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방학 두 달 동안 짧은 모바일게임을 만들어 보자!"
이것이 스튜디오 두달의 시작이었다. 2019년 12월 말, 스튜디오 두달 팀이 결성된 이후로 벌써 5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그 사이에 팀원들의 개인적인 상황도, 회사의 모습도, 첫 게임 <LAPIN>(라핀)에도 정말 많은 변화가 있었다.
두 달 동안 제작하려 했던 게임 <라핀>은 처음엔 모바일게임이었다가, 더 큰 볼륨과 콘텐츠를 목표로 하면서 PC게임으로 바뀌었다. 대학교 신입생이었던 초기 멤버분들은 그 사이 졸업반이 되었고, 스튜디오 두달은 작은 팀에서 개인사업자로, 법인 회사로 성장하며 열 명의 구성원분들과 함께하게 되었다.
'상상과 이야기의 힘을 믿는 인디게임 개발사'라는 다소 낭만적인 슬로건을 바탕으로 게임을 개발하며 5년이란 시간이 정말 빠르게 흘러갔다. 5년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다. 아직 모두가 만 30세 이하인 우리 회사에선, 나를 포함한 전체 구성원들의 인생의 약 1/6(혹은 그 이상)을 차지하는 시간이 5년이다. 그 사실을 고려하면, 우리 개발사에게 그 시간의 무게는 몹시 크다. 여전히, 게임 개발은 어렵다. 하지만 동시에 보람 있고 즐거운 작업이다.
우리보다 업력이 훨씬 길고 더욱 훌륭한 게임사도 물론 많지만, 우리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분명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스튜디오 두달이 그 동안 어떤 시간을 지나왔는지, 그리고 어떤 고민을 했고 어떤 문제를 해결해 왔는지, 특히 대학생 팀에서 시작해 재학 중인 기간이 길었던 만큼, 학생 팀에서 법인이 되기까지 어떤 차이와 도전들이 있었는지를 앞으로의 룩백 연재에서 담아 보려 한다.
게임을 좋아하시는 분들이, 그리고 게임을 개발하고자 하는 분들이 '이 회사엔 이런 비하인드가 있었구나' 생각하며 가볍고 즐겁게 읽을 수 있는 글이 되었으면 한다. /기고=스튜디오 두달 김민정 공동대표, 편집=디스이즈게임 김승준 기자
인생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고 하지만, 처음엔 이렇게 게임 개발을 업으로 삼게 될 것이라 상상하지 못했다. 오랫동안 소설을 쓰는 것을 좋아했고 영화에도 관심이 많다 보니, 막연하게 소설가나 영화감독이 되려나 싶었다. 지금은 어쩌다 보니 책을 만드는 작가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게임 회사를 운영하는, 취미로 소설을 쓰는 게임 개발자가 되어 있다.
나는 스튜디오 두달의 공동대표로, 디렉팅과 시나리오 라이팅을 맡고 있다. 스튜디오 두달은 '상상과 이야기의 힘'을 믿는다는 슬로건을 바탕으로, 내러티브의 힘을 중시하는 회사다. 이러한 특징을 가진 우리의 결성 계기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이 디렉터의 창작에 대해 잠깐 언급하는 것이 필요해 보인다.
초등학생 때부터 소설 쓰는 것을 좋아했다. 지금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쥬니버네이버 동물농장엔 '도서관'이 있었다. 도서관엔 누구나 소설을 올릴 수 있었는데, 그 중 많은 인기를 얻은 글은 동물농장 도서관 장서로 별도의 페이지에 등록되었다. 여기에 직접 쓴 글이 선택되었고, 글에 달린 댓글들을 확인하며 얼마나 즐거웠는지 모른다.
그 이후로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중학교 3학년 때까지, 인터넷 사이트에 2개의 판타지 장편 소설을 연재했다. A4로 환산하면 각각 200장, 400장 정도의 분량이었다. 연재 과정에서 많은 댓글이 달렸고, 팬들이 생겼다. 감사하게도, 그때부터 지금까지 글을 읽어주는 분들도 계신다. 이때부터 거대한 세계관을 짜는 것과 그것을 긴 호흡의 장편 소설로 풀어내는 것, 독자분들과의 소통에 익숙해졌다.
각 회차를 읽고 남겨주시는 독자분들의 댓글은, 오랜 시간 동안 장편 소설을 쓸 수 있게 하는 큰 동력이 되었다. 이후로 고등학생 때도 여러 문예 부문에서 수상했고, 대학교 재학 중 백마문학상, 계명문학상, 대학문학상 단편소설 부분에서 수상하며 꾸준히 소설을 썼다. 영화에 대한 관심으로 감독을 맡아 독립영화를 찍고, 영화 시나리오를 쓰기도 했다.
하지만, 그 사이에서 하나 놓친 게 있었다. 소설 창작과 영화는 어른이 된 이후로도 꾸준히 해왔기 때문에 오랫동안 추구했던 것이라 생각했지만, 돌이켜보면 어렸을 때 글이나 영화만큼이나 게임도 정말 좋아했다는 것을 말이다.
어렸을 땐 플래시 게임이 유행했고, 나 또한 너무나 즐겁게 플레이했다. 어떻게 플래시 게임을 만들 수 있는지 알아보다, 왜인지 갑자기 '파워포인트'로 게임을 만들어보겠다는 생각을 했다. 도형들을 조립해 캐릭터를 만들고, 하나 하나 애니메이션 기능으로 움직여 스토리 연출을 했고, 하이퍼링크 기능을 활용해 간단한 포인트 앤 클릭 타이쿤 게임을 만들었다. '붕어빵 굽기'를 누르면 붕어빵이 구워지고, 손님을 클릭하면 돈이 올라가는 형태였다.
파워포인트엔 특정 구간에 마우스를 올리면 특정 슬라이드로 넘어가게 하는 기능이 있었고, 그것을 활용해 장애물을 피해 정해진 구간으로만 심혈을 기울여 마우스를 움직여야 하는 게임을 만들기도 했다.(이렇게 만든 게임의 플레이는 동생의 몫이었다) 초등학생 때 만든, 이 파워포인트 게임들은 너무 오래되어 현재는 원본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 정말 아쉽다. 파워포인트가 게임 만드는 프로그램이 아니라 발표에 사용하는 것이란 걸 알게 된 건 꽤 오랜 후였다.
한편, 노트에 하나하나 손 그림으로 장비 상점과 물약 상점, 던전 등을 그려 종이책으로 플레이하는 게임을 만들기도 했고(이 또한 동생이 유저였다), 선택지 분기점이 존재하는 만화를 그려 친구들에게 플레이를 시켜보기도 했다. 반 친구들이 책을 돌려가며 읽고, 책 맨 앞장과 뒷장에 포스트잇으로 여러 후기를 한가득 붙여준 것이 기억난다.
하지만 게임을 '만들었던' 것은 까마득한 초등학생 때가 끝이었다. 이후론 당시 유행했던 온라인 게임들에 빠져 살았고, 성인이 된 이후에도 게임을 하는 것만 좋아했다. 대학생 때는 <하스스톤>을 6년 내내 했고, 학내 <하스스톤> 대회에도 참가했다. 그래서인지 창작하는 직업이라면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게임 개발자'가 될 줄은, 그것도 업으로 삼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 같다.
재학했던 대학교엔 '정보문화학과'라는 학과가 있다. HCI(Human-Computer Interaction), AI 리터러시, 코딩, 앱 제작, 데이터 분석, 영화 이론 등에 대해 배울 수 있는 다소 창조적인 학과다. 입학할 땐 들어갈 수 없고, 연계전공으로 선택해 복수 전공할 수 있는 곳이다. 글을 좋아했던 경험을 따라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했고, 자연스럽게 정보문화학과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하지만 과제를 하느라 밤을 새는 것이 일상인 힘든 학과라는 소문에 다른 학과들을 전전하다, 결국 4학년이 되어서야 정보문화학과 복수전공을 결심하게 됐다.
그렇게 마주한 수업들은 걱정과는 달리 정말 만족스러웠다. 팀 프로젝트들은 모두 힘들지만 재밌었고, 함께 노력해 하나의 멋진 결과물을 만들어낼 때면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그렇게 챗봇과 몇몇 게임, 단편영화들을 만들었다. 그 중 게임을 만드는 수업들에서, 소설과 영화에 빠져있던 동안 잊고 지냈던 '게임 만들기'의 재미를 다시금 알게 됐다.
소설은 혼자 글을 쓰는 작업 시간이 길어 조금 심심할 때가 있었다. 영화는 촬영 과정에서 겨울엔 동상이 걸릴 정도로 춥고 여름엔 너무나 더웠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한 씬을 찍기까지, 그 전의 사전 준비 과정까지, 정말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특히, 공들여 씬을 찍는 중에도 예상치 못한 돌발상황이 다양하게 발생한다.
하지만, 게임은 그렇지 않았다. 상대적으로 게임은 개발 과정에서 오는 육체적 피로가 적었고, 주변 상황을 통제하지 않고서도 만들 수 있었고, 무엇보다 게임을 즐기는 플레이어들의 반응이 즉각적이고 실시간이었다. 한 학기의 과제를 전시하는 과제전에서 다른 학생들이 우리 게임을 플레이하는 모습을 보며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특히 일방적으로 읽거나 보는 것이 아닌, 플레이어들의 선택으로 향유하는 콘텐츠의 방향이 약간씩 달라지고, 각자 다른 진행도와 결말을 볼 수 있다는 점도 무척 매력적이었다. 그러니까 게임은, 소설과 영화와 달리 플레이어가 플레이 과정에서 본인의 의지에 따라 다양한 선택을 내리고, 그 선택에 따라 모두가 조금씩 다른 감상을 얻어갈 수 있어 상당히 매력적인 장르라고 느껴졌다.
'정보문화기술입문'이라는 수업의 기말 팀 프로젝트에서, 우리 팀은 은퇴 위기에 처한 노쇠한 산타가 되어 아이들에게 선물을 가져다 주는 게임을 만들었다. 아이들이 삐뚤삐뚤한 글씨로 쓴 편지를 해석하여, 그들이 어떤 선물을 원하는지 파악해, 화면에 있는 선물 중 하나를 골라 루돌프 마차로 옮기는 게임이다. 선물을 잘 옮기면 은퇴하지 않을 수 있고, 실적이 좋지 않으면 은퇴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어떻게 하면 더 재밌는 과제를 만들 수 있을까 생각하다, 모션 캡처를 사용해보기로 했다. 플레이어가 붉은 장갑을 끼고 현실에서 움직이면, 화면이 빨간색을 인식해 게임 속에서 물건이 옮겨지는 것을 구현했다.
당시 팀 프로젝트를 함께 했던 이규원 프로그래머(현 이규원 공동대표)는 수업의 다크호스였다. 중간 과제는 1인 과제였는데, 그는 이때 높은 수준으로 물리법칙을 구현한 농구공 게임을 만들어 수업 과제 발표 때 교수님을 포함한 모두의 주목을 받았다. 이런 실력자를 놓치고 싶지 않았기에, 같이 팀 프로젝트를 하자고 제안했고, 그는 프로젝트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게임 구현에서도 좋은 성과를 내주었다.
이때를 계기로 수업의 팀 프로젝트가 아닌 토이 프로젝트를 짧게 개발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게임을 만들고 싶다는 마음만 있을 뿐, 어떻게 팀 단위 개발을 시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혼자 기획안을 짜 봐도, 결국엔 '프로그래머는 누가? 아트는 누가?'라는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다만, 프로그래밍은 이규원 공동대표가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공연히 할 뿐이었다.
수업 종강 날, 만들고 싶은 게임이 있는데,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게임 개발을 어떻게 하면 되는지 이규원 공동대표에게 넌지시 물었다. 그러자 함께 만들어보는 것도 괜찮겠다는 대답이 돌아왔고, 그 말은 천군만마를 얻은 듯 든든했다. (나중에 듣기론, 내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이 대학문학상 시상식 사진이라 믿음이 갔다고 했다.) 그는 학내 게임 동아리 출신에, 2016년 무료 게임 앱을 출시해 양대 마켓 4위도 달성했고, 여러 게임잼에도 참여하는 등 오랫동안 게임 개발에 관심을 가져왔던 사람이었다.
당시 총 3개의 기획안을 공유했는데, 기존 기획안은 모두 '개발 기간이 적어도 2년은 걸린다', '구현 복잡성이 너무 크다' 등의 이유로 기각되었다. 처음 목표는 겨울방학 두 달 동안 짧게 개발해볼 토이 프로젝트를 만드는 것이었기에, 2인 팀 결성 이후로 다시 기획안을 생각해야 했다. 하지만, 새로운 기획안을 빠른 시간 안에 짜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생각 전환을 위해 친구와 함께 서래마을 몽마르뜨 공원을 산책하던 때였다. 산책로엔 '토끼를 버리지 마시오'라는 현수막이 곳곳에 붙어 있었다. 현수막을 의아하게 바라보고 있자, 친구는 반려 토끼를 키우던 사람들이 이 공원에 토끼를 유기했고, 그 이후로 계속 반려 토끼들이 이곳에 버려지고 있다고 말해주었다.
그런 배경을 알고 나니, 공원 풀숲에 누워 잠자고 있는 토끼들이 너무나 안쓰러웠고, 유기견이나 유기묘 뿐만 아니라 유기 토끼가 있다는 것 자체도 놀라웠다. 토끼가 버려지는 공원이라니. 이런 현실을 보며 유기 토끼를 키워드로 하여, 토끼들의 이야기를 꼭 게임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어느 날의 산책을 계기로 <LAPIN>(라핀)의 초기 기획이 시작됐다. 어떤 소재를 다루고 싶은지 정하자, 캐릭터는 하루도 안 되는 시간에 짤 수 있었다. 마치 오랫동안 머릿속에 존재했던 듯, 리베, 호세, 몽블랑, 비앙카, 대장- 다섯 토끼 캐릭터를 만들었다.
토끼들은 각각 다양한 계기로 버려졌고, 개중엔 공원에 유기된 토끼들 사이에서 태어나 희망처럼 떠받들어진 토끼도 있다. 각각 정말 다른 과일 취향, 성격, 사고방식을 가진 토끼들이 어떻게 공원에 모여 살고, 어떤 갈등과 화해를 하는지를 따뜻한 이야기로 전달하고 싶었다.
이런 유기 토끼에서부터 출발한 스토리를 바탕으로, '2D 플랫포머'라는 장르를 정했다. 처음의 <라핀>은 모바일게임이었고, 아주 간단한 조작으로 장애물을 넘어 달려가고, 한 스테이지가 끝나면 그 날의 스토리를 해금하는 형식이었다. 게임 제목은 프랑스어로 '토끼'를 뜻하는 LAPIN(원어 발음은 '라팡')을 좀 더 귀여운 어감으로 변용한 '라핀'으로 정했다. 몽마르뜨 공원이 위치한 서래마을에 프랑스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다는 것도 프랑스어를 선택한 이유 중 하나였다.
이렇게 러프한 콘셉트와 메인 시스템 기획을 정해두고, 교내 미대를 중심으로 여러 학과 단톡방을 통해 팀원을 구인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라핀>이라는 방학 프로젝트에 세 명의 아트 담당자가 합류하게 됐다. 2019년 12월 말, '두 달 동안 짧은 모바일게임 프로젝트를 해보자'라는 생각으로 5인 팀이 결성됐다. 앞으로 끝없이 펼쳐진 먼 바다에서 어떤 풍랑이 있을지 예상하지 못한 채, 스튜디오 두달이라는 작은 배는 첫 작품 <라핀> 개발을 위해 돛을 펼쳤다.
다음 회차에서는 작은 대학생 팀이었던 스튜디오 두달이 <라핀>을 개발하기까지 어떤 어려움이 있었고, 어떤 변화와 고민을 겪어왔는지를 다뤄보려 한다. (2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