던 미국에서 이런 설정이 더욱더 인기가 좋았다. 미국 창작자 입장에서 러시아는 ‘악당 국가’로 활용하기에 워낙 적합했던 상대다. 미국이 주인공인 각본에서 숙적 배역을 맡을 만한 국력과 역사를 지닌 국가는 러시아 이외에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게임업계로 좁혀서 이야기해보면, 러시아의 독자적이고 방대한 무기체계 또한 악당화의 좋은 조건이 됐다. 냉전 내 지속한 양 진영 간 군비경쟁의 결과로 러시아와 미국에는 상호 대응하는 무기들이 많았다. 게임 디자인상 미군의 ‘적군’으로서 밸런스를 맞추기에 유리한 조건이 아닐 수 없다.

실제로 러시아 및 소련은 <콜 오브 듀티 모던 워페어>, <배틀필드>, <월드 인 컨플릭트>, <커맨드 앤 컨커: 레드 얼럿>(평행세계의 소련으로 현실과 연관성이 비교적 적은 편이다) 등, 전면전 시나리오를 가정한 작품에서 자주 등장해 미군과 비등하게 겨루는 적 세력으로 묘사됐다.

2019년 작 <모던 워페어 리부트>에서 러시아는 가상국가 우르지크스탄을 침공한다.

이것이 불공정하며 불필요한 선입견을 강화하는 행위라는 의견은 꾸준히 있었다. 특히 ‘자유세계의 경찰’을 자처하지만 기실 개입주의를 추구하는 미국의 행보에 염증을 느끼는 소비자, 비평가일수록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전 세계 무력 분쟁에 관여하는 미국을 홀로 정의의 수호자로 내세우며 러시아 등 다른 국가만을 악의 축으로 묘사하는 행위에 대한 반감이다.

그런데 이번 침공으로 ‘3차대전을 일으킬지도 모르는 위험한 국가’라는 러시아를 향한 편견은 강화되고 말았다. 안타까운 것은 러시아인 중에도 이 전쟁에 반대하거나 억지로 동참한 사람이 적지 않다는 점이다.

일례로 침공 직후 러시아 내부에서는 평화 촉구 시위가 벌어졌다. 그러나 정부의 빠른 진압과 이어지는 공습 소식에 묻혀 시위 소식은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다. 한편 우크라이나에 붙잡힌 러시아군들 상당수는 한결같이 ‘군사훈련인 줄 알았다, 진짜 침공하는 줄은 몰랐다’며 두려움과 슬픔을 증언한 것으로 전한다. ‘러시아=위험’이라는 공식이 이번을 계기로 세계인의 뇌리에 다시금 강화한다면 그 피해는 전쟁에 반대했던 모든 선량한 러시아인에게도 돌아갈 예정이다.

이미 러시아는 게임에서 ‘불편한 소재’가 되고 있다. 침공 이튿날인 25일 다이스는 <배틀필드 2042>에서 진행 중이던 주간 미션 콘텐츠를 취소했다. 러시아 군용 헬리콥터 Mi-240 슈퍼 하인드 용 ‘스마일 스킨’이 지급되는 미션이었다. 다이스는 “현 상황을 고려해 이번 주의 주간 미션 시스템을 비활성화했다. 이번 주의 보상은 앞으로도 잠금 해제가 불가하다”고 밝혔다.

지급 이벤트가 취소된 <배틀필드 2042>의 헬리콥터 스킨


# 하이브리드 전쟁

전문가들은 이번 전쟁을 무력충돌, 여론전, 사이버전이 다각적으로 펼쳐지는 ‘하이브리드 전쟁’으로 평가한다. 현실의 전장이 온라인으로 확대된 셈이다.

최대 5만 규모로 추정되는 사이버전 부대를 운용하며 이 방면에서 원래 두각을 나타내던 러시아는 지난해 12월경부터 우크라이나 기간시설을 해킹하는 등 사이버 공작을 먼저 펼친 것으로 알려졌다. 2월 침공 직전에 정부 주요 기관과 은행도 분산서비스거부공격(DDoS)으로 장애를 겪었다.

반면 여론전에서는 우크라이나가 힘을 발휘하는 상황이다. ‘우크라이나의 위협’과 ‘네오나치즘 척결’을 명분으로 내세운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의 군사시설만을 정밀타격해 민간 피해를 최소화했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정부와 시민이 SNS를 통해 민간인 거주지역에 펼쳐지는 참상을 고스란히 고발하면서, 이러한 주장은 힘을 잃었다.

우크라이나 아파트 건물이 러시아 미사일에 직격당하는 모습 (출처: 우크라이나 외교부장관 트위터)

여론전에서 앞장서 분투하고 있는 것은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다. 가짜뉴스로 ‘대통령 도피설’이 확산하자 그는 인터넷 라이브를 켜고 “나는 여기에 있다”며 모습을 드러내 국민을 안심시켰다. 러시아가 그를 1순위 목표로 지정하고 별도 암살조를 키이우에 파견한 것으로 추정되는 상황 속에서의 결단이다.

젤렌스키는 계속해서 인터넷 방송을 통해 우방국의 참여를 촉구하고, 현지 피해를 전파하며, EU 가입의사를 알리는 등 소통 전략을 펴고 있다. 이것이 전 세계인의 관심을 끌어모음으로써, 러시아의 민간인 대상 무차별적 화력투사를 어느 정도 억제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알려진 대로 젤렌스키는 코미디언 출신이다. 한 코미디 드라마에서 정부 부정부패에 신물이 난 교사였다가 국민 호응으로 덜컥 대통령이 되는 주인공 역할을 맡았다. 이후 실제로 대선에 출마한 그는 우크라이나 정치권의 부패를 응징하고 싶었던 국민의 염원과 구태에 얽히지 않은 신선한 이미지에 힘입어 72% 득표로 당선됐다.

젤렌스키가 당선될 수 있던 또 다른 요인으로 꼽히는 것은 베테랑 방송인으로서 미디어 활용 실력이다. 화면 속 대통령에서 현실의 대통령이 된 젤렌스키는 다시금 자신의 장기를 다시 발휘해 화면 안팎으로 위기에 맞서고 있다.

EU 의회에서 원격으로 연설하는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 스크린을 통해 참전하는 세계인, 우리는 뭘 할까

이렇듯 전쟁 양상이 스크린 너머로 확산하면서, 관련하여 전 세계의 지원도 이뤄지고 있다. 해킹 그룹 어나니머스는 러시아를 향한 총공세를 선언, 사이버전의 균형을 맞추겠다는 의지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는 자사의 위성 인터넷 서비스 ‘스타링크’를 우크라이나에 무상 제공해 우크라이나 시민의 소통을 돕고 있다. 2일 오전 러시아가 키이우 방송 타워를 공격하며 외부 소통 단절에 나선 것으로 추정되는 가운데 이러한 원조는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게이머를 비롯한 일반 대중 또한 인터넷을 통해 우크라이나 지원에 나설 수 있다. 꾸준한 관심 표명과 가짜뉴스 신고를 통해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사기 저하를 막고 항전 의지를 응원하는 동시에, 러시아에 대한 비판 여론을 강화할 수 있다는 의미다. 전 세계가 러시아 압박 수위를 높여 전쟁 의지를 꺾으려는 지금과 같은 전황에서 이는 생각 이상의 도움이 될 수 있다.

일례로 공습 직후 인터넷상에서는 게이머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현상이 하나 포착됐다. 무력 분쟁이 발생할 때마다 가짜뉴스의 소스가 되곤 하는 <아르마 3>의 인게임 영상이 다시 한 번 ‘우크라이나 공습 영상’으로 둔갑해 네티즌 사이에 확산한 것. 게임이 아닌 진짜 위협에 빠진 우크라이나 시민들에게 분노와 좌절감을 줄 수 있는 가짜뉴스였지만, 이를 알아본 <아르마 3> 유저 및 게이머들이 적극 신고하면서 해당 영상들은 머잖아 주요 SNS에서 삭제됐다.

우크라이나 침공 영상으로 잘못 알려졌던 <아르마 3> 영상 일부

한편 우크라이나 소재 e스포츠 구단 NAVI(Natus Vincere·나투스 빙케레)는 선수들과 함께 방공호에 피신한 채 연일 SNS를 통해 게이머들의 지속적 관심과 소식 전파를 요청하고 있다. NAVI는 “e스포츠계는 이제 이전과 같을 수 없다. 전 세계가 이전과는 같을 수 없다”며 국제 분쟁이 국제 e스포츠계에 끼칠 영구적 영향에 우려를 밝혔다. 하지만 NAVI는 사람들의 참여가 모든 것을 바꿔놓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들은 “그러나 어떻게 바뀔지 결정하는 것은 여러분이다. 침묵하지 말아달라”고 전했다.

기금 마련도 원격 지원의 한 방법이다. 대표적 반전 게임 <디스 워 오브 마인>의 개발사로서, 우크라이나 접경 국가 폴란드에 소재한 11비트 스튜디오는 25일부터 7일간 <디스 워 오브 마인> 및 DLC 판매 수익을 전액 우크라이나 적십자에 기부한다고 밝혔다. 첫 24시간 내에 16만 달러(약 2억 원)가 모금된 것으로 알려졌다. 국제 적십자의 우크라이나 지원 펀드나 우크라이나 은행의 군 지원 펀드에 직접 모금하는 방식으로도 지원에 나설 수 있다.

"끔찍한 밤이다. 하지만 우리 군대가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모든 것을 다하고 있다. 간밤의 안부를 묻는 것으로 아침이 시작된다. 여러분 전부 우리의 희망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여러분의 지지는 우리에게 모든 것이다.​" (출처: NAVI 트위터)

"e스포츠계는 이제 이전과 같을 수 없다. 전 세계가 이전과는 같을 수 없다. 그러나 어떻게 바뀔지 결정하는 것은 여러분이다. 침묵하지 말아달라" (출처: NAVI 트위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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