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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TIG 20] 한국에서 역사 게임 개발이 더럽게 어려운 이유

우티 (김재석) | 2025-05-12 17:24:15

당신은 한국에서 역사 소재 게임을 만들기로 결정했습니다. <아스달 연대기> 같은 판타지는 '역사'가 아니라는 점부터 분명히 합시다. 혹시 <환단고기>로 게임을 만들고 싶나요? 좋은 아이디어입니다. 아무쪼록 당신의 행운을 빕니다.

'역사' 소재 게임을 만들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할까요? 일반론적인 접근을 해봅시다. 때론 일반론이 제일 좋은 법이거든요.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인물, 플롯, 사상 등을 비극의 핵심 요소로 정의했습니다. 이 기준은 현대에 들어서도 얼마 변하지 않았습니다. '소설의 3요소'로 인물, 사건, 배경이 꼽히고 있거든요. 

하나씩 살펴봅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저는 지금 당신에게 '한국에서 역사 게임 개발은 더럽게 어렵다'라고 말하려고 합니다.



# 인물

먼저 인물입니다. 지난해 갤럽이 조사한 '한국인이 존경하는 인물'을 봅시다. 당신은 이순신 장군과 세종대왕의 이름을 발견합니다. 이순신 장군과 세종대왕을 소재로 한 좋은 게임을 만들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런! 박정희, 노무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이름이 보입니다. 정치인을 역경을 소재로 한 게임을 만들 수도 있겠지만, 위험하다는 생각이 당신의 뇌리를 스칩니다. 맞습니다. 그건 상당히 위험한 결정입니다.

한국갤럽, 한국인이 존경하는 인물(2024). 부모님께 잘합시다...

현대사의 정치인들을 빼고 탑 10에는 정주영 현대그룹 설립자, 김구, 안중근, 유관순 독립운동가, 그리고 부모님이 이름을 올렸습니다. 부모님을 아무리 사랑하고, 부모님의 일대기가 재밌도 역사 게임으로 공감대를 얻기는 쉽지 않습니다. <폭삭 속았수다> 게임판이 나와도 괜찮을 듯한데, 아무튼 이번 기획에서는 '부모님'은 제외합시다. 그래도 당신은 가정의 달을 맞아 부모님께 효를 다하기로 결심합니다. 효도는 좋은 거니까요.

그러면 당신의 후보군은 이순신, 세종대왕, 정주영, 김구, 안중근, 유관순 정도로 좁혀집니다. 다행입니다! <불멸의 이순신>, <뿌리 깊은 나무>, <영웅시대>, <항거>, <하얼빈>, <다찌마와 리: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 등의 드라마와 영화가 떠오릅니다. 당신은 이런 레퍼런스를 참고하면서 게임의 얼개를 짭니다. 꼭 '한국인이 좋아하는 인물'로 게임을 만들어야 할 이유는 없으니까, 당신은 이완용 같은 사람으로 게임을 만들어도 좋겠다고 상상합니다.

그러다 당신은 문제점을 발견합니다. 대한민국에는 아직 강력한 종친회 질서가 남아있습니다. 당신의 게임이 훗날 성공한다고 해도 종친회의 마음에 들지 않는 묘사가 있었다면 원치 않는 분쟁에 휘말릴 수 있습니다. 여기는 조선이 아니라 한국인데 말이죠. 최근 문화체육관광부와 국가유산청은 최근 조선의 역대 왕의 신주를 종묘에 환안(還安)하는 행사를 아주 크게 열었다고 합니다. 역사 문제는 한국인의 정신세계에 대단히 중요하게 작용하나 봅니다.

종친회는 아직 유구한 전통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종친회는 조상을 모십니다. 그래서 전주이씨 종친회는 <조선구마사>의 방영 중단을, 김해김씨 종친회는 드라마 <김수로>의 방영 중단을 요구했습니다. 노이즈 마케팅을 즐기는 쪽이 아니라면, 당신에게 종친회의 존재는 역사 게임 창작에 반가운 대상은 아닙니다. 물론 종친회에 계신 분들께서 당신 게임을 못 보고 지나갈 확률도 있을 테지만요.
2023년 <대항해시대 오리진>에 업데이트된 이순신. 한국인이라면 이순신을 좋아하기 때문에 당연 캐릭터로 추가하는 것을 좋아하지만, 그 이상의 시도는 좀처럼 주목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TS(Trans-Sexual) 같은 대범한 시도는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습니다. 일본 <페이트>의 아서왕은 괜찮을지도 모르지만, 한국에서는 괜찮지 않습니다. 이순신을 여성 캐릭터로 만들었다가 당신은 덕수 이씨 대종회의 항의를 받을 수 있습니다. 농담이 아닙니다. 당신은 내친김에 원주 원씨가 원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입장까지 확인했습니다.

여기까지 왔으니, 당신은 이웃나라 일본 사례도 참고합니다. <어쌔신 크리드: 섀도우즈>의 주인공 야스케는 흑인 사무라이입니다. 실존하는 인물 레퍼런스도 존재한다는데, 적지 않은 일본인이 야스케의 존재를 부정적으로 평가했습니다. 흑인 사무라이가 나오는 것이 "모욕"이라고 합니다. 당신은 '사무라이가 그렇게 대단한 건가' 하면서, 하멜이나 허황후 케이스도 메모합니다.

<킹덤 컴>의 헨리처럼 창작인물을 역사의 공간 속으로 던져넣는 방법도 좋습니다. 가상인물 표토르가 최재형, 안중근, 홍범도 등 독립운동가들과 만나는 자라나는씨앗의 <MazM: 페치카> 사례도 있습니다. 이렇게 당신은 ⓐ 소개가 가능하고 ⓑ 종친회가 싫어하지 않으며 ⓒ 아무튼 한국인이 호감으로 여길 인물들을 골랐습니다.

독립운동사를 소재로 한 몇 안 되는 국산 게임 <페치카>

# 사건

한반도는 유구한 역사를 자랑합니다! <킹덤 컴>이 후스 전쟁을 전 세계에 알렸듯 당신도 세계인에게 한국의 역사를 알릴 수 있을 겁니다. 반만년 역사에는 무수히 많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당신은 당신이 선택한 인물에 맞는 사건을 찾아 나섭니다. (반대로 사건을 정하고, 거기에 맞는 인물을 골랐을 수도 있겠군요.)

잠깐 생각해 볼까요? 당장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떠오르고, 삼국통일전쟁과 이어지는 나당전쟁이 떠오릅니다. 고구려가 수나라, 당나라를 무찌르는 모습을 게임으로 만들면 얼마나 멋있을까요? 아니면 가상의 독립운동가를 만들어 일제에 맞서 저항하는 이야기를 3D 액션 활극으로 만들면 얼마나 재미있을까요? 여요전쟁이나 여몽전쟁에는 극적인 장면이 얼마나 많았나요? 당신은 상상만으로 즐거워집니다.

그러다가 당신은 문제에 봉착합니다. 참고할 사료 자체가 생각보다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철저한 고증과 픽션의 가미 사이에서 고민합니다. 일례로 삼국시대를 다루는 '토착' 사료는 없습니다. 모두 후대에 쓰였다는 뜻입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가 있겠지만, 전자는 고려의 시선에서 쓰인 간행물이고 후자는 민담과 불교 전승을 전하는 데 집중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두 권의 책이 훌륭한 사료이지만, 훌륭한 역사서인지 걱정합니다.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 전공자가 아니기 때문에 말을 얹기는 어렵지만,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두 개의 문헌자료에 대한 아쉬움이 일부 있습니다.

참고할 사료가 마땅치 않다 보니, 당신은 한국의 사극 애호가들이 말하는 '또말선초'(또 고려말 조선초)의 사정을 어느 정도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여말선초는 정치극으로 쓰기에 재미도 있고, 자료도 많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5,000년 역사에서 여말선초처럼 사료가 분명히 남아있는 케이스가 드물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살수대첩을 소재로 게임을 만들겠다면, 당신은 적잖은 상상력을 동원해야 할 것입니다.

<조선왕조실록>이 남아있는 조선 이후의 역사를 제외하고는, 한반도에서 명멸한 왕조에 대한 객관적 기록은 많지 않습니다. 당신은 한국사 시간에 발해에 관한 설명이 그렇게 짧았던 이유를 다시 깨닫습니다. 당신은 '부적' 삼아서 게임 시작 전에 '이 게임은 역사 요소를 참고한 것', 또는 '제작진의 재해석이 추가됨' 같은 문구를 넣기로 합니다. 코에이 <삼국지>에서처럼 정사에서의 기록과 후대의 해석을 같이 넣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그럼에도 당신은 '어디까지 창작인가' 계속 번민하며 게임을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천년의 신화>에 나오는 세 왕(광개토대왕, 근초고왕, 무열왕)은 다른 시대의 왕입니다. <임진록 2>의 성공 이후 발매된 <임진록 2+ 조선의 반격>은 이순신 장군이 전사하지 않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맞서 일본 열도로 파병한다는 대체역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2020년대에 와서는 RTS 인기가 한풀꺾였기 때문에 이런 기획이 먹힐까 의문이 들겠지만, 이번 기사에서 우리는 장르 문제를 논외로 합니다.

<임진록 2+ 조선의 반격>. 고니시가 임진왜란 이후에 SOS를 치러 조선에 왔다니 지금 봐도 대범한 해석입니다.

역사 속에 분명히 일어나지 않은 가상의 사건을 만들고 거기에 배경을 붙이는 아이디어가 떠오릅니다. <수호신>은 프랑스 개발사가 만든 조선 배경 게임입니다. 한국의 민담을 소재로 무과에 급제한 선비가 정체불명의 연쇄살인 사건을 조사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청구야담 팔도견문록>은 동명의 '야담집'을 추리게임으로 변주한 것입니다.

이윽고 당신은 중국의 동북공정이나 일본의 역사공정을 바라봅니다. 아울러 '고구려사, 발해사는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지, 한국의 역사인가'라는 질문도 품습니다. 이어서 '외국인이 한국사를 얼마나 좋아해 줄까'라는 걱정까지 듭니다. 이런 고차원적인 문제에 당도할 때면, 당신은 역사게임 만드는 일이 피곤하게 느껴집니다.


# 배경

당신은 가까스로 배경까지 왔습니다. 축하합니다. 인물, 사건, 배경에 순서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수십 년 대한민국 게임사(史)에서 여기까지 온 게임사(社)는 많지 않습니다. 당신은 한국의 배경을 살펴봅니다. 삼천리 금수강산은 얼마나 아름다운가요! 당신은 필요하다면 남쪽의 제주도와 드넓은 만주벌판을 직접 답사하러 떠날 수 있습니다.

아, 물론 당신이 군사분계선 이북으로 갈 방법은 없습니다. 이건 얄짤 없습니다. 당신은 통일부에 '게임 개발을 위해 고려의 사적을 보러 가고 싶다'며 '방북승인신청서'를 낼 수 있겠습니다만, 가능성은 극히 희박합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꼭 현장에 가봐야 역사 게임의 배경을 만드는 것은 아니니까요. 안타깝게도 그곳(개성)에 로드뷰는 없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당신은 게임 뉴스를 찾아보다가 자민당 의원이 직접 <어쌔신 크리드 섀도우즈>를 저격한 사건을 발견합니다. 카타 히로유키 의원은 "유비소프트는 신사에 대한 활용 허가 관련 연락을 일절 구하지 않았으며, 이는 다른 나라의 문화를 가볍게 여기는 행위"라 비판했습니다. 유비소프트는 데이원 패치를 통해서 신사에서 특정 행위를 못하게 막았습니다.

당신은 실제 역사 건물을 사용할 경우 관련 허가를 받아야 할 수도 있다는 점을 깨닫습니다. 그렇다면 펄어비스의 <검은사막> '아침의 나라'처럼 아름다운 광경만 나와야 할지도 모릅니다. 경주시는 천년고도 서라벌을 3D로 재현한 영상을 공개했는데, 이런 자료는 좀 쓸만할 것입니다. 황룡사는 불에 탈 수 있겠지만, 불국사를 훼손하는 행위를 게임에 넣었다가는 곤경에 처할 수 있을 테니 당신은 이 점을 유념합니다.

경주시청이 공개한 신라왕경 핵심유적 복원·정비 프로젝트 중 3D화된 금성(경주의 수도) 전경


'아침의 나라: 서울'의 스크린샷

배경이란 시공간적 환경만을 의미하지 않고, 사회·문화적 맥락까지 포함합니다. 당신은 당대인들이 어떤 사회·문화적 맥락을 가지고 살았는지 이해하려 노력합니다. 백제인에겐 백제인의 맥락이, 식민지 경성 사람에게는 그들 나름의 맥락이 있을 테지요. (대체로 별로 없겠지만) 주어진 사료가 허락하는 한, 당신은 그들의 사회·문화적 맥락을 참고하고 연구하며 창작의 살을 붙입니다.


바로 오늘(2025년 5월 12일), 위안부 피해자 이옥선 할머니께서 별세하시면서 생존자는 여섯 분 남으셨지요. <웬즈데이>는 3D 포인트앤클릭 스토리 어드벤처 게임으로 주인공 '순이'가 1992년과 1945년을 오가며 민간인 생체 실험, 난징대학살, 위안부 만행 등 일본군의 전쟁범죄를 추적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게임은 현재 판매가 중단됐습니다. 그 이유는 직접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좋은 취지로 개발된 게임이라 하더라도 게임의 완성도가 떨어지거나, 현대의 사건사고와 연루되거나, 역사고증을 틀리면 당신은 거센 비판을 마주해야 합니다.

여러 문제에 휘말렸던 게임 <웬즈데이>

# 한국사 게임, 쉽지 않네

어느 게임이 안 그러겠습니까만, 당신이 한국에서 한국사를 소재로 한 게임을 만들 때에는 보다 섬세한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게이머만 신경 써야 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종친회, 지자체, 역사가, 시민단체 등등의 동정을 두루 살펴야 합니다. 모든 허들을 넘기고 출시된다고 하더라도 수익 문제에 봉착할 겁니다. 지난해에만 약 18,900개의 게임이 스팀에 출시됐는데, 한국사라는 주제가 글로벌 게이머에게 얼마나 소구력이 있을지 따져야겠죠. 단적으로 말해서 글로벌 플랫폼에서 애국 마케팅이 통할까요?

이래도 한국에서 역사 게임에 도전하려 하십니까? 그렇다면 디스이즈게임은 당신의 도전을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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