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

우리 말이 아니라 우리 문화로 바꾼다, 블리자드 현지화팀

다미롱 (김승현) | 2014-10-10 09:11:55

먹고 살기 위해 외국어 하나쯤은 필수인 세상이지만 게이머들에게 외국어란 아직도 높은 벽입니다. 아무리 실전(?) 외국어로 단련되어 있는 게이머라 하더라도 화면 가득한 꼬부랑 글씨를 한국어로 뇌내 변환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십중팔구는 어설픈 의역으로 원문을 어림짐작할 따름이죠.

이런 이들을 위해 외산 게임을 우리 말, 우리 글로 제공해 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인기게임의 스크립트를 직접 분해하며 번역하는 열성 아마추어부터 개발 단계부터 본사와 협업해 한국어 버전을 준비하는 전문 현지화팀까지. 각 게임사, 그리고 재야 곳곳에 위치한 한국어 번역팀이 그 주인공이죠. 

과연 이들은 어떤 과정, 어떤 노력을 거치며 한국어 버전을 만들까요? ‘파이어볼’ 대신 ‘화염구’를 퍼트린 것으로 유명한 블리자드 코리아 현지화팀의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한글날 특집을 한글날 다 지나서 올리는 디스이즈게임 김승현 기자


 “화염구? 불덩이 작렬? 외국 게임이라는 느낌조차 없애고 싶었어요”


블리자드 코리아 현지화팀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례가 바로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번역입니다. 2005년 국내 서비스를 시작한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는 ‘파이어볼’(Fireball)이나 ‘파이로블래스트’(Pyroblast)같은 음역 대신 ‘화염구’나 ‘불덩이 작렬’ 등의 우리말 번역을 선보여 화제가 됐죠. 당시 대부분의 판타지 배경 게임이 영어 발음을 기술 이름으로 썼던 것과는 정반대 행보였습니다.

“사실 팀 내부에서도 논란이 많았던 건이었습니다. 판타지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을 고려하자면 완역이 좋고 <워크래프트> 시리즈 팬들을 고려하면 음역이 좋고. 정답이 없었거든요. 결국 나중에는 원작자 중 한명인 ‘크리스 멧젠’에게 직접 의향을 물어봤습니다. 외국 게임이라는 것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완벽한 한국어화를 원하더군요. 그 덕분에 ‘화염구’가 탄생할 수 있었죠”

블리자드 코리아의 창립부터 현지화팀에서 일한 이준호 팀장의 기억입니다. 현지화팀의 고민처럼 이같은 번역은 서비스 초기 많은 논란을 낳았습니다. 하지만 번역이 익숙해지자 이제는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개성 중 하나로 자리잡았죠. 어느덧 <워크래프트3>의 ‘프로스트모운’(Frostmourne)보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서리한’이 더 자연스럽게 느껴질 정도니까요.


오른쪽부터 블리자드 코리아 현지화팀 이준호 팀장, 박종범 팀원

그리고 ‘현지인이 만든 것 같은 게임을 선보인다’라는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번역 기조는 블리자드 게임 전체의 번역 기조로 바뀌었습니다. 때로는 단순히 뜻을 번역하는 것을 넘어, 해당 용어의 분위기 전달을 위해 다른 용어를 사용할 정도로요.

대표적인 예가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업적, 그리고 <스타크래프트2>의 유니트 명칭이었습니다. 한때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하드코어 유저를 분간하는 기준이었던 ‘초와우저인’은 본래 ‘It's Over Nine Thousand!’이라는 업적이었습니다. 업적 점수가 9,000점을 넘었다는 의미에 <드래곤볼Z> 애니메이션에서 ‘베지터’가 ‘카카로트’의 전투력이 9,000 이상이라고 외쳤던 대사를 패러디한 문구였죠. 하지만 이 대사는 한국에서 ‘8,000 이상이다’로 번역되었기 때문에 비슷한 느낌의 ‘초와우저인’으로 바뀌었습니다.

<스타크래프트2> 테란 종족의 ‘불곰’도 본래는 약탈자라는 뜻을 가진 ‘머로더’(Marauder)라는 이름의 유니트였습니다. 하지만 ‘해병’이나 ‘사신’, ‘악령’같은 다른 테란 유니트처럼 부대라는 느낌을 주기 위해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죠.



“문학이라면 이런 번역은 힘들겠죠. 하지만 게임은 엔터테인먼트고 게임 번역은 원작자 의도 못지 않게 어떤 플레이 경험을 주느냐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주먹밥 시키신 분?’(구 ‘아구창 시키신 분’) 업적은 본래 ‘Did Somebody Order a Knuckle Sandwich?’였어요. Knuckle Sandwich를 단순히 ‘주먹으로 아가리를 치다’로 번역했으면 본래 느낌이 죽었겠죠. 저희가 번역팀이 아니라 ‘현지화팀’인 이유도 이것 때문이에요. 단순히 우리말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우리 문화에 맞게 바꾸고 싶거든요.”

과거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현지화를 총괄했고 지금은 블리자드 코리아 현지화팀에서 아웃소싱을 총괄하고 있는 유가영 팀원의 이야기입니다.


왼쪽부터 블리자드 코리아 현지화팀 유가영 팀원, 양유신 팀원


추적자의 원래 이름은 ‘사징어’였다? 현지화의 모든 것


물론 이들이 추구하는 ‘현지화’라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당장 게임의 번역만 하더라도 다른 문화 콘텐츠와는 비교할 수 없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죠. 소설이나 영화와 같은 일관된 흐름이 없기 때문입니다. <드레노어의 전쟁군주> 현지화 작업을 총괄하고 있는 양유신 팀원은 이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게임 번역은 기본적으로 ‘스크립트를 보며 이뤄집니다. 문제는 스크립트 안 텍스트에는 흐름이 없다는 것입니다. 퀘스트 지문이나 NPC 대사가 두서없이 얽혀 있죠. 물론 프로그래머들이 주석을 달아 놓긴 합니다만, 이것만으로 흐름을 알아내기는 쉽지 않습니다. 저희가 작업하는 게임들은 텍스트만 소설책 몇 권에 해당하거든요. 최근 작업한 <드레노어의 전쟁군주>는 텍스트만 소설책 10권 분량이었고. 나중에는 어떻게든 쉽게 해보려고 전용 툴도 만들었는데, 그 게임의 ‘마니아’가 되는 것만큼 좋은 것은 없더군요. (웃음)”



블리자드 코리아 현지화팀의 작업은 게임의 개발과 동시에 시작됩니다. 완성 버전을 받고 시작했다가는 발매 시기를 맞추지 못할 정도로 작업량이 많기 때문이죠. 첫 작업은 번역 준비입니다. 먼저 본사 개발팀이 프로토타입 빌드를 완성하면 현지화팀 전부가 게임에 접속해 대략적인 작업 내역을 확인합니다. 해당 지역의 분위기가 어떻고 어떤 이야기가 주로 펼쳐지는지 파악한 뒤, 그에 걸맞은 참고자료를 수집하기 위함이죠. 

필요한 자료가 모였으면 이제 중요도 높은 고유명사(몬스터나 지명, 세력 등) 위주로 번역 작업을 시작합니다. 한국어는 영어와 달리 NPC들의 말투가 크게 다르기 때문에 중요 단어 위주로 번역이 먼저 이뤄지죠. 워낙 양이 많기 때문에 여기에만 몇 개월은 우습게 소모됩니다. 현지화팀 만으로는 도저히 기간을 맞출 수 없어 아웃소싱까지 할 정도죠. 

참고로 블리자드 코리아 특유의 한글 명칭, 그리고 각종 현지화 개그(?)가 탄생하는 곳도 이 과정입니다. 양유신 팀원의 말을 빌리면 가장 험난한 단계죠.

“여기가 가장 힘듭니다. 때로는 다들 정신을 놔 별 드립(?)이 다 나오기도 하죠. 예를 들어 <드레노어의 전쟁군주>에 등장하는 NPC 종족 중 검치호를 의인화한 ‘서슬니’라는 종족이 있습니다. 이 친구들 이름 정하느라 ‘표범인간’부터 ‘호랑니’, ‘누렁니(?)’까지 별 의견이 다 나왔어요. <스타크래프트2>의 ‘추적자’는 처음 팀에서 불렀던 이름이 ‘사징어’(?)였죠. 다리 4개 달린 오징어라고. (웃음) 그래도 이렇게 한번씩 정신을 놓고 나면 의외의 곳에서 논의가 발전해 그럴싸한 이름이 나오더군요”

잠깐 동안 사징어라는 깜찍한(?) 이름으로 불리었던 ‘추적자’

주요 용어의 번역이 끝나면 본격적인 짜맞추기(?)가 시작됩니다. 같은 지역이나 같은 줄기의 퀘스트를 직접 하나하나 분류해 담당자에게 몰아주고, NPC도 각자의 성격에 맞게 존댓말이나 반말 등의 말투를 설정하고 대사를 번역합니다. 특히 NPC 말투는 분위기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이지만, 영어 버전에서는 없는 요소이므로 전용 툴까지 마련해 통일성을 확보하려 할 정도죠. 때로는 유저의 진영이나 종족에 따라 다르게 대사를 출력해 달라고 본사 개발진에 요구하기까지 할 정도입니다.

개발이 거의 끝나갈 쯤이면 현지화팀에게 새로운 과제가 주어집니다. 시네마틱 영상이나 인게임 영상에 쓰인 한국어 더빙 성우를 선정하는 일이죠. 원칙은 원본과 가장 비슷한 목소리를 선정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문화적 차이’라는 복병 때문에 때로는 현지화팀에서 상상력을 발휘해야 할 경우도 왕왕 발생합니다.

“확장팩에서 여주인공급 위상을 가진 ‘이렐이라는 드레나이가 있습니다. 원본은 동유럽 여성같은 목소리였는데, 이게 한국인 입장에서는 할머니처럼 느껴지더라고요. 그래서 고민 끝에 나이에 걸맞은 다른 이미지로 구현했죠. 다른 사례지만 인간들의 수장인 ‘바리안 린’도 원본과 다른 이미지로 구현된 NPC입니다. 크리스 멧젠이 연기한 바리안 린은 멋지고 강인한 목소리입니다. 하지만 한국인들이 듣기에는 시나리오 상에서 보이는 이미지와 잘 매치되지 않아 지금처럼 다소 날카로운 목소리로 재조정했죠”

현지화팀에서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업적, 그리고 더빙을 담당하고 있는 박종범 팀원의 설명입니다.


원본과 다른 콘셉트로 더빙된 ‘이렐’

현지화 작업은 개발과 동시에 이뤄지기 때문에 해프닝도 많습니다. 중간에 없어지거나 바뀌는 퀘스트도 있어 작업물이 의미가 없어지기도 하고, 일부 몬스터는 중간에 모델링이 바뀌어 현지화팀의 작업물과 어울리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실제로 <드레노어의 전쟁군주> 현지화 과정에서는 이 때문에 한 지역에서만 소설책 3권 분량의 텍스트가 무용지물이 되기도 했습니다. ‘블러드 싱어’(Blood Singer)라는 몬스터는 초기에 호리호리한(?) 오크 여성이어서 ‘피의 딸’이라고 번역해 놓았는데, 중간에 모델링이 우락부락한 남성 오크로 바뀌어 새로운 용어를 찾아야만 했죠.

때로는 만족스럽지 못한 결과물이 나와 현지화팀에게 숙제를 안겨주기도 합니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대격변>에서 새롭게 번역된 ‘망치 주둔지’는 현지화팀이 가진 가장 무거운 숙제입니다. 초창기 ‘해머폴’(Hammerfall)로 음역되었던 망치 주둔지는 오크족의 영웅 ‘오그림 둠해머’가 목숨을 잃은 곳이죠. 해머폴이라는 이름도 그 때문에 지어졌고요. 

하지만 번역 과정에서 오그림 둠해머의 죽음이라는 의미가 사라지면서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팬들에게 쓴소리를 들었습니다. 현지화팀에서는 지금도 군사기지와 역사적 의미 모두를 살릴 수 있는 새 용어를 새로 찾고 있지만, 아직 만족스러운 답을 찾지 못했다고 하네요.




훌륭한 현지화? 외국어보다는 한국어, 실력보다는 열정


그렇다면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훌륭한 현지화를 하려면 어떤 덕목을 갖춰야 할까요? 현지화 관련 업무만 올해로 15년째인 이준호 팀장은 무엇보다 ‘국어’ 실력을 기를 것을 권합니다. 현지화의 기본은 번역이고, 외국어 실력은 번역가의 한국어 실력 이상으로 발전할 수 없기 때문이죠. 게임은 물론 다른 어떤 콘텐츠를 현지화하더라도 꼭 필요한 덕목입니다.

게임이라면 여기에 몇 가지 덕목이 추가로 필요합니다. 첫 번째는 다양한 콘텐츠 경험입니다. 게임은 그 특성상 판타지부터 무협, SF 등 다양한 세계를 아우릅니다. 단순히 한국어를 잘 안다고 하더라도 해당 문화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필연적으로 벽에 부딪히게 되죠. 

실제로 블리자드 코리아 현지화팀도 새로운 확장팩이 나올 때마다 그에 걸맞은 참고자료를 조사하지만, 매번 적절한 단어를 생각하는데 어려워하고 있고요. 그래서 유가영 팀원이 추천하는 것은 세계 각국의 다양한 문화를 체험하고 알아보는 것입니다. 판타지든 SF든 간에 기본은 세계 각국의 문화와 신화, 관념들이 모여서 만든 것이기 때문이죠.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에도 마야나 인디언 등 다양한 문화권을 모티브로 한 요소들이 숨겨져 있다.

두 번째는 문제해결능력입니다. 앞서 설명했듯이, 게임은 소설이나 영화처럼 보기 좋게 가공된 텍스트를 주지 않습니다. 대부분 여기저기 쪼개져있는 텍스트를 한데 모아 직접 흐름을 익혀야 하죠. 만약 다른 문화권의 게임을 현지화한다면 여기에 추가로 품이 들어갑니다. 만약 존댓말이 없는 국가라면 캐릭터의 말투는 어떻게 설정하고 방대한 텍스트 속에서 이를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겠죠. 

블리자드 코리아 현지화팀에서도 이러한 문제들 때문에 직접 퀘스트 흐름 연결 툴, NPC 말투 검색 툴 등을 따로 만들었을 정도입니다. 게임 번역에서는 번역가의 번역뿐만 아니라, 번역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가는 과정도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셈이죠.

마지막은 게임에 대한 열정입니다. 이런 질문에 흔히 나오는 대답이지만, 현실적으로는 국어나 외국어 실력보다 더 중요한 덕목입니다. 현지화팀이 생각하는 게임 번역이란 기본적으로 다른 콘텐츠 번역보다 더 까다로운 업무입니다. 다른 콘텐츠에 비해 업무도 힘들고 신경써야 할 것도 많습니다. 

이에 더해 시장도 넉넉하지 않습니다. 직접 번역∙현지화팀을 꾸려가는 회사는 다섯 손가락을 다 꼽기도 힘듭니다. 대부분의 번역가들은 장기간 프리랜서로 전전해야 하죠. 블리자드 코리아 현지화팀도 자신들을 흔치 않은 사례로 생각할 정도로요. 때문에 현지화팀이 가장 강조한 것도 열정이었습니다. 번역과 현지화는 분명 즐겁고 의미있는 일이지만, 온전히 자리잡기 위해서는 예상 이상의 어려움을 견뎌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블리자드 코리아 현지화팀

전체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