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

[게임잡상] 탈모 치료 모자처럼 꿈을 이용해 허상을 파는 사람들

음마교주 (정우철) | 2022-06-02 11: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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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고 그 수에 비례하는 다양한 아이디어가 나온다. 

 

이 아이디어 중에는 특허를 받아 그 독창성을 인정받은 것들이 있다. 그리고 이 중에서는 세상을 바꿀 만한 혁신적인 아이템이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특허를 받았다고, 독창적인 아이디어라고 해서 모두가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혁신적이고 참신하지만 정상적인 물건이 아닐 가능성이 더 높다. 

 

게임업계에서도 예전부터 수많은 아이디어 상품이 등장했다. 대표적인 것이 게이밍 젓가락이나 스트로우(빨대)인데 이에 대한 효용성 이전에 남에게 피해를 주는 물건은 아니라는 점에서 웃고 넘어갈 수 있을 듯하다.

 

탈모 관련 제품은 시대와 상관없이 항상 히트 상품이었다. (그 효과가 있는지와 별개로...)

 

 

하지만 이런 모든 것이 상품화될 수는 없다. 세상에는 라이선스라는 것이 존재하고 혹은 실현이 불가능한 아이디어 단계에서 끝날 수밖에 없는 운명의 물건도 존재한다. 지금부터 이야기하는 것은 내가 직접 경험한 일이다.

 


 

지금으로부터 대략 19년 전의 이야기다. 

 

평범하게 취재하고 기사를 쓰던 2003년 유난히 더웠던 여름 날 한통의 전화를 받았다. 모르는 전화번호였다. 전화기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진지했다. 오래된 일이라 정확한 워딩은 기억 못 하지만 대충 우리가 획기적인 물건을 만들었고 이를 시연할 기회를 달라는 것.

 

게임 전문기자로서 이런 새로운 정보는 언제나 환영이었다. 그들이 만들고 있다고 주장한 물건은 플레이스테이션 2(이하 PS2)에서 네트워크 플레이가 안 되는 게임도 가능하게 만들어준다는 주변기기. 첨언하자면 당시에도 PS2에는 BB유닛이라는 공식 상품이 있었다. 

 


2003년 7월 발매된 <SOCOM>의 TV 광고. PS2 네트워크 플레이를 강조했다.( 출처: 유튜브 Webffice 채널)

 

40GB의 하드디스크와 네트워크 어댑터가 있는 제품으로 DVD를 하드디스크에 인스톨해서 즐기는 것이 주목적이고, 일부 네트워크 플레이를 지원하는 게임을 플레이할 수 있는 용도였다. 당시 가격은 하드디스크를 제외한 랜 모듈만 구입할 경우 3,980 엔(당시 약 4만 원).

 


 

PS2에서 네트워크 플레이를 지원하는 게임은 6개 정도였으나 당시 한국에서도 <소콤>의 PS2 네트워크 플레이를 강조하면서 큰 반향을 얻고 있었다. 타이밍 상으로는 정말 딱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시점.

 

그런데 이들이 만들고 있다 주장한 물건은 설명상으로는 매우 놀라웠다. 네트워크를 지원하지 않는 게임도 자체적으로 지원해서 플레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더불어 그들이 시연을 하겠다고 한 게임은 당시 최고 인기를 누리던 <철권 태그 토너먼트> 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시연에 앞서 이들의 사전 PT를 요약하면 이러했다.

 

1. 네트워크 미지원 게임도 모두 지원.  

2. PS2 1대로 2명의 네트워크 플레이 지원.

3. 당시는 네트워크 플레이가 대 유행(스타크래프트 등)

4. 철권 TT의 인기는 당시 열풍이라고 할 만큼 오락실에서 최고의 인기를 구사 중

5. 당시 ADSL 보급이 시작되면서 네트워크 플레이에 대한 요구가 급증

6. 공식 제품보다 저렴한 가격

 

이런 6가지 주장이 사실이라면 당시로는 혁명과도 같은 일이었다. 그래서 시연 요청을 받아들였고 직접 그 제품과 기술을 확인하는 날을 기다렸다. 하지만 시연 당일 그들이 가져온 것은 내 눈을 의심케 했다. 아니 의심을 사기에 충분했다. PS2에 장착할 수 있는 작은 기기를 생각했지만 시연용 기기라고 가져온 물건은 PC였다. 

 

PC같은 물건이 아니라 말 그대로 PC 본체를 들고 온 것이다.

 


 

이게 뭐냐고 물었더니 돌아온 답은 실망적이었다. 

 

“현재 연구 개발 중으로 기술은 개발되었으나 제품화는 아직 이다. 투자를 받아 제품 생산에 들어가면 손바닥만 한 주변기기로 나올 것이다”라며 “오늘은 우리의 기술을 시연하러 온 자리이니 어떻게 구현되는지 검증해달라”

 

이 답변부터 이상했다. 어쨌든 그들이 시연을 했을 때는 실제로 PS2로 플레이하는 <철권 태그 토너먼트>가 있었고 이를 수 Km 떨어진 그들의 사무실에 있는 누군가와 네트워크로 윈도우 미디어 플레이어에 나오는 같은 화면을 보고 있음을 확인할 수는 있었다.

 

그런데 또 이상했다. 2인 대전이라면 상대방도 조작을 해야 하는데 가만히 있었던 것. 동일한 게임 플레이 화면만 양측에서 송출되고 있을 뿐 그게 전부였다. 심지어 상대방 화면은 랙 현상도 잦았다. 그래서 물어봤다. 이게 어떻게 네트워크 플레이인가?라고.

 

돌아온 답은 “아직 기술 개발 중이다. 나중엔 컨트롤러 조작 신호도 같이 상대에게 전송해서 플레이가 가능해지게 된다”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래서 되물었다. 지금은 안 되는 거냐고. 그러자 “안 되는 게 아니고 지금 개발 중이고 연구실에서는 보여줄 수 있다. 다만 외부에는 지금 공개하지 않고 있다”.

 

수소 전기트럭 시연 홍보 영상 의혹으로 유명한 니콜라원

 

점점 이상했다. 그래서 오늘 가져온 시제품의 모습이라도 보여 달라고 하니 PC봉인을 풀어야 한다며 머뭇거리더니 사진을 찍지 않는 조건으로 보여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내가 본 물건은 녹색 기판에 여기저기 붙어있는 저항과 반도체뿐. 

 

결론만 이야기하면 그 녹색 기판은 사제로 만든 캡쳐보드였다. 그들이 주장했던 기술을 시연했다는 건 PS2를 캡쳐보드에 연결한 뒤, 그 영상을 인터넷 스트리밍으로 상대에게 전송하는 것이 전부였던 것이다.(아프리카TV의 인터넷 개인방송 서비스가 2006년부터 시작했으니 사업 아이템만 달랐다면 대박이었을 수도 있었을 듯하다.)

 

출처: 미드 <빅뱅이론>

 

이해를 돕기 위해 요즘 시대에 맞춘 설명을 하자면, 유튜브나 트위치로 해당 게임 방송을 실시간으로 송출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들의 주장을 대입하면 이렇게 송출된 영상을 보고 상대방은 캐릭터를 조작하는 것. 요즘에는 이를 클라우드 게이밍이라 말하지만, 이들의 개념에는 서버도 없었고 당시엔 클라우드라는 개념조차 없던 시절.

 

물론 당시 인터넷 속도가 최대 10M(이때는 이것도 엄청난 초고속이었지만...)였음을 기억한다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설마 시대를 앞서 나가던 기술자들이었던 것일까? 소니로부터 기기 라이선스는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에 대한 답도 그게 왜 필요한가라는 답을 한 시점에서 시연을 중단시켰다.

 

이들이 지금도 천문학적 자금을 들여도 서비스가 힘든 클라우드 게이밍의 개념을 만들거나 구현하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을 터. 당시 PS2 네트워크 카드 시연회는 경찰을 부르기 일보직전까지 갔었고 그들은 나를 저주하면서 자리를 떴다. 그 이후로도 그들은 잡지에 광고도 내고, 소규모 게임 전시회에도 부스를 냈던 것으로 기억한다.

 

요약하자면 네트워크를 지원하는 일종의 랜카드인 줄 알았더니 영상 스트리밍 기기를 가져와서 눈속임을 한 것이다.

 



 

이들의 목적은 분명했다. 시연을 하고 이 시연을 그대로 기사화하길 원했던 것이다. 나중에 알았지만 이 시연 행사는 자신들이 투자를 요청한 개인 투자자로부터 요구받았던 것이었고. 검증을 받아오면 투자를 하겠다는 요청의 일환이었다.

 

내가 시연을 통해 봤던 그 제품도 결국 상품화되지 못했다. 애초에 상품화가 불가능한 기획이었겠지만 눈에 보이는 대로만 기사로 다루었다면 그 결과값은 어떻게 나왔을 지 지금도 곱씹어보면 등골이 서늘해진다.

 

사실 2000년대 초반에는 닷컴 버블과 함께 이런 식의 투자를 위한 시연회가 비일비재했다. 시연회를 한 번 거치고 이것이 기사화된다면 투자자들에게 기사가 나왔다고 보여줄 수 있었고, 투자자 입장에선 검색해서 뉴스가 나오면 일단 신뢰할 수 있었기 때문. 

 

피 한 방울의 기적에서 사기로 판명된 '테라노스' 사건도 기술의 허구가 들통났기 때문

 

가깝게는 AR과 VR. 최근의 메타버스와 NFT, 그리고 코인으로 불리는 가상화폐라는 키워드가 이슈다. 물론 진지하게 사업적으로 고민하고 새로운 기술을 이용해 새로운 시대를 열고자 노력하는 사람이 많다. 이들은 남의 돈을 탐하거나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외부에서 이들의 실적을 보고 자발적으로 투자를 하는 편이다.

 

그러나 기술이 아닌 키워드만을 이용해 돈만 보고 시장에 접근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보여줄 기술이나 사업계획이 없다. 단순히 어떻게 될 것이다 라는 추정만 가지고 그럴듯하게 포장해서 보여주기만 한다. 그리고 이런 보여주기로 투자를 요구한다.

 



 

꿈을 실현해 성공한 부류도 있다. IT 분야에서는 테슬라의 전기차와 스타링크, AR 계열에서는 나이언틱의 <포켓몬 GO> 등이 있지만 키워드만 따라가다 결과물도 없이 사라진 곳도 수없이 많다. 아직도 기술개발을 해야하는 분야도 많다. 꿈과 허구를 구별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충분한 자료와 분석이 필요하다. 포장지 보다 내용물을 봐야 한다는 이야기다. 

 

돈이 모이는 업계와 시장에는 언제나 이를 노리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에게 게임 시장은 좋은 먹이감이 되고 있다. 이렇게 사업하기 좋은 시대에 과거에 행해졌던, 키워드 장사를 하고 허구에 가까운 일을 꿈으로 포장해서 보여주는 일들이 요즘은 사라졌을까? 

 

사실 위에서 언급한 19년 전의 PS2 시연의 사례도 미래가 된 지금 대부분 구현되고 있는 기술이다. 대부분의 콘솔게임기는 네트워크 플레이를 기본으로 지원하게 됐고, 영상을 스트리밍해서 게임기가 없어도 플레이가 가능한 클라우드 게이밍의 시대가 됐다.  

 

무엇이 꿈인지, 허구인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시대는 아니다.  미국에서도 대부분의 사업가들이 망할 거라 예측한 테슬라도 창업한지 18년, 나스닥 상장 11년이 지나서야 지금의 성과를 이루어 냈다. 닷컴버블 사태에서도 극히 일부의 닷컴기업은 살아남아 지금은 대기업이 되어있는 경우도 있다.  다만, 당장 일확천금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던 사람들은 모두 사라졌다.

 

먼 과거부터 완치할 수 있다 말하던 탈모 치료와 관련해 지금까지 공식적이고 과학적으로 검증된 약품은 3종류다. 물론 시간이 지나 미래가 되면 기술의 발달로 획기적인 방법이 나올 수 있겠지만, 갑자기 머리가 자란다고 이야기하는 제품이 있다면 의심부터 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최근 일련의 사태를 보면서 갑자기 옛날 생각이 나 잡상으로 이런 일도 있었다고 끄적여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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