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

[리뷰] '창세기전: 회색의 잔영', 스토리와 스토리텔링은 다르다

음주도치 (김승준) | 2024-01-02 18:2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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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전>이 신작으로 돌아왔다. 반가운 이야기와 캐릭터가 가득했지만, 어째선지 씁쓸함이 많이 남는다.


닌텐도 스위치로 찾아온 1, 2편의 리메이크작 <회색의 잔영>에 대한 시리즈 팬들의 평가는 엇갈렸다. 데모 버전 공개를 통해 받은 피드백 이후 데이원 패치를 적용한 버전으로 정식 발매됐고, 전투 편의성을 비롯해 많은 부분이 개선됐다. 꽤 괜찮은 게임으로 거듭났다는 의견과 팬들의 기대감을 만족시키기엔 부족한 퀄리티였다는 의견이 공존하고 있다. 


80시간에 걸쳐 42챕터 엔딩까지 플레이한 결과, "스토리에 대한 몰입감은 좋았지만, 아쉬운 요소가 곳곳에 산재해 있었다"는 것이 기자의 솔직한 소감이다. 명작까진 아니어도 평작 이상의 퀄리티를 보여줬고 꽤 재미있게 즐겼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좋은 작품이라고 선뜻 추천하긴 망설여지는 지점들이 있었다.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시스템에 대한 특징과 설명들은 앞선 기사들에서 많이 소개했으니, 이번 기사에서는 '스토리텔링'을 중심으로 앞으로 나올 <창세기전> 게임들까지 <회색의 잔영> 안팎의 이야기들을 다뤄본다. /디스이즈게임 김승준 기자


지난 12월 22일 정식 발매된 <창세기전: 회색의 잔영> 메인 화면. 여주인공 이올린.


엔딩 이후 흑태자의 모습으로 바뀌는 메인 화면.

# 알아야, 기다려야 오는 재미

탄탄한 '스토리'는 30년 가까이 된 <창세기전> IP가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게 만든 1등 공신 중 하나다. <회색의 잔영> 또한 원작의 서사를 따라갔음에도 이야기의 힘은 여전했다. 이를 서술하기 위해 이번 기사에는 불가피하게 다수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음을 미리 언급한다. 방대한 스토리를 짧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베라모드'를 포함한 과학자들은 '아르케'에서 200만 광년 떨어진 행성을 향해 성간 여행을 떠났다. 그러나 이내 블랙홀 표면에서 빛이 반사되는 현상으로 인해 문제가 있었음을 깨닫는다. 항로로 설정한 도착지 '안타리아'는 사실 100만 광년 떨어진 블랙홀에 반사된, 200만 년 전의 '아르케'였던 것이다.


공간 이동을 했다고 생각했으나 시간 여행을 해버린 25명의 생존자들은, 시간 여행의 부작용으로 늙지 않는 몸이 됐다. 동력을 잃은 우주선으로 인해 아르케로 돌아갈 수도 없게 된 이들은 '안타리아'에 자신들을 닮은 '안타리아인'을 만들었고, '안타리아인'들은 이들을 12주신, 13암흑신으로 부르며 '신'으로 모시게 된다. 


한편, 안타리아 대륙의 망국 팬드래건의 공주 '이올린', 왕자 '라시드' 그리고 기억을 잃은 용병 'G.S'는 왕국의 재건과 복수, 전쟁의 종식이라는 목표를 향해 사투를 벌이게 된다. 대륙을 통일할 힘을 가진 존재이자, 이올린이 복수를 하기 위해 찾아 헤맨 '흑태자'가 G.S였다는 반전을 중심으로 갈등이 고조된다.


흑태자를 배신했던 재상 '베라딘'이 사실 모든 일의 원흉인 '베라모드'였다는 사실 또한 드러나면서, '아르케'로 돌아가기 위해 '안타리아'를 버리는 신들과 안타리아를 지키기 위한 인간들의 대결로 이야기는 나아간다. 흑태자는 G.S의 모습 또한 자신의 일부라고 받아들이며, 안타리아의 파괴를 막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이올린은 흑태자에 대한 복수심과 G.S에 대한 애정 사이에서 갈등을 겪는데...


<회색의 잔영>의 스토리는 원작처럼 인간(안타리아인)들의 전쟁과 감정적 갈등에서 시작해


자신들을 창조한 신과 대립하는 우주 전쟁으로 확장된다. [G.S=흑태자, 베라딘=베라모드]라는 반전이 그 중심에 있다.

긴 플레이 타임을 견인하는 힘도 바로 이런 흥미로운 스토리에 있었다. 이번 <회색의 잔영>은 복잡할 수 있는 기존 서사를 입문자도 소화할 수 있게 잘 정리했고, 많은 인물들의 에피소드 사이에서도 이어질 이야기에 대한 기대감과 몰입감을 주요 구간마다 풀어냈다. 그러나 플레이 경험에 촘촘함이 부족했다는 것이 결정적인 문제였다. 


데이원 패치 이후 편의성은 많이 개선됐지만, SRPG의 핵심인 턴제 전투가 너무 무난했다. <창세기전>의 아이덴티티라고 할 수 있는 '마장기'는 디자인은 수려했으나 전투 조작감이 그리 좋지 못했고, '초필살기'는 나름대로 시원하고 멋있었지만 아쉬운 그래픽과 프레임 저하라는 단점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해적 소탕 등 맥락과 의미에 비해 불필요하게 많은 전투 횟수, 스위치 특유의 로딩 딜레이 등이 겹치며 피로도가 누적됐다.


​캐릭터 및 클래스가 다양해 전투 시스템을 파악하는 재미는 있었는데, 이 지점에서도 미묘한 밸런스가 아쉬웠다. 근접 단일 타깃 공격이 많고 범위 공격이 적은 초반에는 전투가 다소 답답했고, 마법 장판 공격 및 압도적인 힘을 가진 흑태자 등장 이후로는 범위 공격으로 적을 쓸어버리는 방식의 획일적인 전술만 사용해 오히려 전투가 숙제처럼 느껴졌다.


아군 '마장기'(기계 병기) 및 적 '그리마'(생체 병기)의 디자인은 좋았지만, 조작감이 다소 답답했고, 박력과 시원함이 부족했다.

적들의 수도 많고, 전투 횟수도 많아서 마법 범위 공격 위주의 전술로 손이 가게 된다.


흑태자의 초필살기 아수라파천무. 
G.S일 때 사용하거나, 가면이 부서졌을 때 사용하면 얼굴 연출이 다른 등의 디테일은 좋았다.

그러나 초필살기 컷씬 연출 대부분은 낮은 그래픽 품질, 프레임 저하 등의 단점을 보여줘 아쉬움이 남았다. 
이올린의 초필살기 블리자드 스톰.


<회색의 잔영>의 종합적인 재미는 몇 번의 상승 변곡점을 기준으로 크게 달라진다. 라시드가 빙룡을 만나는 5~6챕터를 기준으로 판타지 어드벤처의 재미가, 이올린과 G.S의 무도회 연출이 등장하는 10챕터를 기준으로 인물들의 감정선이, 라시드가 크로우를 만나 성장하는 구간에선 무협의 '기연' 요소가 도드라졌고, 흑태자가 등장하는 중반 이후로 전쟁의 스케일이 커지고 여러 설정이 한 데 모여 확장되기 시작한다. 바꿔 말하면 후반의 재미와 초반의 재미의 차이가 매우 큰 게임이다. 


<회색의 잔영>이 정가 64,800원의 콘솔 게임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구매 전 어느 정도의 사전 조사는 하는 게 일반적일 것이다. 그러나 만약 "<창세기전>이 재밌다던데 나도 한 번 해볼까?"라는 마음으로만 구매한 신규 유저가 ▲ 42챕터 60~80시간의 플레이 끝에 엔딩이 있음 ▲ 흑태자, 베라모드가 등장하는 순간이 중요함 ▲ 인간의 갈등에서 신들에 대항하는 이야기로 종국엔 우주 전쟁까지 확장됨을 모르고 플레이했다면 어땠을까?


기자는 이어질 전개를 모두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다음 이야기를 보고 싶어서 다소 답답하거나 루즈한 구간을 이겨냈지만, 이 과정이 그리 유쾌하지 못하다고 느낄 유저도 분명 있을 것이다. 분명 후반부의 전개와 몰입감은 준수했고, 엔딩 이후 남는 여운은 강했다. 그러나 흥미가 곧 재미가 되진 않는다. 매끄럽게 잘 정리된 서사와 나름대로 잘 설계된 기본 시스템은 칭찬하고 싶지만, 아쉬움이 함께 남는 건 어쩔 수 없다.


라시드가 빙룡을 만나는 장면


G.S와 이올린의 무도회


처절했던 엔딩까지 좋은 구간도 많았지만, 
이런 서사가 이어질 것을 전혀 모르는 입장이라면 긴 플레이타임과 일부 구간이 장벽처럼 느껴질 수 있다.

# 스토리와 스토리텔링은 분명 다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회색의 잔영>의 강점은 스토리이며, 개발진은 방대한 서사를 깔끔하게 정리했다. 하지만 그 스토리를 뒷받침하는 연출, 즉 스토리텔링은 다소 아쉬웠다출시 이후 약 10일이 지난 시점에서, "원작을 해본 사람들이 더 악평을 한다"거나, "일명 '억까'를 하는 사람들이 이해된다"는 의견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한 것은 바로 '그래픽'과 '연출'이었다.


"기존 팬들이 대단한 그래픽을 바란 것이 아니다"라는 글도 많았는데, 기자의 플레이 경험으로는 그래픽 품질에도 편차가 있었지만, '부자연스러운 효과의 조합'이 가장 큰 문제였다고 생각한다. 캐릭터들의 기술 및 스토리 연출 중에 섬광 효과가 포함된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가시성이 떨어져 상황적인 맥락이 없다면 정확히 무엇을 표현하고 있는지 인지하기 어려운 때가 있었다.


데모 버전에서 지적됐던 대사에 맞춰 움직이지 않은 입, 딱딱한 표정은 정식 버전에서는 개선됐지만, 스토리가 가진 감정의 고저차에 비해 그 표현이 약했다. 초필살기 연출을 포함해 여러 캐릭터 액션이 다소 뻣뻣하게 느껴진 것도 몰입감을 저해한 요소 중 하나였다.


카메라 워크 또한 먼 거리에서 원경을 비추거나, 발목을 비추는 등의 구도가 종종 등장했는데, 의미 전달의 측면에서 그리 효과적인 선택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감정선이 중요한 장면에서 표정을 담아주는 클로즈업 연출이 더 자주 나와주길 원했지만, ​매우 중요한 장면들을 제외하면 이런 연출이 제한적으로 사용된 느낌을 받았다. 각각의 컷 전환이 더 빠르거나, 화각 전환이 더 역동적이었으면 싶은 구간 또한 많았다. 


폴라 크라켄의 공격으로 배의 갑판 일부가 부서지는 장면이다.
설명이 없다면 어떤 화면인지 알아볼 수 있을까?
그래픽 저하, 프레임 드랍, 부자연스러운 효과의 조합으로 가시성이 떨어진다.

초필살기 멸살성천무 연출 중 한 장면. 캐릭터 액션이 다소 아쉬운 경우도 있었다.

무도회 연출 중 일부. 원작에서도 나온 구도였기에 고증을 한 것은 이해를 하지만
화면의 초점이 이올린과 G.S에 있는 느낌이 아니라, 밤하늘에 있는 느낌이다.
 

이올린과 크로우의 탈출 장면 중 일부. 
무도회와 마찬가지로 "넓은 공간에 아무도 없이 두 사람만 있었다"는 의도는 이해하지만 정작 두 사람이 잘 보이지 않는다.

엔딩 장면 중 일부. 닌텐도 스위치 휴대 모드로 플레이하면 화면도 작기 때문에 더욱 알아보기 어렵다.
다시 말하지만 원경 구도 자체가 나쁘다는 게 아니다.
화면을 꼼꼼히 들여다보며 개발진이 무엇을 표현하고자 하는지 의도를 알아줄 사람도 있겠지만,
카메라 초점 및 조명이 연출 의도에 부합해주지 않으면 이를 놓치고 가는 유저도 많을 수밖에 없다.

# <창세기전>  IP가 가진 힘

<창세기전> IP는 소프트맥스 시절을 기억하는 올드 게이머들에게는 '추억'이고, 그들이 추억을 전해 들은 어린 유저들에게는 일종의 '전설'이 되어 있다. 반면 일각에서는 이미 수명을 다한 IP라고 비판하는 목소리도 존재한다.


닌텐도 스위치로 국내 정발된 레그스튜디오의 <회색의 잔영>은 DLC 출시, 글로벌 출시 및 타 기종 이식이 계획되어 있다. 모바일로 출시될 미어캣게임즈의 <아수라 프로젝트> 또한 1월 9일 출시를 앞두고 있다. 또한 뉴노멀소프트는 라인게임즈와 IP 라이선스 계약을 맺고 <창세기전3>를 기반으로 한 첫 번째 타이틀을 포함 2종의 게임을 개발한다고 밝혔다.


그런 의미에서 <회색의 잔영>을 비롯한 <창세기전> IP의 미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회색의 잔영>의 서사를 다시 따라가며 느낀 점은, 이야기의 전개와 행동의 원동력이 '명분'과 '대의'에 크게 의존한다는 것이다. 아르케로 돌아가고자 하는 신들은 '고향에 대한 향수'와 '인간적인 자유'를 꿈꾸고 있고, 안타리아인들은 '주군과 국가에 대한 충성', '생존을 위한 혈투와 배신'에 몸을 바친다.


집단의 대의를 위해 움직이는 서사는 개인주의가 만연한 작금의 시대에 오히려 신선하게 느껴졌다. 해외에서는 또 어떨까?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현재 진행형인 21세기의 국제 정세로 인해, 처음 <창세기전> IP가 출시된 20세기 말보다 오히려 '전쟁'이라는 소재에 더 민감할 수 있다. 흑태자(G.S)와 라시드가 '평화'를 논하는 것에 대한 울림이 또 다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자는 <창세기전> IP가 충분히 확장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IP의 힘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회색의 잔영> 글로벌 출시 버전을 비롯해 앞으로 나올 출시 예정작들이 좋은 리메이크 작품으로 남아야 한다. 


흑태자(G.S)와 라시드. '신'들과의 대립 이전에도 두 인물은 국가 간 화친 즉 '평화'를 논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올린의 복수로 시작된 이야기는 '평화를 위한 희생'의 서사로 나아간다.
30년 전이 아닌 지금도, 국내가 아닌 해외에서도 분명 유효한 스토리다.
그렇기 때문에 리메이크의 포문을 연 <회색의 잔영>이 더욱 잘 나와주길 바랐다.

# 좋은 리메이크란 무엇인가


원론적인 이야기지만 "원작을 아는 사람은 더 재밌게, 원작을 모르는 사람도 충분히 즐겁게" 플레이할 수 있어야 좋은 리메이크라고 기자는 생각한다. 그러나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도 잘 안다. 원작이라는 직접적인 비교 대상이 있다는 것도 큰 벽이고, 기존 팬들은 전개를 모두 안다는 점이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할 때도 있다. 


<회색의 잔영>을 플레이하면서 내내 떠올랐던 작품은 <마녀의 샘R>이었다. 각각의 원작들이 걸어온 역사와 개발사의 스케일에는 분명 차이가 있지만, <회색의 잔영>과 <마녀의 샘R> 모두 ▲ 원작 정규 넘버링이 4편까지 나왔고 ▲ 시리즈 첫 작품의 리메이크로 2023년 출시됐으며 ▲ <회색의 잔영>은 PC에서 스위치로, <마녀의 샘R>은 모바일에서 PC로​ 플랫폼을 옮겼고 ▲ 긴 서사와 턴제 전투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마법을 포함한 판타지 요소, 국내 성우 풀더빙, 스토리 및 전투의 3D 연출, 많은 등장인물 등 두 게임의 공통 분모가 많은데, <마녀의 샘R>은 스팀 리뷰 3,331개 중 97%가 긍정적인 '압도적으로 긍정적' 평가를 받았다. 시리즈 정체성에 맞는 '선택과 집중'을 잘했기 때문이다.(물론, <마녀의 샘R> 또한 아쉬운 점이 없진 않았다)


<회색의 잔영>이 정식 출시 직후 다소 엇갈린 평가를 받은 배경엔 '잘 하고 싶고, 잘 해야만 한다'는 욕심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레그스튜디오는 지난 데이원 패치 인터뷰 당시 '차후 패치를 통해서도 지속적으로 개선하겠다'고 약속했다. <창세기전> IP의 출시 예정작들과 <회색의 잔영>의 개선 방향에서도 적절한 '선택과 집중'을 통한 더 좋은 플레이 경험이 있기를 기다려본다.


모바일로 출시됐던 <마녀의 샘> 1편. 키위웍스는 '외로움의 극복'이라는 주제는 유지한 채로
 

PC 버전의 리메이크 <마녀의 샘R>을 출시했고 호평을 들었다.

과거 <창세기전> 속 G.S와 이올린의 무도회 장면


이번 <회색의 잔영>에서의 이올린과 라시드. 아쉬운 요소들이 있었지만 그래도 재밌게 즐겼다.
앞으로 이어질 <창세기전> IP의 새로운 릴레이가 더 좋은 모습을 보여주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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