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

[롤드컵 칼럼] 이것이 롤이다

4랑해요 (김승주 기자) | 2022-11-09 17:4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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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롤드컵은 역대 최고의 롤드컵이자, e스포츠 역사에 수많은 족적을 남긴 대회였다. 수십년 간 쌓아 온 선수들의 스토리가 한데 얽힌 결과물이자, 모두가 우승자를 기리며 기적에 감사할 수 있는 스포츠임을 당당히 증명한 것이다. /디스이즈게임 김승주 기자​

 

 

# e스포츠가 쌓아낸 선수들의 이야기, 롤드컵에서 꽃피다


모든 사람들이 이번 롤드컵을 역대급 대회라 추켜세우는 이유는, 메타의 완성도가 높아서도, 선수들의 슈퍼플레이가 많아서도 아니다. <롤> e스포츠가 수년간 쌓아 온 스토리가 누군가 구태여 설명할 필요도 없이 매 경기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이번 롤드컵에서 다시 모인 2020 DRX 선수진이 있다. 김대호 감독의 지휘봉 아래 동고동락했던 신인과 베테랑들은 헤어진 후 이번 롤드컵에서 각자의 팀에서 서로가 서로를 떨어트려야 하는 적으로 만났다. 2020년 데뷔해'데프트와 짝을 이뤘던 케리아는 세계 최고를 기리는 마지막 경기에서 첫 파트너이자 존경하는 형, 그리고 같은 년도에 같은 팀에서 데뷔했던 표식을 적으로 마주했다. 첫 선수단 소개 때만 해도 풋풋했던 선수들은, 어느새 LCK를 받치는 기둥으로 성장해 있었다.

 

2020년의 DRX
2년 뒤, 이들은 모두가 우승컵을 하나씩 들어올리는 데 성공했다. (출처: DRX)

2년 뒤, 세계 최고를 기리는 무대에서 만난 두 선수 (출처: 라이엇 게임즈)

결승전에 오른 DRX와 T1 선수들만이 주인공은 아니다. LPL 2시드를 탈락시킨 GAM의 베테랑 '리바이', 수 년 째 일본 <롤> e스포츠의 발전을 증명하기 위해 포기하지 않고 롤드컵에 도전하는 DFM의 '에비', 인상적인 'BOT GAP'(바텀 차이) 세레머니를 선보인 LOUD의 '브란스', 라이벌 지역 유럽의 매드 라이온즈를 3:0으로 꺾으며 잠시나마 북미 팬을 행복하게 해준 EG의 '조조펀'까지. 모든 선수가 자신들의 서사를 가지고 있었다.

 


# 게임 내적으로도 많은 것을 증명한 대회

  

이번 롤드컵은 게임 내적으로도 많은 것을 증명했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결승전 5세트 킹겐이 보여준 살신성인이다. 페이커를 자르기 위해 미드 라인으로 달려나간 표식과 베릴을 위해, 킹겐은 페이커를 보호하기 위해 모여드는 T1의 네 선수에게 그대로 뛰어들었다. 1초의 고민도 없었다. 결과적으로는 손해였지만 우승 팀 DRX의 팀워크가 왜 이리도 단단했는지, 선수끼리 얼마나 믿고 있는지 대번에 알 수 있는 장면이었다.

 

팀원을 위해, 사지(死地)로 뛰어들어간 킹겐 (출처: 라이엇 게임즈)

 

e스포츠에서 통용되던 '에이징 커브'(노화 곡선)이라는 말도 보기 좋게 깨부순 대회였다. "그들은 내가 살아남지 못할 거라 말했지"라는 주제가 'STAR WALKIN'의 가사처럼, 대회가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누구도 어느덧 '노장'이 된 페이커와 데프트의 결승전 성사를 믿지 않았다. 특히 데프트를 바라보는 시선이 그랬다. 조별 리그, 8강, 4강, 그리고 결승까지 데프트의 우승을 예측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마음속에선 바랄지라도, 이성으로는 불가능하다 여겼다.

그러나 데프트는 선수 생활 10년 차에, 7번째 롤드컵에서, 가장 우승 확률이 낮다고 평가받은 대회에서 꿈에 염원하던 트로피를 들었다.

 

"데뷔 후 하루도 빠짐없이 상상했던 순간" (출처: 라이엇 게임즈)

 e스포츠에서 선수의 슈퍼플레이, 그리고 정교한 컨트롤을 상징하는 '피지컬'이라는 단어에 재평가의 여지가 생겨났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보통 우리는 화려한 컨트롤을 보여주는 선수에 열광한다. 라인전 차이에, 상대와의 CS에,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반응 속도에 열광한다. 이런 것들을 잘 해야 세계 최강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결과는 반대에 가까웠다.

혹자는 DRX의 우승을 보고 기자에게 "일반 게임에선 보이지 않는 능력 수준에 의미가 생기는 최상위권 구간에선, 피지컬보단 몇 수 앞을 미리 보는 능력이 중요함을 증명했다"라고 언급했다.

결승전의 베릴이 대표적이다. 수년간의 노력을 증명하는 가장 중요한 경기에서, 베릴은 변수를 만들고자 2년 전에 꺼내 들었던 바드를 과감히 선택했다. 마지막 교전에서는 서포터 혼자 미드 라이너와 원딜러의 점멸을, 정글러의 궁극기를 단 1분도 되지 않아 모두 소모시켰다. 주요 딜러의 점멸이 모두 소모된 T1의 전투 의지는 꺾였고, 결국 백도어라는 극단적인 수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를 보고 e스포츠 팬들은 베릴을 기존의 '롤도사'라는 별명을 넘어선 '롤신선'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DRX의 승리로 2세트가 끝난 순간 베릴은 "날 믿어"라고 말했고
5세트에서 자신을 증명했다. (출처: 라이엇 게임즈)

 

마지막으로, 쿠키뉴스 문대찬 기자와 데프트와의 인터뷰에서 나온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는 문구로 대표된 멘탈리티(정신력)가 무엇보다 중요함을 증명한 대회기도 하다. 8강전부터 DRX는 늘 핀치에 몰렸고, "정녕 하늘이 DRX를 버리는가?"라고 한탄했을 법한 순간도 많았다.

EDG와의 8강에서 넥서스 파괴를 앞두고 억제기가 재생돼 패배했고, 4강에서는 세트 13연패라는 상대 전적을 가진 젠지와 만났다. 결승전에서는 좋은 플레이에도 불구하고 바론만 두 번 빼앗기며 유리했던 경기를 내주기도 했다.

 

EDG와의 경기, 넥서스 파괴에 실패하며 탈락 직전까지 몰린 상황에서
데프트는 "괜찮다. 이길 수 있다"라고 말했다. (출처: DRX)

 

얄궂게도 5세트의 마지막 승부처 역시 장로 드래곤 싸움이었다. 이현우 해설위원조차 "치기 무섭지 않나요? 저는 무서운데요?"라고 언급할 만큼, 찰나의 실수가 수 년 간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 수 있던 순간이었다.

하지만. 정글러 표식과 DRX 선수들의 정신력은 신기하리만큼 단단했다. 승부처라 생각되자 베릴의 "쳐봐!" 라는 오더와 함께 DRX는 과감하게 장로 드래곤을 공격했고, 끝끝내 마지막 장로 드래곤을 획득하며 롤드컵 우승 반지를 손에 넣었다.

참고로, 2022 롤드컵에서 가장 평균 경기 시간이 긴 팀은 DRX다. (34분 28초)

 

 

# '꺾이지 않는 마음' 문구가 가진 의미란

"이것이 롤이다" (출처: 트위터)

DRX가 보여준 EDG와의 4강전, 그리고 T1과의 결승전이 마무리된 후 <롤> e스포츠 공식 트위터는 "LEAGUE OF LEGEND"라고 짧게 평가했다.

기자는 이를 보며 순간, JRA(일본경마협회)가 G1급 대회가 열릴 때마다 이전 우승마를 기리며 발표하는 '명마의 초상'이 떠올랐다. 성장 배경과 핵심이 다른 경마를 <롤> e스포츠와 완전히 동일시할 순 없겠지만, 이전에 명마의 초상에서 봤던 "이것이 경마다"(これが競馬だ)라는 문구가 뇌리를 스쳤기 때문이다. 재미있게도 이 문구는 이번 롤드컵과 기묘하게 비슷한 느낌을 내뿜고 있다.

(출처: Japan Racing Association)

해당 문구로 헌정된 말은 1993년 일본 더비에서 우승한 '아이네스 후진'이다. 당시 후진의 기수는 '나카노 에이지'. 저조한 성적과 37세의 나이, 교통사고, 급격한 체중 증가로 인해 주목받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잊혀 가는 기수였다. 우연한 기회로 아이네스 후진의 기수가 됐지만, 일본 더비 직전 진행된 대회에서 2착으로 패배하며 당장 후진 위에서 내리라는 세간의 비난까지 받았다. 

그리고 일본 더비는, 3세 말이 단 한 번만 참여할 수 있는 꿈과 같은 대회다. 모두가 선망하지만, 잔인하게도 기회는 1년에 단 한 번만 주어진다. 또한 당시 1990년대 일본은 '버블 경제'가 정점을 찍던 시기였고, 지방에서 올라와 중앙을 휩쓴 '오구리 캡'이 이끈 '2차 경마 붐' 덕분에 경마의 인기 역시 절정으로 치달아 있었다.

당일 도쿄 경마장에는 19만 6517명이라는 지금도 깨지지 않을 역대급 관객이 경기를 보기 위해 모였다. 아쉽게도 인기가 가장 많았던 오구리 캡은 일본 더비 출주권이 없었다. 하지만 당대 경마 붐을 이끈 '아이돌 말'이 없었음에도 사람들은 순수히 경기를 보기 위해 모였다. 마권과 함께 일확천금을 꿈꾸는 도박사도 있었겠지만, 관객의 절대다수는 레이스 자체에 흥미가 이끌렸던 것이다.

아이네스 후진은 1990년 일본 더비에서 3번 인기를 받았다. 기수는 1번 인기로 우승하고 싶다고, 자신이 있다며 사람들의 응원을 바랬지만 대부분은 신용하지 않았다. 나카노 에이지는 37세의 나이 많은 기수였다. 후진에 기승하기 전에는 G1 승리 기록도 없었다. 반면, 1번 인기를 받은 말의 기수는 22세였고, 2번 인기를 받은 말의 기수는 당시 21세의 '천재 기수' 타케 유타카였다.

하지만, 레이스 결과는 모두의 예상과 달랐다. 일반적으로 도주가 어렵다고 평가받는 일본 더비에서(1997년이 마지막 도주 우승이다), 아이네스 후진은 결승선까지 1위를 유지하며 도주했다. 1번 인기마도, 2번 인기마도 경기 내내 후진을 앞지르지 못했다. 후진이 기록한 타임은 2분 25초 3. 기록은 14년 간 깨지지 않았다. 확인된 사실은 아니지만, 나카노 기수는 우승이 확정된 후 "봤느냐, 나도 기수다"라고 조용히 말했다고 한다. 

후진은 힘을 모두 쏟아낸 나머지, 우승마가 경기장을 가볍게 한 바퀴 도는 '위닝 런' 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비틀거리며 스탠드 앞으로 돌아왔다.

그 순간, 19만 명의 관객은 일제히 나카노 기수의 이름을 외쳤다. 관람객들이 기수의 이름을 외쳐 준다는 것은 일본 경마 역사상 처음이었다. 다른 말에 돈을 걸었기에 평소대로라면 욕지기를 내뱉으며 마권을 찢어야 할 도박사들 역시, 마권을 꽉 붙잡고 기수의 이름을 외쳤다. 우승을 위해 위닝 런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투혼을 불사른 말과 기수에게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마권의 적중이나 배당과는 관계없이, 기적에 감사하며 열광한 것이다.

당시 도쿄 경마장의 사진 (출처: Japan Racing Association)

이후 G1 레이스를 우승한 말과 기수에 대한 네임콜은 일본에서 관례가 됐다. 많은 관계자들은 당시의 일화를 일본 경마가 도박이란 이미지를 넘어서 스포츠로 도약한 사건이라고 회고하고 있다. 대단한 충격이었다. 평소대로라면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튀어나오는 도박사의 욕설과 고함에 익숙했던 기존의 경마 관계자들에게 기수와 말에 대한 순수한 응원은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한 은퇴한 기수는 "이런 성원이라면, 다시 한번 뛰고 싶다. 그리고 더비에서 이기고 싶다"라고 언급했다. 당시 경기를 관람했던 경마학교 학생들은 꿈에 확신을 가졌고, 2년 뒤 데뷔했다. 그중 한 명은 1992년 최다 승리 신인 기수가 됐다.

(출처: LCK)

2022 롤드컵이 보여준 이야기, 데프트의 인터뷰에서 나온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는 문구 역시 그 이야기에 감동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한데 모았음이 확실하다. 누군가 강요한 것이 아니라, 선수의 의지와 투혼을 보고 자연스레 생겨난 것이다.

미국 현지에서 진행된 한국 팀 간의 경기임에도 결승전 시청자 추이는 역대 최고를 달성했다. 남탓과 욕설, 서랜(투표를 통한 항복) 일상이었던 <롤> 솔로 랭크에서는 "꺾이지 않는 마음"을 언급하며 끝까지 게임을 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에이징 커브'에 입각해 자신의 전성기는 지났다고 생각한 베테랑 프로게이머들은 결승전을 보며 다시금 할 수 있다는 의지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재미있게도 9일, 이전에 데프트와 라이벌리를 불태웠던 '레클레스'가 친정 팀 프나틱에 원거리 딜러로 복귀한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이 칼럼을 쓴 날(8일)에는 전날 한국시리즈 5차전에서 대타 끝내기 홈런을 맞으며 역전패한 야구팀 '키움 히어로즈'에게 "꺾이지 않는 마음"을 주문하는 기사가 올라왔으며, 게임과 관련이 전혀 없는 SNS 곳곳에서도 이 문구를 쉽게 찾아볼 수 있게 됐다. 첫 시작만 해도 특정 계층의 '유흥거리'로 치부됐던 e스포츠가 1990년의 일본 더비가 보여준 것처럼 이제 모두가 즐기고, 우승자를 기리며 기적에 감사할 수 있는 스포츠임을 당당히 증명한 것이다.

전 세계인의 스포츠 (출처: 라이엇 게임즈)


# 이것이 롤이다

 

2012년, OGN이 개최한 첫 <롤> 대회 'LOL 인비테이셔널'부터 e스포츠를 쭉 관람해 온 기자에게는 이번 롤드컵은 역대 최고라 평가할 만했다. 

수년이 넘는 기간 동안 쌓여온 선수들의 이야기. 10년 간 롤드컵에 도전해 끝끝내 모두가 불가능할 것이라 평가했던 대회에서 우승한 데프트, 포기하지 않고 '롤드컵 4회 우승'이라는 타이틀에 도전한 '불사 대마왕' 페이커, 그를 가로막은 '롤도사' 베릴, 마지막으로 꿈을 향해 도전한 모든 선수까지. 매 순간마다 사람의 이야기가 있었고, e스포츠 역사에 회자될 만한 명경기가 나왔다.

그만큼 이번 롤드컵은 많은 의미를 가지리라 생각한다. e스포츠가 진정한 스포츠로 도약했다는 대표적인 증거이자, 게임도 사회 전반에 긍정적 메시지를 남길 수 있는 문화이자 예술임을 증명했다. '세계 최고'를 향해 노력한 LCK 사무국과 프로 구단 관계자들, 코치와 감독, 해설진을 포함한 방송 관계자들의 노력 역시 헛되지 않았다. 2022 롤드컵에선 모두가 주역이었다.

그렇기에 이번 롤드컵은 이 한 줄로 요약할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이, 리그 오브 레전드다"

 

(출처: 라이엇 게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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