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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RPG가 다시 성공할 수 있었던 여섯 가지 이유

사랑해요4 (김승주) | 2024-02-23 13: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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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RPG는 죽었다.

한때 이런 말이 오가던 시기가 있었다. 그 말이 정말로 사실인가와는 관계없이, JRPG, 나아가 일본 게임 모두를 두고 "낡은 게임"이라고 하던 때가 있었다. 2000년대 후반 ~ 2010년대 초반의 분위기였다. 게이머들은 일본 게임이 '갈라파고스화'됐으며, 과거의 영광을 되찾을 수 없으리라 수군댔다. 'JRPG가 고쳐야 할 점 10가지'라는 해외 게임 매체의 칼럼이 유행하기도 했다. 

유명 인디 게임 개발자 ‘필 피쉬’는 GDC 2012 현장에서 "당신들(일본) 게임은 구려요"(It sucks)라는 발언을 해 화제를 몰았다. 지금이야 해당 발언이 무례했다며 인터넷에서 비판받고 있지만, 당시에는 사이다라며 공감을 표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이런 분위기는 어느 순간 사라졌다. 아마 좋은 게임이 많이 나왔던 2010년대 후반부터일 것이다. 나아가 2024년에는 연초부터 여러 타이틀이 단기간에 밀리언 셀러를 달성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이제는 글로벌에서 더 잘 나가는 <용과 같이 8>이 최단 시간 100만 장을 달성했다고 밝혔고, 본래 해외에서 좋은 평가를 받던 <페르소나 3 리로드>도 비슷한 성과를 냈다. 사이게임즈의 첫 콘솔 타이틀인 <그랑블루 판타지 리링크>가 출시 11일 만에 100만 장을 판매하기도 했다.

이제 JRPG는 낡았고, 글로벌 트렌드에서 뒤처졌다고 말하면 반대로 돌을 맞는 시대가 왔다. 한물갔다는 평가를 받았던 JRPG가 반전에 성공한 이유는 무엇일까? JRPG는 정말로 몰락했던 장르일까? 애초에, 왜 사람들은 RPG라는 장르에 J(Japanese)라는 접두어를 굳이 붙여 비교하는 걸까? 

최근 스팀에서 판매 중인 JRPG 게임들. 대부분이 매우 긍정적 이상 등급을 유지하고 있다.


# JRPG라는 단어는 어디서 나왔는가?

JRPG라는 단어에 대한 명확한 기원은 없다. 칼럼에서 소개하는 내용은 하나의 추측임을 알아주길 바란다.

일본에서 나온 모든 게임을 두고 우리는 J라는 접두어를 붙이지 않는다. 일본에서 만들어진 FPS를 두고 'JFPS'라고 칭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일본에서 RPG가 나오면 우리는 JRPG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단어를 통해 설명이 없어도 머리 속으로 어떤 스타일인지 쉽게 상상한다. 미소년과 미소녀 주인공, 동료와의 유대를 강조한 스토리, 세계(세카이) 지키기, 턴제 전투 시스템 등이 있다.

일본에서 나온 RPG를 모두 JRPG라고 통칭하지는 않는다는 점도 생각해 봐야 한다. <다크 소울> 시리즈가 일본에서 만들어졌다고 "<다크 소울>은 JRPG"라고 말하면 공감하는 게이머는 많지 않을 것이다. 흔히 JRPG를 생각하면 상상되는 시스템이 <다크 소울> 시리즈에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다크 소울>은 그 거대한 영향력으로 인해 '소울라이크'라는 새로운 장르를 구축했다.

JRPG는 재패니즈 롤 플레잉 게임인데, 일본에서 만들어진 <다크 소울> 시리즈는 JRPG가 아니라고 하는 사람이 더 많다.
사람마다 JRPG에 대한 관점은 다른 편이다. 애니메이션풍 그래픽이 들어가면 무조건 JRPG라고 생각하는 게이머도 있다.

여러 칼럼을 살피면 RPG라는 장르가 서양과 일본에서 독자적으로 발전해 왔다는 점을 이유로 꼽고 있다. 가령 FPS는 서구권에서 발전해 동양으로 전파됐고 (<둠> 시리즈), 플랫포머 장르는 동양권에서 발전해 (<슈퍼 마리오> 시리즈) 서구권으로 전파됐다. 그러나 RPG라는 장르는 한쪽이 다른 한쪽으로 영향을 끼치는 대신, 서로가 만나기 전부터 독자적으로 발전해 왔기에 상반되는 스타일을 구축했다는 것이다.

서구권 RPG(WRPG)는 <던전 앤 드래곤>과 같은 TRPG에서 강한 영향을 받아 발전했다. TRPG는 오프라인에서 사람들이 테이블 위에 모여 대화하고, 각자가 만든 역할을 연기(롤플레잉)하는 게임이다. 이런 게임에서는 플레이어 스스로가 캐릭터를 디자인하고,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것이 중요하다. WRPG의 틀을 잡은 <울티마>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일본에서 RPG 장르를 유행시킨 것은 <위저드리> 시리즈다. 여기서 영향을 받아 자체적인 해석을 덧붙인 게임이 우후죽순 쏟아져 나오고, 1980년대 여러 자체 제작 컴퓨터를 만들거나 콘솔 기기를 유통하는 일본의 기술력이 합쳐져 그래픽을 중요시하는 기조가 합쳐졌다. 

일본에서 RPG를 조금 더 대중적인 영역으로 끌어올리고 수많은 JRPG에 영향을 준 <드래곤 퀘스트>의 특징도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드래곤 퀘스트>는 아이들에게도 통할 수 있도록 텍스트보다는 그래픽을 강조하고, 플레이어가 목적을 스스로 찾는 대신 꾸준히 힌트를 줘 정해진 길을 따라갈 수 있도록 함으로써 RPG의 진입 장벽을 낮추고 대중성을 확보해 대흥행했다.

자연스레 일본의 RPG는 자신만의 이야기보단, 정해진 스토리 속에서 연출과 스토리를 즐기는 구조로 흘러갔다. 당시 거품 경제가 정점에 달했던 시기이기에 일본이 독자적인 규격을 가진 PC를 만들고 사용해 왔다는 점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위저드리>

이렇게 서로 단절된 환경 속에서 WRPG는 플레이어가 스스로 써 가는 스토리를, JRPG는 정해진 틀 속에서 스토리를 따라가는 것을 중요시하게 됐다. 같은 RPG라도 서로가 지향하는 점이 달랐다. 똑같이 중세 시대를 배경을 공주와 왕자, 용이 등장해도 WRPG와 JRPG이 주는 느낌은 크게 달랐다. 당시에는 인터넷 환경이 지금처럼 발전하지 않았기에 교류도 적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일본의 RPG가 선별적으로 서구권 시장에 진출하기 시작하면서, 이를 접한 서양의 RPG 마니아들에게 일본의 RPG는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자신들이 생각하는 RPG의 특징과는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다. 나아가 RPG라고 불러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도 있었을 것이다. 단어가 처음 사용된 것도 이 시기쯤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초기 승자는 JRPG로 보였다. 당시 기준으로 화려한 그래픽과 컷신, 서사를 내세운 AAA급 JRPG에 게이머는 열광했다. 1997년 출시된 <파이널 판타지 7>이 대표적이다.

<파이널 판타지 7>


# 왜 JRPG는 몰락했다는 이야기가 나왔는가?

JRPG는 2000년대 들어 꺾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이전처럼 더 이상 일본에서 나온 RPG를 좋아하지 않았다. 장르의 발전이 더디다는 점이 컸다. 절치부심한 WRPG는 여러 장르를 결합시키며 어떻게 플레이어에게 서사를 더 잘 전달할지에 대해 집중하고 발전하며 전성기를 맞았다. <엘더스크롤 3: 모로윈드>, <네버윈터 나이츠 2> 등 여러 명작 게임이 밀리언 셀러 등극에 성공했고, 그 중에서도 가장 화려한 전성기를 누린 게임 개발사는 바이오웨어다.  <매스 이펙트>에서는 SF와 3인칭 슈팅, RPG를 결합하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반대로, 글로벌 시장에서 밀리언 셀러 타이틀이라 할 만한 JRPG는 그다지 없었다. 애초에 <파이널 판타지> 시리즈나 <킹덤 하츠> 시리즈를 제외하면 서구권에서 성공했다고 말할 JRPG 타이틀이 별로 없었다. 일본 게임의 전성기 시절이라 하더라도 모든 JRPG가 글로벌에서 잘 나간 것은 아니었다. 

JRPG에 대한 비판이 대두되던 2010년경 <바이오하자드>로 유명한 개발자 '미카미 신지'는 인터뷰에서 "JRPG는 원래 서양에서 그다지 인기가 없었다고 생각한다"라며 "인기가 줄어든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인기가 없었다고 해석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미카미 신지 (출처: Xbox)

특히 본격적인 HD 그래픽으로의 전환과 게임의 온라인화, 오픈 월드 RPG의 유행에 JRPG는 따라가기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였다. <파이널 판타지 13>과 같은 대형 타이틀도 일본에서는 나쁘지 않았지만, 글로벌 시장에서는 평가가 크게 갈렸다. 

Xbox 360이 큰 성공을 거두고, PS3가 부진 속에 빠져들면서 위기론은 나아가 일본 게임 전반에 확산됐다. AAA 타이틀의 경우에는 차라리 사정이 나았다. 어줍잖게 글로벌 시장에 내던져진 AA 타이틀은 악성 리뷰의 조롱을 받는 경우도 있었다. 일본 게임 특유의 캐릭터 디자인이 비현실적이라며 조롱받는 경우도 흔했다.

유독 평가가 크게 갈렸던 <파이널 판타지 13>

당시 분위기를 잘 표현하는 IGN의 대표적인 외부 칼럼 'JRPG가 고쳐야 할 점 10가지'에 언급된 문제점은 다음과 같다.

10. 여기 사람은 살고 있니? -> 딱딱한 NPC와 생동감이 없는 세계관


9. 플레이 타임은 제대로 늘려라 -> 노가다와 파고들기(야리코미)를 요구하는 시스템에 대한 비판


8. 연출에 투자 좀 하자 -> 캐릭터 포트레이트와 대화문을 띄우는 고전적인 대화 연출에 대한 비판


7. 자유도 없는 맵 -> 일직선 진행에 대한 비판


6. 진부한 캐릭터 -> 개성이 없고, 항상 비슷한 캐릭터 디자인에 대한 비판


5. 성우 연기에 대한 접근 방법 -> 일본의 더빙 스타일을 현지화에 무리하게 적용한 것에 대한 비판


4. 플레이하다 보면 외로울 때가 많다 -> 멀티 플레이 요소의 부족함에 대한 비판


3. 세이브 포인트는 이제 그만 -> 특정한 장소에서만 세이브할 수 있는 부족한 편의성에 대한 비판


2. 새로운 스토리가 필요하다 -> 전형적인 스토리 전개에 대한 비판


1. 전투 시스템에 재미가 필요해 -> 항상 같은 턴제 전투 시스템에 대한 비판


이런 상황 속에서 몇몇 게이머는 JRPG가 '차별적인 의미'로 본격적으로 사용됐다고 주장했다. JRPG가 침체를 겪자, 개발자들과 게임 매체가 앞다투어 JRPG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일본 게임을 비판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가령 바이오웨어의 공동 창립자는 2009년 인터뷰를 통해 JRPG의 몰락은 발전의 부족 때문이며, 선택지에서 '아니오'를 골라도 결국은 '예'를 눌러야 스토리를 진행되는 방식이 JRPG의 나쁜 특성이라고 말했다. 

<파이널 판타지 16>의 프로듀서 ‘요시다 나오키’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파이널 판타지 16>을 홍보하기 위해 ‘스킬업’이라는 매체의 인터뷰에서 요시다 나오키는 “일본 개발자인 저희는 이 용어를 처음 들었을 때, 마치 이런 게임을 만든다고 놀림받는 차별처럼 느껴졌다”라며 “최근에는 JRPG가 좋은 의미를 갖고 긍정적으로 활용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부정적인 측면으로 활용되던 시절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고 말했다.

JRPG에 대한 부정적 기조가 확산되자 아예 몇몇 개발사는 서구권 개발사를 통한 외주 게임 개발을 통해 글로벌 게이머의 입맛을 맞추려 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영국의 닌자 시어리가 제작한 <데빌 메이 크라이> 시리즈의 리부트 작품 <DmC: 데빌 메이 크라이>가 대표적이다. 작중에서 주인공 '단테'의 디자인이 크게 바뀌었는데, 일설에 따르면 큰 디자인 변경을 요구한 것은 원작사인 캡콤이라고 한다.

<DmC: 데빌 메이 크라이>
단테의 디자인이 크게 바뀌어 논란이 있었다.


# 그럼에도 글로벌 시장으로 다시 나아가야 했던 JRPG

그럼에도 JRPG가 포함된 일본 게임에게 글로벌 시장은 반드시 공략해야 하는 곳이었다. 스퀘어 에닉스와 같은 대형 업체는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지만, 중소규모 개발사에게도 도전을 필요로 하는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글로벌에서 잘 되면 매출이 극대화되니 당연하겠지만, 아무래도 일본 콘솔 시장이 점차 줄어들고 있었다는 점이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측된다.

일본 콘솔 게임 시장은 2014년과 2015년 역성장했다. 2014년 출시된 PS4의 흥행세가 하향 안정화되는 모양새였고, 2017년에는 닌텐도 스위치의 출시로 인해 다시 본래의 매출 규모를 되찾긴 했지만, 내수 콘솔 시장이 정체된 모습을 보인 것이다. 유일하게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시장은 모바일 게임밖에 없었다. 모바일로 완전히 전향하는 것이 아니라면 과포화된 내수 시장에서 글로벌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이 시기 기존에는 글로벌 시장을 잘 신경쓰지 않았던 일본 게임사가 스팀에 자사의 기존 타이틀을 출시하며 실험하는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스팀에 게임을 출시하면 기존에 패키지를 해외 시장에 내놓는 것보다 유통 부담이 적다는 점도 메리트있게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2017년은 <배틀그라운드>가 스팀에서 흥행하며 세 달 만에 매출 1억 달러를 달성하는 신화를 써내던 시기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JRPG는 어떻게 비판을 이겨내고 글로벌 진출에 성공했을까?

(출처: 한국콘텐츠진흥원)


# JRPG가 다시 성공할 수 있었던 여섯 가지 이유

1. 그래픽과 연출 퀄리티의 상승

그래픽과 연출력이 부족하다는 비판에 일본의 개발자들이 눈과 귀를 막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기존에도 좋은 기술력을 가지고 있었던 캡콤과 스퀘어 에닉스의 경우에는 현세대 게이머의 눈높이를 맞출 만한 게임을 다수 선보였다. 캡콤의 <몬스터 헌터 월드>가 대표적이다. 기존에 자리를 잡았던 휴대용 콘솔 기기에서 탈피해 놀라운 퀄리티의 3D 그래픽 기술력을 선보인 <몬스터 헌터 월드>는 세계적인 흥행에 성공했다.

AA급 게임들도 이제 그래픽 면에서 뒤떨어진다고 말할 수 없다. 사람들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하는 리얼한 그래픽까지는 아니더라도, 노하우를 살려 JRPG 특유의 아트 스타일을 잘 살려내는 그래픽을 선보이고 있다. 언리얼 4로 전환한 <테일즈 오브 어라이즈>가 대표적이다. <테일즈 오브 어라이즈>는 캐릭터의 인체 비율을 조정해 보다 현실감있게 바꾸고, 수채화풍의 그래픽을 선보이는 ‘애트모스 셰이더’ 개발에 집중했다. 기존에 애니메이션이나 일러스트로 표현되던 컷인이나 UI는 3D로 모두 바꾸었다.

<테일즈 오브 어라이즈>

<테일즈 오브 베르세리아>의 UI와(상단) <테일즈 오브 어라이즈>의 UI
토미자와 프로듀서는 비주얼 변화를 위해 애니메이션이 사용됐던 곳을 조사해
일러스트와 3D로 교체했다고 지스타 강연에서 밝혔다.

화려한 UI를 통한 연출력으로 그래픽의 아쉬움을 덮어 버린 케이스도 존재한다. 아틀라스의 <페르소나 5>가 대표적이다. 각 캐릭터의 대화는 일러스트를 출력하고 화면 하단에 대화문을 띄우는 고전적인 방식이지만, 특유의 UI 연출 덕분에 지루함을 느끼기 어렵다. 

전투에서도 버튼을 전환할 때마다 나오는 연출을 통해 턴제 전투에서 오는 지루함을 경감했으며, 적들의 약점을 모두 찔러 무너트렸을 때 발생시킬 수 있는 ‘총공격’ 연출은 플레이어에게 승리했다는 쾌감을 주는 동시에 <페르소나> 시리즈의 아이덴티티로까지 발전했다.

전투 진입 연출과 인물의 대사, 스타일리시한 UI 등을 통해
<페르소나> 시리즈는 턴제 전투가 게임의 흐름을 끊는다는 느낌 없이, 술술 이어지는 듯한 느낌을 준다.
말로는 표현하기 어렵지만, 원작까지 즐긴 입장에서는 정말로 노하우가 많다고 느껴졌다.

2. 시스템의 발전

시스템적인 발전도 주목할 만하다. 턴제 시스템을 차용했다고 해서 반드시 '너 한 대, 나 한 대'의 구조를 과격하리만치 고수한 것은 아니다. 가령 행동 횟수를 부여받고, 결과에 따라 행동이 늘어나거나 줄어드는 '프레스 턴'이라는 독특한 시스템을 도입했던 <진 여신전생> 시리즈가 있다. 

<페르소나> 시리즈에는 크리티컬을 띄우거나 적의 약점을 공략하면 턴을 한 번 더 주는 '원 모어' 시스템으로 간편화되어 들어갔고, 이후 보다 원활하게 약점을 공략할 수 있도록 아군과 턴을 교대하는 '시프트' 시스템을 추가하거나, 적을 모두 행동 불가 상태로 만들었을 때 발생하는 '총공격' 시스템과 같은 연출과 이어지도록 하기도 했다. 

시리즈 7편에 들어 갑자기 라이브 액션에서 턴제로 시스템을 바꾼 다음 '라이브 커맨드 배틀'을 표방했던 <용과 같이> 시리즈는 또 어떤가. <용과 같이 7>에서는 화려한 연출과 호쾌한 시각 효과로 타격감을 끌어올리며, 부분부분 삽입된 개그 요소로 지루함을 상쇄하려 시도했다. <용과 같이 8>에서는 라이브 커맨드 시스템을 더욱 끌어올려 "턴제지만, 턴제 같지 않다"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용과 같이 8>

그 외에도 기존의 틀을 고수하면서도 새로운 재미를 주려 여러 시스템을 추가한 JRPG를 나열하면 끝이 없다. 개중에는 WRPG의 영향을 받아 비선형적인 스토리를 선보이려 한 작품도 존재하고, JRPG끼리 영향을 주고받으며 새로운 아이디어를 발전시켜 나가는 경우도 있다. JRPG라고 해서 반드시 턴제고, 일직선 스토리만 강조하는 것은 아니다.

JRPG의 대표주자로 여겨지는 <드래곤 퀘스트> 시리즈도 넘버링이 진행될 때마다 작지만 큰 변화를 알게 모르게 시도하고 있다고 팬들이 입을 모아 이야기하곤 한다. 외전격인 <드래곤 퀘스트 빌더즈>에서는 <마인크래프트>와 같은 크리에이팅 요소가 가미된 액션 RPG라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드래곤 퀘스트 빌더즈: 아레프길드를 부활시켜라>
스팀에도 2024년 2월 14일 출시됐으니 참고하시길

3. 편의성의 향상

이전부터 게이머를 괴롭혀 온 JRPG의 ‘불합리함’이 사라지고 있다. 맵에 위치한 세이브 포인트에서만 저장할 수 있다거나, 의도적으로 약한 상태에서 강한 적을 격파해야 도전 과제 트로피를 줌으로써 ‘야리코미’ 플레이를 권장하는 듯한 모습은 이제 잘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원하는 메뉴나 장소 등으로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다양한 숏컷 시스템을 추가하고, 게임 초반부에는 특정한 상황마다 게임 시스템을 설명해 주는 별도의 설명문이 계속해서 출력되는 등 플레이어에게 ‘떠먹여 주는’ 수준으로 편의성에 집착하는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JRPG의 고질적 문제였던 스토리 면에서도 편의성 기능을 통해 조금이나마 플레이어의 불편함을 덜려는 모습이 보이고 있다. ‘용어 사전’과 같은 시스템이 대표적이다. 플레이어가 대화를 나눌 때 세계관만의 고유 명사가 등장하면 별도의 색깔을 입혀 특정한 뜻을 가진 단어임을 명시해 주고, 버튼 한 번만 누르면 대화 중에도 즉시 도감 페이지로 이동해 설명을 볼 수 있도록 하는 식이다.

고유 명사의 경우 별도의 색깔로 표기하고, 대화 도중에도 즉시 사전을 통해 설명을 볼 수 있도록 하는 경우가 흔해졌다.

<파이널 판타지 16>은 이야기 흐름을 놓치지 않도록 정말 다양한 장치를 구비했다.

글로벌 시장을 노리기 위해 턴제에서 보다 많은 사람이 선호하는 액션 시스템으로의 변화를 꾀하면서도, 과거 턴제 시절의 게이머를 위한 배려도 잊지 않고 있다. 어시스트 시스템이 대표적이다. 시리즈의 최신작은 즐기고 싶지만 액션에는 어려움을 겪는 게이머를 위해 버튼 몇 개만 조작해도 캐릭터가 화려하게 전투를 즐기는 모습을 관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파이널 판타지 16>의 경우에는 플레이어가 어시스트 시스템을 커스터마이징해, 회피는 자동으로 발동되지만 공격은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등 플레이어의 입맛에 맞게 어시스트 시스템을 설정할 수 있도록 하는 모습을 보였다.

4. 적극적인 현지화

게임 개발 단계부터 해외 시장을 고려한 현지화 작업도 이어지고 있다. JRPG가 비판을 받던 시절 주로 지적받은 문제점 중 하나는 엉터리 번역이었다.

동시 출시에도 신경쓰는 모습이다. <페르소나 5>는 일본에 먼저 출시된 뒤 순차적으로 글로벌 시장에 출시됐지만, <페르소나 3 리로드>는 전 세계 동시 출시됐다. RPG 장르에서 특정한 지역에 먼저 출시된다는 것은 스포일러 등의 문제로 인해 기대감을 감소시킬 수 있다.

현지의 정서에도 신경쓰고 있다. 글로벌 시장에서 예상치 못한 논란을 발생시킬 수 있는 농담이나 이벤트는 개발 단계부터 현지 담당자가 검토할 수 있도록 해 수정하는 것이다. 캐릭터의 노출도를 줄이고, 성 소수자를 우스꽝스럽게 묘사하는 개그는 해외에서 비판받을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 게임에 넣지 않는 모습도 늘어나고 있다. 가령 <페르소나 3 리로드>는 원작 <페르소나 3>에 있던 트렌스젠더 농담을 수정했다.

일본 매체 '더 재팬 타임즈'의 인터뷰에서 <용과 같이>의 수석 PD '요코야마 마사요시'는 "처음 <용과 같이> 시리즈를 개발할 때 일본에선 평범하다고 여겨진 표현들이 오늘날엔 허용되지 않는다"라며 "대본을 쓰면 유럽과 미국의 담당자들에게 먼저 검토를 요청한다. 그리고 현지에서 용인되지 않는 내용을 발견하면 알려 준다"라고 했다.

계속해서 현지화 노력이 이어지면서 실력 있는 성우를 기용하는 등 전반적인 더빙의 수준도 상승한 것으로 보인다. 영미권 게이머는 일본 게임을 즐기더라도 음성은 영어로 플레이하는 것을 선호하는 경우가 많기에 중요하다. <파이널 판타지 16>은 중후한 중세 유럽풍 판타지라는 점을 살려 영어 더빙을 일본어 더빙보다 먼저 만들기도 했다.

영미권 게이머에 따르면 일본 게임의 번역 문제가 꽤 심각했다고 한다.
사진은 오역으로 인해 커뮤니티에서 밈이 된 'All your base are belong to us'

5. 일본 문화에 대한 이해도 상승

코로나 시기를 거치며 일본의 여러 콘텐츠가 글로벌 성공을 거두고, 크게 성장한 OTT 서비스를 통해 퍼져나갔다는 점도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애니메이션 풍 게임에 대한 거부감이 이전보다 적어진 느낌이다.

소비자들이 이전보다 일본의 문화에 대해 이해도가 더욱 높아지면서 현지화 작업에도 긍정적인 영향이 생겨나고 있다. 반다이 남코의 한 현지화 담당자는 재팬 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사람들은 이제 ‘라멘’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더 이상 ‘누들 수프’라고 번역할 필요가 없다”고 언급했다.

또한, 일본의 문화에 대한 거부감이 적어지면서 전국 시대를 소재로 하거나, 일본의 전통문화 등을 소재로 한 게임이 글로벌에서 호평받는 경우도 늘어나고 있다. 일본어 고유 명사의 경우에도 비슷한 의미를 가진 단어로 번역하지 않고 음차 그대로 표기하는 사례가 늘어났다. 

6. JRPG는 팬을 배신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핵심은 JRPG가 변화를 꾀하면서도, 자신들의 색깔을 버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결국 이 모든 변화는 기존의 JRPG의 강점을 버리지 않는 단에서 이루어졌다. JRPG가 글로벌에서 덜 유행하고 WRPG가 글로벌에서 유행한다는 이유로, 글로벌 성공을 위해 WRPG의 요소를 무조건적으로 따라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2010년대 오픈 월드의 유행에 맞춰 모든 AAA급 JRPG가 비슷비슷한 오픈 월드 구조를 취하고 캐릭터 디자인을 서구권 취향에 맞추기만 했다면 지금의 반전은 없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JRPG는 팬들의 기대를 배신하지 않으려 노력한다(그래도 종종 팬을 화나게 하는 얄팍한 상술은 부리지만). 쇄신이라는 명분으로 기존 JRPG의 특징을 무조건 바꾸기만 했다가는 기존 팬층까지 크게 이탈하는 결과를 낳았을 것이다. 늘 JRPG의 디렉터는 최신작에 대한 인터뷰에서 변화된 시스템을 언급하면 “과거 팬들의 기대도 배신하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는 코멘트를 잊지 않는다. 

액션 어시스트 시스템부터 과거 턴제 게임을 즐기던 게이머가 액션을 무리 없이 즐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코어 게이머에게는 “어시스트 시스템을 통해 버튼 몇 번만 누르면서 게임을 깨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음에도 말이다.

코어 게이머의 입장에서 보면 액션 게임의 어시스트 시스템은 기절초풍할 일이기도 하다. 
방향키만 조작해도 게임을 클리어해 준다니!

“왕도적인 스토리가 무조건 나쁜가?”에 대한 의문도 있다. 최근의 JRPG가 여러 설정 면에서 변화를 주고 있지만, 결국 스토리의 전체적인 틀은 정통적인 클리셰를 따르고 있기에 뻔하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한다. 하지만 왕도적 혹은 정석적이라는 것은 그만큼 대중성이 담보되었다는 이야기다. 억지로 반전을 주고자 노력 끝에 히로인을 구출했더니, 갑자기 히로인이 등 뒤에서 칼을 꽂아 버리면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캐릭터의 죽음을 다루는 태도도 고찰할 만하다. JRPG는 대립하던 악역 캐릭터도 구태여 “이 녀석도 사실 좋은 녀석이었다”며 동료로 합류시키는 등 캐릭터의 죽음을 잘 표현하지 않으려 하기에 이야기가 질질 끌린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하지만, 그 대신 전작의 주인공을 갑자기 퇴장시키고 조롱하는 등의 모습은 절대 보여 주지 않는다. 캐릭터를 쉽게 소모하지 않고, 퇴장시키더라도 확실한 예우를 갖춘다는 이야기다.

선형적인 진행 방식도 무조건적으로 나쁘다고는 할 수 없다. 퇴근 후 게임을 잠시 간편하게 즐기는 데에는, 비선형적인 게임보다는 선형적인 게임이 더 즐기기 좋다.

왕도적인 스토리는 무조건 나쁜가?


# 게이머는 차갑다

칼럼을 통해 몰락했던 JRPG가 완벽히 부활했고, WRPG는 다시 몰락했다는 극단적인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한 때 세간에서 퇴보했다는 평가를 받은 JRPG가 어떻게 난관을 극복했는지 한 번쯤은 조명해 볼 만한 시점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애초에 JRPG, 나아가 일본 게임이 당시 정말로 퇴보했느냐에 대한 토론도 당시에 활발했다. 잠시 정체를 겪었을 뿐, 문화 콘텐츠의 발전 과정에서 자연스레 찾아오는 과도기적인 현상을 과장해 “몰락”이라고 표현했다는 주장도 있다. 베데스다의 <스타필드>가 실패했다고 해서 서구권 RPG나 오픈 월드 게임이 완전히 몰락했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은 없듯이 말이다. 더불어 JRPG를 선호하는 일본의 내수 시장은 여전히 탄탄한 편이기도 하다.

JRPG가 글로벌 게이머의 비판을 수용해 최근에야 변화했다는 주장도 논쟁을 부를 수 있는 이야기다. 이전부터 꾸준히 독특한 아이디어를 시도해 왔던 JRPG도 다수 존재하기 때문이다. 일본의 많은 기업이 회계연도를 3월에 마무리하는 만큼, 4분기 성과를 노리고 1~2월에 대작 게임이 다수 출시됐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최근 10년 간 JRPG에서 보인 변화의 흐름은 최근 글로벌 콘솔 시장을 노리는 국내 게임들에게도 좋은 이정표가 될 것이다. 게임 업계의 트렌드 변화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빠르다. 흐름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면 글로벌 게이머들에게 “낡은 게임”이라는 평가를 받고 처참히 실패할 수 있다. 게임 시장은 차갑다.

JRPG가 부활했다는 평가를 받는 와중, JRPG의 정점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파이널 판타지 7>의 두 번째 리메이크 작품이 출시된다는 점도 시기상 흥미롭다.
참고로 두 번째 리메이크 작품의 부제목은 '리버스'(부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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