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2월 15일, 서울은 폭설에 덮였다. 시간당 5cm의 눈이 쏟아졌다. 당일 23.4cm의 눈이 쌓였다.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도 쌓인 눈의 무게를 못 견뎠다. 지붕의 일부가 찢어져 나갔다. 역사에 남을 유례없는 폭설이었다. 서울은 하루 종일 새하얀 교통지옥이 됐다.
네이버와 한게임도 같은 날 지옥 같은 시간을 경험했다. 한게임은 이날 서울 조선호텔에서 유료화 간담회를 진행했다. 한해 전 네이버와 한게임은 역사적인 합병을 했다. 시너지가 바로 나타나지는 않았다. 두 회사 모두 뚜렷한 수익모델이 없었다.
네이버는 5등이었다. 다음과 야후, 라이코스, 네띠앙이 그 앞에 있었다(2000년 7월 기준). 엠파스는 세차게 따라붙고 있었다. 한게임은 전해 12월 정식 오픈 후 3개월 만에 100만 명 넘게 회원이 늘었다. 비용은 더 들었다. 돈은 못 벌었다. 투자금은 줄어가고 있었다. 많은 기억들이 버블 붕괴 속에 쓰러져가고 있었다. 한게임의 유료화가 그만큼 중요했다.
한게임만 그랬던 것은 아니다. 2000년 전후 캐주얼게임의 유료화 과정은 꽤 험난했다. 엠플레이의 <퀴즈퀴즈>는 정액제 전환 이후 50% 가까운 유저가 이탈했다. PC방에 과금했던 CCR의 <포트리스2 블루>는 PC방 업주들과 강경하게 대치했다. 한게임의 유료화도 성공 여부가 확실치는 않았다.
한게임 기자간담회 시작 시간, 행사장에 있던 기자는 두 명이었다. 유례없는 폭설에 기자들도 발이 묶였다. 비슷한 시간 라이코스 코리아의 기자간담회가 진행되고 있었다.
나는 그날 현장에 있던 두 명의 기자 중 하나였다. 오래 전 일이라 솔직히 기억나지 않는다. 채선주 현 네이버 이사 등 당시 관계자들이 그렇게 증언한다. 회사가 종로에 있었고, 라이코스보다 한게임에 관심이 많았으니, 내 판단에도 나는 거기 갔을 것 같다. 간담회가 진행되는 중에 다른 기자들도 늦게 합류했다고 한다.
한게임의 유료화 발표는 고난 속에 별로 관심도 얻지 못했다. 전례도 없었다. 유저가 떠날 것이라는 두려움도 많았다. 한게임은 기자간담회 18일 후인 2001년 3월 5일 오전 7시 유료화를 단행했다. 대성공이었다. 첫 날 9,500만원을 벌었다. 유료화를 결정했던 김범수, 유료화 모델 개발을 책임진 김정호, 실무를 담당했던 남궁훈 등은 이해진, 오승환, 김희숙 등 창업멤버와 함께 회사 근처에서 즐겁게 소주를 마셨다.
유료화 이후 1주일 만에 3억 원의 매출을 올렸다. 다른 유료화 모델들이 추가됐고, 6월 이후 매달 10억 원 이상의 수익이 났다. 한게임은 수익이 신통치 않았던 네이버의 확실한 캐시 카우가 됐다.
한게임 유료화는 기존 게임을 무료로 계속 제공해 사용자들의 반발을 줄였다. 월 4,000원의 정액 프리미엄 서비스와 100~600원의 1일 아이템 도입은 오히려 유저 수를 늘렸다. 10만 명 정도였던 동시접속자 수가 4개월 뒤 13만 명까지 불었다. 다른 게임과 달리 30~40대 유저가 많은 점이 유료화에 도움이 됐다. 이들이 전체 결제액의 60% 가량을 지불했다.
네이버의 결제 관련 기술력이 한게임의 프리미엄 서비스를 도왔다. 한게임 유료화 버프를 받은 네이버는 쑥쑥 커나갔다. 다음과 야후, 엠파스를 제칠 동력을 얻었다. 한게임은 해외 시장 진출과 라인업 확대를 추진할 수 있었다. 오늘날의 네이버와 NHN엔터테인먼트 성공 뒤에는 2001년 3월 5일의 결정적인 하루가 있었다.
참고로, 한게임의 프리미엄 서비스는 게임 부문 세계 최초의 부분유료 모델이었다. 한 달 뒤 <퀴즈퀴즈>가 아이템 판매라는 새로운 부분유료화 모델을 가지고 나왔다.
- 2001년 3월 5일 한게임 부분유료 서비스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