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

[TIG 20] 디지털 국어사전 만들던 엔지니어, 리니지 개발자가 되다

우티 (김재석) | 2025-03-28 09:11:10

오늘날 모르는 단어를 찾기 위해 검색을 통하면 되지만, 예전에는 사전을 펼쳐 그 단어를 찾아야 했습니다. (물론 기자는 전자사전-PMP 세대로 '예전'이 어땠는지 대략 알고 있을 뿐입니다.) 한국어와 한국어사전은 어떻게 디지털로 옮겨오게 됐을까요?


막고야에서 <세균전>의 비주얼을 맡았던 채윤호 개발자는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의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연세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해 '말뭉치' 기반의 국어사전을 만들기 위한 프로젝트에 투입됩니다. 디지털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국어사전을 만들기 위해서 학교 내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소프트웨어를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게임 업계와 잠시 멀어졌던 채윤호 개발자는 어떻게 엔씨소프트에 입사해서 <리니지>의 초창기 개발자가 된 것일까요? 이 이야기에는 윈도우즈의 부상, 조합형 완성형 논쟁, 웹 개발의 등장, 그리고 모두를 충격에 빠뜨렸던 'IMF'가 스쳐 지나갑니다. 그 시절 '애니메이션 오타쿠'들의 선선한 우정도 함께 엿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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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 오타쿠, 한국 게임 개발의 첫 페이지에 뛰어들다 (바로가기)


채윤호 나이트 앤 비숍 대표




Q. 디스이즈게암: 90년대 초의 게임 업계는 돈이 안 될 것 같아서 떠났다고 했습니다. 애니메이션 업계로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은 없었습니까?


A.​ 채윤호 대표: 그때 애니메이션 업계에서 많은 것을 배우기는 했지만, 개인적으로는 실망스러웠던 게 있었습니다. 


뭘 알고 온 사람보다 소위 '노가다' 하듯이 육체노동 대신에 그림 그릴 줄 아는 사람들이 마구잡이로 모인 느낌이 강했죠. 어느날 직장 상사랑 이야기를 나눴는데, 이 사람이 했던 작품이 대단했거든요. 그런데 본인이 무슨 작품을 했는지 모르고 있더군요. '<버블검 크라이시스>도 하셨어요?'라고 물어보니 '그게 뭔데?'라고 하더라고요.


지금의 애니메이션 분야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 당시 시절에 그런 것들이 저한테는 실망감으로 다가왔었어요. 저는 오타쿠였고 그 일 자체가 너무 즐거웠지만, 정작 일하는 사람들은 하청으로 별 즐거움을 느끼지 않았던 거죠. 


(Q. 그래도 애니메이션을 더 좋아하셨으니 관련 업계로 가고 싶단 생각은 없었습니까?) 다시 가지 않았죠. 왜냐하면 갈 데가 없었으니까요. 애니메이션도, 게임도 직업 안정성은 꽝이라는 생각에 학교로 돌아갔어요. 그때 제 게임 커리어는 끝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Q. 막고야를 떠나 학교로 완전히 돌아온 뒤의 세상은 어땠습니까?


A. PC 통신 시대가 열리면서 굉장히 중요한 프로그램이었던 접속용 프로그램들, 거기에 사용하는 한글이 중요한 기술로 부각됐습니다. 당시에 역사적 존재와 사건을 많이 접할 수 있었죠. 하늘소팀, 새롬 데이타맨 프로, 한글과컴퓨터(한컴)가 그 시대의 산물이었습니다. 그것들이 다이얼 업 네트워크로 인터넷에 접속할 때 생태계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사람들이 있었죠.


전 세계 IT 역사에 중요한 전쟁들이 있었는데, OS 전쟁, 웹 브라우저 전쟁, 워드 프로세서 전쟁에 우리나라도 끼어있었단 말입니다. OS 전쟁은 도스(DOS)에서 윈도우즈로 넘어오던 시절에 과연 윈도우즈가 성공할 것이냐의 여부도 있었고요. 92년 말, 93년 무렵에 유닉스와 윈도우즈 중에 누가 대세를 잡을 것인가를 가지고 논쟁은 많았어요.


해외 관련 매체에서는 표지에 윈도우즈랑 유닉스 아이콘 그려놓고 싸움 붙이는 표지를 냈던 기억이 나네요. 하드웨어에서는 CISC 칩이랑 RISC 칩이 겨루고 있었고요. 애플에서 쫓겨났던 스티브 잡스가 넥스트스탭(NeXTstep)을 발표했던 게 다 그때입니다. 한국에서는 PC에 적용할 한글 프로그램을 개발할 때였고요. 근데 그때 저는 어려서 인식이 부족했기 때문에 생각이 달랐어요.


넥스트스텝 3.3 버전 화면 (출처: howtogeek)


Q. 어떤 생각이었나요?


A. 영어 문화권에서 나온 컴퓨터인데, 한글 처리가 안 되는 건 당연하다는 생각이었죠. 그걸 억지로 한다고 해도 새로 나온 용어나 기술은 다 영어인데, 그걸 한글로 바꾸면 낭비 아니냐, 내가 영어를 못하더라도 그냥 영어를 배우고 영어로 개념을 익히는 효율적인 아니냐, 그런 생각이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한글 컴퓨팅, 한글 프로그래밍을 하기 굉장히 싫어했어요.


더군다나 컴퓨터가 지금과 다른 환경이라서 그래픽 카드간 호환이 됐었기 때문에 그래픽 카드와 대응하는 소프트웨어가 다 달랐어요. 하드웨어 제조사별로 다 다른 한글 드라이버를 가지고 있었죠.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사이에 먼저 올라가는 소프트웨어니까 드라이버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한글 드라이버를 개발하는 그래픽 카드별로 개발하는 조류였고 그 조류를 낭비라고 질색을 했죠. 때문에 제가 남들과 같은 선상에서 출발하기 위해서 찾 새 트렌드가 바로 C++였어요.


C++ 프로그래밍 공부하고, 윈도우즈 프로그래밍 공부하고. 그게 저의 테마였어요.



Q. 한글 컴퓨팅이 부상하던 시대에 본인은 C++을 공부했다 건가요?


A. 지금 생각해 보면 한심한 수준으로 공부했죠. C++이 나온지 얼마 안 됐기 때문에 비야네 스트로스트룹이 쓴 책 한 권만 나와있었어요. 해적판을 구해가지고 공부를 했는데, 문법이 C랑 겹치니까 오히려 그게 헷갈려서 어려웠던 기억이 나요. 객체 지향이라는 개념도 그때 처음 배웠고, 그 번역이 왜 틀렸는지도 알게 됐죠.


일본 번역어를 그대로 가져온 거더라고요. 사실상 맥락이 맞지 않는 게, 객체지향이라는 개념어에서 말하는 오브젝트는 오히려 주체에 가까워요. 우리가 어떤 문제를 해결할 때 관심이 되는 대상에 집중하겠다라는 개념에 가까운데, 철학적으로. 그것을 대상으로 번역을 하던지 목적으로 번역을 했어야 해요. 목적 지향 언어나 대상 관심 언어로 번역했다면 오히려 덜 어려웠을 겁니다.


그게 사실은 굉장히 잘못된 첫단추였어요. 그 당시 번역서들이 엉터리가 많았습니다. 제 전공책 중에 표지 시림 때문에 '용가리책'으로 유명한 전공 도서가 있었는데, 원서 기준으로는 최고의 책이었지만, 한국어판 기준으로는 최악의 책이었습니다. 의미가 완전히 반대로 된 것들도 많았거든요. 그대로 읽었다가는 반대로 해석하는 경우도 많았어요.


그래서 어려워도 꾸역꾸역 원서를 봤던 생각이 납니다. 그게(객체지향 언어) 당시에 나의 엄청난 관심사였고, 재밌게 공부했어요. 그러면서 윈도우즈가 나오면서 멀티태스킹, 멀티미디어 이런 개념들이 막 대중에 알려지던 시점입니다. 93년도에 전공 수업 중에 OS(운영체제) 수업이 있었는데, 그때 세마포어니, 라운드로빈이니, 프리엠티브니 하는 개념들을 배웠습니다.


도스와 HWP가 내가 사용하는 소프트웨어의 전부였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던 시절이었죠. 일찍이 워드 프로서의 전쟁은 판 정리가 된 상태였지만, 우리나라는 워드스타에다가 한글 드라이버를 올린 상태로 한글을 타이핑할 프로세서가 필요했기 때문에 하드웨어에 폰트를 내장해서 OS를 켜면 한글이 지원되는 대기업 제품이 있었고, 소프트웨어 한글은 폰트가 좀 떨어지고 느린 대신에 가격이 쌌죠. 


제가 처음 만나본 한글화 OS는 효성에서 만든 IBM-PC환 기종의 하드웨어식 한글이었어요. 폰트가 되게 예뻤던 기억이 나요. 이때까지만 해도 저는 '굳이 한글을 컴퓨터에서?' 이런 느낌이었기 때문에 크게 관심이 없었지만, 여러 플레이어들이 한글 코드를 어떻게 할 것이냐를 가지고 논쟁을 하던 시기였죠.



Q. 조합형이냐, 완성형이냐?


A. 한컴(편집자 주: 당시 '한컴'이라는 공식 약칭은 없었으나 편의상 통일)의 <ᄒᆞᆫ글(아래아한글)>은 조합형 한글을 처음부터 썼어요. 한컴은 한글에 대한 사랑과 이해가 깊었기 때문에 고어(古語)를 타이핑할 수 있는 걸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했고, 그러려면 종합형 코드가 한글 창제의 원리에 더 맞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죠. HWP 1.0에서 1.5로 넘어올 때 많은 대기업이 이 전쟁에 뛰어들었죠.


제가 90년에서 92년 사이 군대에서 쓰던 건 <하나 워드프로세서>어요. 88 키보드가 표준이었던 시절이었고, 타자기에서 워드 프로세서로 넘어오던 시절이라 타자기와 프로세서를 동시에 썼죠. 마이크로소프트(MS) 입장에서는 "한국의 국가표준은 조합형이야, 완성형이야?" 이랬는데, 논쟁이 안 끝났던 거에요. 조합형 한글로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회사들은 그쪽대로, 완성형을 쓰는 곳은 그쪽대로 원하는 게 있었는데 합의가 안 됐습니다.


그래서 복수 표준(KS C 5601-1992)이라는 말이 처음 등장하죠. 사실 표준은 하나여야 하는데 복수를 인정했으니 어폐가 있죠. 윈도우즈라는 OS가 표준화되면서는 OS가 제공하는 함수를 이용해서 프로그램을 짜는 게 기본이잖아요. 윈도우즈를 그리고, 버튼을 넣고 하는 것들은 프로그램이 따로 기능을 만들지 않고 콜해서 쓰는 게 윈도우즈 프로그래밍의 기초였죠.


저도 그런 걸 배우는 게 낯설어서 시간이 많이 들었던 생각이 나는데, 아무튼 윈도우즈라는 생태계는 그렇게 굴러가는 거였습니다.


<아래아한글 1.0>(1989) 은 문화재로 등록됐다.


Q. 그러던 차에 연세대학교 국어정보학과 대학원에 진학했습니다.


A. 16비트 시절에 저를 컴퓨터를 전공하게 만든 친구가 연세대에 다니고 있었어요. 그 친구가 다니던 랩은 국어사전을 만드는 곳이었습니다. 협력사가 두 곳이 있었는데 한컴과 동아출판사였습니다. 사전을 만들면 종이출판은 이곳(출판사)이 하고, CD-ROM 멀티미디어는 한컴이 맡았죠. 저는 그 랩에 아르바이트로 들어갔습니다. 그때만 해도 C++와 윈도우즈 프로그래밍을 할 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거든요.


옛날 사람들은 영어 공부할 때 1번으로 사는 책이 영어사전이었잖아요. 그만큼 사전을 많이 보던 시절이고, 포탈에서 단어를 검색한다는 건 상상하기 어려울 때였죠. 책을 구매하고, 단어를 찾아가고, 단어에 따라서 뜻 1, 뜻 2, 뜻 3이 나오고, 문법 정보와 용례가 구성되는 그런 사전이 필수적이었는데, 제가 기억하기로 국어사전의 크레딧에는 마치 소설처럼 한 사람이 지은 것처럼 되어 있었어요.


그분께서 대학원생들이 같이 일했을 수 있었지만, 어쨌거나 사전의 책 표지에는 한 분만 보였던 겁니다. (편집자 주: 국립국어원과 두산백과의 <표군국어대사전>은 1999년에 발행됐다.) 언어는 실제 언어를 쓰는 사람의 것이어야 하는데 한 명의 학자에게서 나올 수 있는 거냐, 그런 문제의식 속에서 그 무렵 연세대에서는 <연세말뭉치>를 기반으로 한 사전 편찬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편집자 주: 말뭉치[Corpus], 언어의 표본을 추출한 집합​)


디지털 초창기니까 문헌들이 디지털화되지 않았고, 쌓이기 시작할 땝니다. 어떤 것들은 완성형이고, 어떤 건 텍스트였고 표준화가 되지 않은 상황이었죠. 그런 문헌들을 연구소에서 최대한 수집해서 60년대 소설, 70년대 신문 이런 것들 중 디지털화된 게 있다면 시대상과 사회상이 반영된 용례가 있을 거잖아요? '맛있다', '고춧가루' 이런 단어를 찾아서 문법 정보를 붙이려면, 용례가 필요한데 그것은 종이로 검색하는 건 말이 안 되고 디지털로 찾아야 했어요.


검색의 기본은 수집과 정렬입니다. 사전을 만들기 위해서 그 작업을 했어요. 데이터베이스화된 데이터가 아니니니까, 비정형 데이터를 검색하는 방법 등을 가르치면서 컴퓨터 전공자와 언어학 전공자들이 같이 머리를 싸매던 시절에 알바를 했던 거죠. 무슨 알바였냐면, 연구자들 네트워크를 묶는 작업이었어요. 지금은 컴퓨터 메인보드에 네트워크가 내장됐지만, 그땐 네트워크 카드도 따로 있었고, TV 케이블처럼 동축 케이블을 썼거든요.


1997년 1월 발표한 <말뭉치와 국어정보 : 사전 편찬의 현재와 미래> 표지. (연세대학교 한국어사전 편찬실).


Q. 컴퓨터에 동축 케이블이라니 저에게는 선사시대 이야기 같군요.


당시에 사전 만드는 연구자들은 컴퓨터와 안 친했죠. 이 사람들이 쓰는 일반적인 PC 환경은 컴퓨터를 켜면 전원이 켜지고, 까만 도스 화면이 나오면 거기에다 HWP를 치고, 그 작업이 끝나면 컴퓨터를 끄는 게 전부였죠. 그러니까 이 사람들한테는 PC라는 게 그냥 워드 프로세서였던 거에요. 사전이라는 게 비유하자면 소스코드 하나를 프로그래머 여러 명이 짜는 거니까, 이 사람들의 환경을 하나의 네트워크로 묶으려고 했죠.


그러려면 멀티 유저, 멀티테스킹 작업이 되어야 했기 때문에 도스에서 윈도우즈로 넘어와야 했던 거죠. 사전편찬에 인트라넷 환경을 구축하고, 그 랩 안에서 쓸 인하우스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게 저의 미션이었어요. 도스 환경에서 HWP를 쓰고, 파일/프린터 공유를 위해 노벨의 넷웨어를 쓰고 있었는데, 유닉스 워크스테이션과 윈도우즈 머신이 혼재된 환경이 되면서 넷웨어는 더이상 쓸 수가 없었어요.


이 복잡한 환경을 하나의 체계로 만드는 걸 원했어요. 유저들에게는 가려지고, 앞에는 똑같은 환경으로 작업하는 솔루션을 작업했어요. 그러다 찾은 게 윈도우즈 포 워크그룹, 그리고 윈도우즈 NT였죠. 제가 그때 공부를 하면서 친구랑 <마이크로 소프트웨어>에 6개월 정도 기고를 했어요. 윈도우즈 NT를 설명하는 글을.


윈도우즈 NT의 제품 특성과 기능, 용도 같은 것들을 정리했죠. '깊은 강, 윈도우즈 NT를 건너자' 뭐 이런 헤드라인이었던 기억이 나는데, 우리가 랩에서 쓰려고 윈도우즈 NT 도메인 서버를 설치하고, 묶는 방법을 공부하고, 모든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형태의 인트라넷을 만들고 그랬죠. 이게 너무 재밌어서 소프트웨어 엔지니어(SE) 쪽으로 포지션이 바뀌던 상태죠.


그렇게 사전 만드는 작업을 옆에서 보니까 이 일에 명분과 목표가 보이더라고요. 결국은 내가 복학생 때 우습게 여겼던 한글 프로그래밍이라는 게 말이죠. 내가 한국인인 이상 한국어를 써야 하고 DB도 한국어로 쌓일 텐데. 그러면 한글/한국어로 된 정보를 어떻게 다루느냐가 앞으로의 관건이 될 것이라고 생각을 바꾼 겁니다.


1995년 4월호부터 <마이크로 소프트웨어>에 연재된 '깊은 강, 윈도우즈 NT를 건너자'. 비슷한 시기 해당 잡지에는 안철수, 배재현 등의 인물들이 기고했다.


Q. 원래는 한글 프로그래밍을 부정적으로 보다가, 아르바이트로 사전 편찬 작업에 참여하다 보니 발상의 전환이 이루어진 것 같습니다.


A. (연세대에서) 말뭉치 기반의 언어학을 중심으로 공부를 하게 됐습니다. 언어학에는 서양 철학의 큰 조류인 합리주의와 경험주의까지 타고 올라간다는 것을 배웠죠.


언어에도 규칙이 있고 그것을 잘 구조화하면 수학적으로 만들 수 있다는 합리주의의 언어학. 언어를 관찰 가능한 데이터로 접근하는 경험주의적 입장, ​그리고 (노엄) 촘스키 교수가 말한 것과 같은, 모든 언어에 적용되는 보편적인 문법 구조가 있다는 이론 등등을 배웠죠.


요즘 인공지능 때문에 일반에 알려진 '자연언어처리(NLP)'에 대해 처음 알게 되고, 인공지능에서 언어에 관련된 부분의 이론과 개념에 대해서도 배우게 됐죠. 그게 지금 와서 인공지능이 급부상하면서 도움이 될 줄은 몰랐지만요.


당시에는 '언어는 데이터에 기반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데이터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른다, 그러니 일단 데이터를 많이 모아야 한다'는 게 랩에서 추구한 말뭉치 언어학의 기본이었거든요. 그런데 한글 코드에 문제가 있었고, 우리가 옛 문헌을 연구하려면 한글 고어를 다룰 코드가 있어야 하는데, 표준은 제각각이었으니까요. 마침 윈도우즈 NT는 유니코드 기반으로 설계됐으니까 한국에서 정리만 되어 있었으면 유니코드에서 우리나라의 영역을 확보하는 게 가능했죠.


우리가 입장 정리가 안 되니까 지금도 우리가 웹 브라우저에 디코딩, 인코딩 메뉴에 한글 코드가 3개나 존재하는 거죠. KSC 5601, 완성형, 통합형 이렇게 나오는 이유가 그때 정리가 됐기 때문이에요. 그런 문제점을 깨닫고, 처음으로 이루어지는 방식의 작업 방식을 했던 거죠. 어떤 연구자가 어떤 표제어를 맡으면 표제어가 언제부터 등장해서 어떤 용례로 쓰였는지를 말뭉치에서 검색해서 그걸 기반해서 사전에 원고를 사용하고 그걸 나중에 취합해서 사전으로 만드는, 일련의 공정은 번도 시도가 적이 없었던 거예요. 지금 네이버 사전에 나오는 국어사전이 바로  사전을 기초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 당시에 굉장한 경험을 했죠. 랩의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인하우스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일도 했지만, 국문과, 영문과, 독문과, 문헌정보학과 등등의 학과에서 오신 분들에게 컴퓨터를 가르쳐드리는 작업도 병행했죠. '지금 복잡한 것을 정리하기 위해서는 윈도우즈 NT로 넘어오셔야 합니다'를 설득해야 하는 입장이었고요. 컴공과는 완전 유닉스 생태계여서 (윈도우즈 생태계로) 넘어오라고 설득하는 게 더 힘들었죠.



Q. 그래서 알바하러 갔다가 '납치'(대학원 진학을 이르는 은어)가 됐나요?


A. 1997년 뒤늦게 대학원에 들어가게 됐습니다. 하지만 그 뒤에 곧바로 IMF를 맞고 졸업을 못 했죠. 학비를 못 내서. 대학원에 갈 마음이 애초에 없었기 때문에 학점 관리가 엉망이었지만, 간신히 들어갔죠. 들어갔는데 사명감 같은 게 느껴지더라고요. 우리나라의 한글이 기타 언어와는 다른 서사를 가지고 있잖아요. 정말 힘들게 살아남은 언어인데, 한글 체계 자체는 정말 훌륭했으니까 거기에 매료됐죠.


컴퓨터 전공자의 입장에서 언어라는 것도 결국 코드인데, 이 코드도 결국 효율이 중요하잖아요. 그런데 이보다 더 효율이 (한글보다) 좋은 문자체계는 없는 거에요. 압축비 최강인 거죠. 그렇게 한글의 위대함을 깨닫고 나니 애착이 가기 시작했죠. 학부생 때부터 올라온 연세대 출신이 아니다 보니까 걱정도 있었는데 다행히 저를 많이들 예뻐해 주셔서 지냈어요. 


엔지니어로서는 윈도우즈 프로그래밍보다 네트워킹에 관심이 가고 웹 기술에 관심이 가기 시작하더라고요. 당시에 인터넷이 들어오고 웹이 유행하면서 웹 디자이너 직군이 엄청 뜨기 시작하거든요. 아까 애니메이션 3인방 기억하시죠? (Q. 매일 프라모델 가게에 죽치고 있다가 취업까지 했다는?) 네, 그 3인방 중 한 사람이 김민수(편집자 주: 아이네트에서 송재경 개발실장과 <리니지>의 개발을 시작했던 인물, 이후 XL게임즈에 합류해 <아키에이지>를 개발)예요. 그때 민수가 취업을 고민하길래 게임 업계 가지 말고 웹 디자이너 가라고 그랬어요.


학부생 시절 친구의 집에서 처음 컬러 컴퓨터를 접한 채윤호 개발자. IBM PC AT와 EGA 그래픽카드 등을 볼 수 있다.


Q. 경험을 해보니 게임 업계는 돈이 안 될 거 같았으니까요?


A. 민수도 제대하자마자 방에 틀어박혀서 슈팅게임을 만들고 있었어요. 막고야 멤버들처럼 정말 순수하게 게임을 좋아하는 그런 사람이었죠. 종스크롤 슈팅게임을 만들었는데 스프라이트를 너무 잘 만들어서 아깝긴 했지만, 그래도 취업을 하려면 웹을 배워야 한다고 그랬죠. 시간이 지나서 민수가 웹 디자이너 면접을 봤는데 다음이랑 아이네트 두 곳을 다 붙었다는 거에요.


민수가 저한테 와서 '어디를 갈까?' 하길래 저는 다음을 추천했어요. 아이네트는 회선 사업자의 정체성이 강했지만, 다음은 포털 서비스 성격이 강하니까요. 다음이 웹 서비스에서 중심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웹 디자이너를 할 거면 다음을 가라고 했는데, 아이네트를 가더군요? 왜 그런가 봤더니 거기 게임팀이 있더라고요. 그게 첫 단추였습니다.


거기서 민수가 만난 상사가 송재경 당시 아이네트 게임 개발실장이었던 겁니다. 그분(송재경)이 당시에 신일숙 작가의 작품을 모조리 탐독 중이었다고 해요. 게임의 설정이나 시나리오는 '공돌이가 대충 해서는 안 된다'라는 철학을 앞장서서 가지고 계셨던 분이었고요. 송재경 실장이 <리니지>(만화)를 보고는 이걸 IP로 게임을 만들기로 한 거에요. 당시 신일숙 작가는 <윙크> 메인으로 일산 빌라촌에서 문하생을 데리고 작업할 정도로 유명한 분이었거든요.


송재경 실장이 한달 새 기획서를 막 만들어가지고, 일산까지 가서 허락을 받아온 거에요. 그 시점이 기획서는 있었지만, 거기 담을 멋진 그림이 없을 때였으니 마침 저랑 그림을 그리면서 일본 애니메이션 스타일을 섭렵한 민수가 딱이었던 거죠. 그렇게 민수는 웹 디자이너로 아이네트에 들어갔지만 사실은, 게임에 관심이 더 있었으니까 맞아 떨어진 겁니다. 둘이서 판타지 머드게임을 만들기로 하면서 <리니지>(게임) 프로젝트가 시작된 겁니다.



Q. 그게 이후 엔씨소프트로 넘어간 거고요.


A. 그렇죠.​ IT 업계에서 어떤 모임이든지 가면 누구나 큰형님으로 모시는 분이 계신데 바로 허진호 박사님이었어요. 넥슨도 그렇고 엔씨도 그렇고 카카오도 그렇고 서울대 86학번이 중심이다 보니까 그 인맥이 겹친단 말이에요. 허진호 박사님이 아이네트의 대표였고, 학교 후배였던 송재경 실장에게 방을 하나 내어주면서 <리니지>가 개발되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훗날 IMF가 터지고 <리니지>를 엔씨소프트가 가져온 겁니다.


아이네트 시절에는 채팅 기능, 걸어다니는 기능, 두 캐릭터가 서로 상호작용하는 아주 기초적인 기능이 만들어지고 있었죠. 싱크를 맞추는 그런 기본 기능이 완성될 무렵인데, 그때 캐릭터가 직업 2개(왕족, 기사), 성별 2개로 총 4종이었어요. 몬스터는 4종(슬라임, 장로, 괴물눈, 오크). 저는 계속 신촌(연세대) 랩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민수가 도와달라고 하더라고요. '뭘 도와달라는 거냐' 그랬더니 사운드 이펙트가 비어있다는 거에요. 


'알았어' 하고 끊었죠. 밤 11시에 역삼동으로 가서 송재경 실장과 민수와 저, 삼자 대면을 처음으로 했습니다. 그때 거기서 20개 정도의 사운드 이펙트를 만들었어요. 발자국 소리, 무기 휘두르는 소리, 맞는 소리, 쏘는 소리 이런 거를 만들어 줬죠. 잘 썼다고 하더라고요. 그 사건 이후로 계속 <리니지> 팀과 교류를 하​게 되었습니다.



Q. 엔씨소프트에는 어떻게 합류한 건가요?


A. 사운드 이펙트를 도울 때만 해도 엔씨에 합류할 줄 몰랐어요. 잠깐 가서 도운 거죠. 개발자로서의 커리어를 보자면 SE로 피봇을 하고 있었고, 게임으로 먹고살기 어려울 거 같았고, MS 제품군에 관한 공부에 관심이 있을 때입니다. MCP(마이크로소프트 인증 프로페셔널) 자격증이 있었거든요.



IT 기업에서 자체 자격증 제도가 유행할 때였어요. 커리큘럼을 만들고, 교재를 팔고, 비용을 받고, 온라인 단말기에서 시험을 보는 그런 것들이요. 그래서 당시 소프트웨어 기업들끼리 만나면 'MCP는 몇 명 땄어?'가 인사일 정도로 유행이었어요. 제가 공부했던 것들이 MCP 과목들이랑 겹쳤으니까 96년부터 그 자격증을 가지고 있던 거죠. 그때는 그걸 갖고 있던 사람이 많지 않았어요.


MS 제품을 유통하던 협력사를 'MS 솔루션 프로바이더'라고 불렀거든요. 주로는 윈도우즈 OS를 파는 회사들, 그리고 오피스와 백오피스를 파는 회사들이 있었는데 제품만 파는 게 아니라 그때부터 솔루션이라는 개념을 같이 팔기 시작했어요. 'MS를 도입하면 이런 식으로 제품을 써야 해'라는 방법까지 같이 알려주는 거죠. 당시에는 '솔루션 프로바이더'라는 협력사 제도를 통해 제품 교육을 받은 엔지니어를 제품과 함께 투입하는 형태로 서비스를 운영했습니다.

이 조건이 되려면 MCP 자격을 가진 사람이 한 명은 있어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그 위에 '솔루션 파트너'가 있고 거기에는 MCP 2명이 필요했고요. 그런데 엔씨소프트가 솔루션 파트너였더군요. 솔루션 프로바이더로 유명한 회사가 다우데이타 같은 데였는데, 솔루션 파트너는 우리나라에 엔씨소프트 하나였어요.


그러다가 (편집자 주: 1997년 12월) 아이네트가 게임팀을 구조조정했고, <리니지> 제품과 사람이 엔씨소프트로 넘어갔던 겁니다. 송재경 실장은 엔씨로 넘어갈 때 김민수를 데리고 갔고, 엔씨로 넘어간 후에는 '쟤(채윤호) 좀 뽑아주세요' 했던 겁니다. 마침 저에게는 MCP가 있었던 거고요.



Q. 처음에는 회사 일과 학업을 병행한 건가요?


A. 일주일에 하루에서 이틀은 대학원에 종일 있어야 했습니다. MS가 지금 포스코센터에 있었고 저희 회사는 바로 건너편 승광빌딩에 있었죠. <리니지>를 담당하면서 MS 담당자도 겸했어요. 제 인생에서 가장 바쁜 시간이었습니다. 오전에 대학원 수업 듣고, 오후에 랩에서 일하고, 저녁에 엔씨에 출근해서 밤새고, 다시 수업을 듣을 때였죠.


그때 우리나라 컴퓨터 전공자에게 가장 좋은 직장이 어디냐면 여의도였어요. 증권과 금융에 전산화가 도입될 무렵이라서 여의도에는 개발자 치고는 굉장히 좋은 조건의 직장 초년생들이 많았죠. 전산화는 막 끝나던 참이고 IMF가 터졌으니까 어떻게 됐겠어요? 다 잘렸죠. 사람들 다 해고될 때 저는 역으로 IT 회사에 새로 취직한 셈이 됐죠. 그게 엔씨에서의 저의 시작이고, 게임 커리어의 재시작입니다. (계속)


채윤호 개발자가 공유한 엔씨소프트의 초창기 로고

[도움 주신 분: 송용성, 오영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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