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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기자수첩] 허경영의 엡실론 프로그램

우티 (김재석 기자) | 2021-12-06 17:2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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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세출의 오픈월드 게임 <GTA 5>에는 흥미로운 사이드 미션이 있다. 주인공 중 한 사람인 마이클은 우연히 '엡실론 프로그램'을 만나는데, 플레이어 선택에 따라서 마이클은 엡실론 열혈 신자가 될 수 있다. 

어느 날 인터넷에서 심리테스트를 한 마이클은 '성취감을 느끼지 못하며, 우울하다'는 결과를 받는다. 파탄에 이른 가정과 은행 강도 트라우마로 불안정한 마이클은 결과에 공감하며, '행복을 찾고 자유로워진다'는 엡실론의 메시지에 이끌린다.

플레이어가 보기엔 허튼 수작에 불과하지만, 마이클은 순순히 사이비 종교 엡실론에 수백에서 수천 달러를 기부하고, (차 도둑 게임이라는 설정에 알맞게) 교단의 지시에 따라 슈퍼카를 훔쳐서 바친다. 교인들과 비이성적이며 비과학적인 대화를 주고받으며 마이클의 의심은 확신이 되어가고, 급기야 25,000달러를 내고 청색 로브를 구입한 뒤 열흘간 그 옷을 입고 생활하기도 한다. 

여러 날에 걸쳐 기상천외한 지령을 따른 끝에 마이클은 진정한 엡실론 신자로 거듭난다. 그리고 마지막에 마이클은 진실한 신도가 되어 교단의 자금 세탁을 도와주고 '내면의 평화'를 얻을 수 있다. 아니면 엡실론이 사이비임을 깨닫고 로켓을 쏴서 헬기를 터뜨리고, 경호원들을 모두 사살해서 그간 바친 돈보다 훨씬 큰 돈을 벌게 된다. 어느 쪽이든 마이클은 사이비 종교에 돈과 시간을 갖다 바쳐야 한다.

 

 

'엡실론 프로그램'은 <GTA 5>에서 꽤 긴 분량의 사이드 미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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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일, SBS <그것이 알고 싶다>(그알)에서는 '허경영하늘궁'의 실체를 공개했다. 유명인사 허경영은 자신을 '신인'(神人)이라고 부르며 양주 장흥면 일대에 하늘궁을 건설했다. 현생에서는 병을 낫게 하며, 내세에서는 천국 위의 '백궁'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이 허경영의 이야기다. 그의 말을 조금 더 들어보면, 자신은 도탄에 빠진 대한민국을 구하기 위해 이 땅에 내려왔으며, '33 공약'과 함께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

종교법인 허경영하늘궁은 매출 97억에 영업이익 95억을 신고했다. 운영 비용이 사실상 들지 않는 사업이다. 허경영하늘궁에서는 허경영의 축복, 백궁 명패는 물론 '초우주 에너지' 상품 등을 판매 중이다. 허경영 스티커를 구매해 집안 곳곳에 붙이면 효험을 본다는 설명도 함께.

<그알>에는 허경영의 말을 믿고 3억 2000만 원 대출을 받은 가족 이야기와, 1억을 내고 하늘궁의 '대천사' 작위에 오른 노인들을 비춘다. 허경영을 따르기 위해 없는 살림에 빚을 내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다.

 

"축복은 백만 원 1억 되면 대천사" (출처: 그알 유튜브)

허경영은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1년 6월의 징역을 살았고, 출소한 이후 노년층을 대상으로 강연을 하다가 종교의 옷을 입었다. <그알> 속 허경영과 하늘궁은, 사이비 교주가 테마파크를 운영하며 돈과 영향력을 쌓아간다는 타이쿤 게임 <허니, 아이 조인드 어 컬트>를 방불케 한다.

 

기자의 모자란 필설로는 하늘궁의 정체를 다 옮길 수 없으므로 관심이 있다면 시간을 내어 방송을 한 번 보길 바란다. 제작진은 허경영을 모셨다가 등을 돌린 사람들도 만났는데, 피해를 호소하는 사람들은 땡전 한 푼 돌려받지 못했다.​ 게임이라면 로켓런쳐를 발사해 뜨거운 복수를 할 수 있겠지만, 현실은 도저히 그럴 수 없다.

 

양주시 장흥면에 위치한 허경영하늘궁. <그알>에서는 신자들이 일대 땅을 매입하고 있다는 말이 나온다. (출처:허경영하늘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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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허경영은 종교인보다는 정치인으로 익숙하다. 그는 2019년 창당한 국가혁명당의 명예대표로 일찌감치 20대 대선 후보로 추대받았다. 기자 또한 지난 주말 그 유명한 '허경영 전화'를 받았다. 허경영은 정치 인생의 8번째 출마를 앞두고 있다. 그는 단 한 번도 당선된 적 없이 밈(Meme)의 영역에서 소비되었지만, 최근 그 성장세는 '밈 주식'처럼 거세다.

객관적인 지표만 봐도 국가혁명당은 놀라운 조직과 돈을 갖추고 있다. 지난 총선에서 1,000명의 예비후보자를 등록시켰고, 최종적으로 235개 지역구에 후보를 냈다. 그중 여성 후보는 77명으로, 국가혁명당은 선관위로부터 8억 상당의 여성추천보조금을 받았다. 그렇게 총선에서 국가혁명당은 20만 표를 넘게 받았다. <그알>에서는 하늘궁의 지시를 받고 지역구에 출마한 사실을 고백하는 노부부도 볼 수 있다.

최근 여론조사 기관들은 애써 질문지에 허경영을 넣지 않고 있지만, 지난 25일 한 기관이 실시한 가상 대결에서 허경영의 대통령 지지율 4.7%를 기록해 3위에 올랐다. 만약 허경영의 지지율 5%가 넘어가면, 선거법에 따라 그를 양대 후보와 함께 토론회 테이블에 앉혀야 한다. 참고로 허경영은 지난 서울시장 보궐선거에도 출마해 52,107표를 얻으며 3위를 기록했다.​

(출처: 아시아리서치앤컨설팅)

 

헌법은 종교와 정치를 구분하고 있지만, '신인' 허경영은 창당 이후 아무런 문제 없이 정치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그알>에는 허경영이 증산도 계열의 종교법인을 인수해서 종정에 오른 사실도 나온다. 그는 종정이면서, 신인이면서, 수십억의 영업익을 거두는 사업가면서, 최소 20만 표는 확보할 것으로 기대되는 정치인이다.

기자는 이런 게임이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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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비 종교 연구의 권위자 탁지일 교수는 <그알>에 출연해 "종교가 정착할 수 있는 조건은 '5P'가 있는데, 신격화된 교주, 독창적인 교리, 계획, 환경을 적절하게 활용하는 생존능력, 거점의 확보다. 한국에서 나타난 사이비 종교를 보면, 하늘궁 같은 거점은 마지막에 나타나는데, 이 짧은 시간에 허경영은 다 갖췄다"고 분석했다.


이제 허경영은 정치화된 종교인이면서, 동시에 종교화된 정치인이다. 기자는 개인적으로 누가 차기 대통령이 되는지보다 이렇게 영역을 넓혀가는 회색 제3지대를 훨씬 걱정하고 있다. 적지 않은 어르신들이 '허경영하늘궁 초종교'에 푹 빠졌고, 하늘궁에서는 '허경영 대통령'을 주문으로 학습시키고 있다. 그리고 몇몇 노인들은 빚을 내서 허경영을 돕기에 이르렀다. 투표일 허경영을 찍는 누군가는 재미로 표를 던지는 게 아니라, 신인에게 자신의 권리를 행사한다고 믿고 있을 것이다.

대만산 호러 게임 <환원>은 사이비 종교에 빠져 고통받는 어느 가정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자고관음'이라는 부처를 전파하는 무당이 한 가정에 민간요법으로 딸의 병을 낫게 해주겠다며 접근했다가 사고를 치는 내용이다. 야밤에 집에서 <그알>을 보던 기자는 하늘궁 신도들 냉장고의 허경영 스티커가 <환원>의 뱀술처럼 기능할까 봐 소름이 돋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허경영의 엡실론 프로그램은 잘 굴러가고 있다. <그알> 방송 직후 허경영은 "악의적으로 편집한 방송을 그대로 믿으면 바보"라고 응답했다.​

(출처: 허경영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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