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것을 하다가 서로 만났고, 좋아하는 일을 함께 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강산이 2번 변했고, 부부는 언제부턴가 그 분야 사람들에게, 그것을 즐기는 이들에게 '한국 TRPG의 역사'라고 불리게 됐습니다.
1990년대, 한국 경제의 황금기. TRPG를 좋아하는 남자가 있었다. TRPG에 빠진 여자가 있었다. 컴퓨터 RPG에선 찾을 수 없는 TRPG의 자유로움이 좋았던 남자. 컴퓨터 RPG에선 느끼기 힘든 TRPG의 깊이가 좋았던 여자. TRPG로 만난 된 둘은 연인이 되었고 함께, 같은 미래를 꿈꿨다.
'우리가 느낀 재미를 알리고 싶다. 우리가 즐길 수 있는 일로 살아가고 싶다.'
그렇게 김성일·박나림 부부는 신혼여행 대신, 신혼방에서 서류와 씨름하며 TRPG 출판사를 낳았다. '도서출판 초여명'. 그렇게 탄생한 한국의 2번째 TRPG 출판사. 그리고 얼마 뒤, '한국 유일의 TRPG 출판사'란 이름을 10년 넘게 떠안아야 했던 회사.
초여명이 태어난 지 5개월이 지났을 때, 한국에 IMF 외환위기가 닥쳤다. 첫 책 <겁스 기본세트>는 하루 1권 팔리기도 힘들었다. 책 창고를 빌릴 돈도 없어 신혼방은 가구 대신 재고로 가득 찼다.
인쇄비가 없어 빚 내서 신간을 만들고 생활비는 번역 외주로 충당하던 나날. 한국 최대의 TRPG 출판사가 쓰러지고, 기대했던 국산 TRPG들도 자취를 감춰 외톨이가 된 와중에도, 부부는 15년을 그렇게 살아왔다. 초여명은 15년을 그렇게 자라왔다.
Q: 매번 빚내서 책 만들고, 생활비 벌려고 번역 외주하는 게 힘들진 않았나요? 책은 사정 좀 나아지고 낼 수도 있잖아요. A: 룰북만 있고 새 자료가 끊긴 TRPG를 살아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유저들은 그런 TRPG를 계속하고 싶을까요? |
빚을 내서 책 만드는 스트레스보다, 출판과 프리랜서 일을 오가는 삶보다 더 힘들었던 것. 그것은 아주 작은 의심 하나.
'우리가 그동안 낸 책들은 과연 '유저'들 손에 쥐여졌을까? 우리가 낸 책은 플레이에 쓰였을까? 어쩌면 도서관이나 수집가의 책장 안에 잠들어 있기만 한 것은 아닐까?'
책을 내기에 바빠, 살아 남기에 바빠 책이 누구에게 가는지 실감도 없었던 10여 년. 인터넷이라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도 가뭄에 시달리는 겁스를 볼 때마다 부부는 생각했다.
'…우리가 10년 넘게 몸 바친 이 일은 정말 의미가 있었을까?'
의심에 의심이 꼬리를 물고, 청춘을 바친 업(業)은 점점 헛돼 보이기만 했다.
이런 어둠 속에서, 부부는 실패를 각오하며 새 TRPG를 준비한다. 그저 좋은 TRPG를 알리고 싶어서, 실패해도 이번 한 번은 버틸 수 있을 같아서 시작한 <던전월드> 출판 소셜펀딩. 이 실패만 생각했던 프로젝트에서
부부는 어떤 목소리를 들었다.
"겁스 국문 1판 때부터 응원했습니다. 한국어 룰북이라는 것이 그렇게 기뻤어요."
"아직까지 어렵게 좋은 일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초여명 덕에, 겁스 덕에 학창시절을 정말 즐겁게 보낼 수 있었습니다."
TRPG와, 초여명과 함께 자란 이들은 수백, 수천 건의 메시지로 말했다. 당신들이 있어준 덕에 정말 즐거웠다고. 당신들의 15년은 결코 의미 없는 것이 아니었다고.
그렇게, TRPG 유저들은 5,841만원이라는 기록적인 모금액으로 기획자도 실패만 예상했던 <던전월드> 소셜펀딩을 성사시킨다.
17살 초여명의 사춘기를 날려버리며, TRPG에 청춘을 바친 부부에게 인생 최고의 순간을 선사하며….
그로부터 3년, 20살이 된 초여명은 그동안 5건의 새 TRPG를 발간했다. 그리고 지난 5월 21일, TRPG <크툴루의 부름> 소셜펀딩(☞ 바로가기)으로 1억 원을 모금하며 한국 게임관련 소셜펀딩의 역사를 새로 썼다.
초여명은 꿈꾼다. 첫 책 '겁스'가 그랬듯 새 TRPG가 누군가의 팍팍한 생활을 즐겁게 바꿔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