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비트 스튜디오의 <디스 워 오브 마인>, <프로스트펑크>는 '재미와 임팩트를 모두 잡은 게임'의 목록을 만들 때 빠지는 법이 없는 이름들이다(그 리스트가 별로 길지도 않다). 본격적 임팩트 게임으로 분류되지는 않지만, 사회와 인간 본성을 돌아보게 하는 효과의 측면에서는 부정하기 힘든 존재감이 있다.
지스타 2024에서 연사로 나선 야쿱 스토칼스키 디렉터와 루카시 유슈치크 디렉터를 직접 만나 이야기할 기회를 얻었다. 이들은 1편의 팬들이 사랑했던 요소가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하면서도, 그 성공 공식을 반복하는 대신 이른바 '미움받을 용기'를 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자세히 들어봤다.
Q. 대부분의 한국 게이머들이 여러분을 알 것 같지만, 그래도 소개를 부탁한다.
스튜디오의 최신작 <프로스트펑크 2>의 유저 평가는 전편보다 조금 떨어진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특히 1편과 달라진 게임의 정서에 불만을 갖는 유저가 상당수다. 한 명 한 명의 생존이 피부에 와닿았던 1편과 비교해 규모가 커져 버린 2편은 몰입감이 부족하며, 그 결과 임팩트도 이전과 같지 않다는 것.
(왼쪽) 루카시 유슈치크 디렉터, 야쿱 스토칼스키 디렉터
Q. 대부분의 한국 게이머들이 여러분을 알 것 같지만, 그래도 소개를 부탁한다.
A. 야쿱 스토칼스키 디렉터(이하 스토칼스키): 우리는 폴란드의 11비트 스튜디오다. 2010년 창립했으며 초기에는 <어노말리> 시리즈와 같은 멋진 모바일게임들로 사업을 시작했다.
스튜디오의 전환점이 된 것은 <디스 워 오브 마인> 출시였다. <디스 워 오브 마인>은 전시의 민간인을 소재로 한, 독특한 생존 게임이다. 아마 우리 스튜디오에서 가장 인기가 좋은 게임 중 하나일 거다.
<디스 워 오브 마인>의 큰 성공 덕분에 스튜디오는 성장했다. 덕분에 <디스 워 오브 마인>의 의미 있고 진지한 톤을 한 단계 상승시킨 후속작 <프로스트펑크>를 만들 수 있었고, 이 또한 큰 성공을 거뒀다. 최근에는 <프로스트펑크 2>를 출시했으며 그 외 퍼블리싱 사업을 포함해 다양한 프로젝트를 동시에 진행 중이다.
Q. <디스 워 오브 마인>, <프로스트펑크 2> 등 사변적인 게임 제작에 집중하고 있는데, 정확한 이유가 뭔가? 단순히 팀원들이 거기에서 재미를 느끼기 때문인지, 아니면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어떤 사명(mission)을 품고 있는 것인지 궁금하다.
A. 루카시 유슈치크 디렉터(이하 유슈치크): 방금 스토칼스키가 얘기한 것처럼, <디스 워 오브 마인>의 출시가 우리에게 전환점이 됐다. <디스 워 오브 마인>을 통해 우리의 사명이 무엇인지, 스튜디오가 추구할 만한 의미 있는 작업이란 무엇인지 정해진 것 같다. 이후로 프로젝트들에 그러한 의식을 담아내고 있다.
궁극적으로는 개발사로서의 책임을 다하려는 것뿐이다. 플레이어의 경험과 시간, 그리고 우리 팀원들의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 게임을 만드는 것 말이다.
A. 스토칼스키: 개인적으로는 ‘다 함께 세상을 바꾸자’ 류의 소명의식에 따른 것만은 아닌 듯하다. 그보다는 ‘가치 있는 일에 시간을 쓰고 싶다’는 내적 요구에 따른 것 같다. 재미 이상의 무언가를 제공하는 게임을 만드는 일이 그것이다. 재미만을 추구하는 게임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우리는 게임이 그보다 훨씬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매체라고 생각한다.
Q. 게임에서 사회학, 정치, 역사에 관한 개발진의 소양이 자주 드러난다. 일상적으로 어떤 매체를 소비하며, 어떤 식으로 게임의 주제를 연구하는지 알고 싶다.
A. 유슈치크: 좋은 질문인데 조금 다른 각도에서 답변해 보겠다. 사회학을 공부하던 대학 시절 내 어머니께서는 “루카시, 전공 공부는 끝마쳐야 한다. 언제 써먹게 될지 모르니까”라고 자주 말씀하셨다.
당시엔 어려서 별로 귀담아듣지 않았지(웃음). 그런데 졸업 후 11비트 스튜디오에 입사해서 진짜로 사회 문제를 다루게 되었다. 다행히 함께 일하는 스토칼스키는 심리학 전공이었다. 이렇듯 둘 다 인문과학 전공자다 보니, 자연스럽게 게임의 주제에 관심을 가질 수 있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무얼 보며 사는지 물었는데, 세상만사라고 보면 되겠다. 기본적으로 관찰을 좋아한다.
A. 스토칼스키: 우리 외에도 변호사 출신, 뇌신경학자 출신 등 팀원들의 배경이 다양하다. 각양각색의 출신과 경험을 지닌 사람들이 협업하면, 상이한 관점을 공유하게 되고 서로가 놓친 중요한 요점을 지적하며 흥미로운 대화가 오갈 수 있다.
우리가 무슨 어려운 책을 매일 읽는 건 아니다. 일반적인 매체들을 소비하지만 똑같은 것을 보면서도 더 많은 궁금증을 품고 더 깊이 살펴보는 성향이 있기는 하다.
한편 주제 연구는 따로 많이 한다. 관련 서적을 찾아보거나 영화를 시청하고, 혹은 아예 학술 연구 수준으로 논문을 찾아 읽기도 한다. 가령 <프로스트펑크> 1편을 만들 때는 극한 상황에서의 인간 행동을 다룬 논문을 수십 편 본 기억이 난다. 2편 제작 때도 마찬가지였다. 여러 사회 구조의 역사, 정책 결정의 방식, 각종 사상의 탄생과 소멸 등 고전적인 연구 주제를 많이 살펴봤다.
A. 유슈치크: 별개로 대중문화에 대한 연구도 한다. 예를 들어 이번 출장에서는 둘이서 <릭 앤 모티>에 관해 작품 구조 전체를 분석하는 수준으로 한참 얘기했다. <프로스트펑크 2> 프리프로덕션 단계에서는 포스트아포칼립스 영화의 구조에 관해 읽기도 했다.
Q. <프로스트펑크 2> 얘기를 해보자. 이번 작품에서는 전편에 비해 도시의 규모가 월등히 커지면서, 유저가 느끼는 시민과의 심리적 거리가 더 멀어졌다. 이 변화는 별도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함인가, 아니면 단순히 게임플레이를 전편과 차별화하기 위한 선택이었나?
A. 스토칼스키: 우리의 의도적 선택이라기 보다는, 어쩔 수 없는 귀결에 가깝다.
<프로스트펑크 2>의 창작 방향성에 있어 내가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 어디에도 ‘디자인 자체를 위한 디자인’은 넣지 않는다는 거다. 가령 ‘오로지 전편과 다르게 하기 위한’ 디자인 같은 건 들어 있지 않다.
<프로스트펑크 2> 프로젝트의 시작을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프로스트펑크 2>는 처음부터 무조건 제작이 확정된 작품이 아니었다. 11비트 스튜디오는 분명히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 때만 새 게임 개발에 착수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프로스트펑크> IP를 활용해 새 작품을 만들고 싶은 게 우리 마음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후속작에 표현할 만한 의미 있는 다음 이야기를 찾을 수 없다면, <프로스트펑크 2> 제작도 보장할 수 없던 상황이다.
※<프로스트펑크> 스포일러 주의 - 그런데, <프로스트펑크> 1편의 엔딩은 영하 150도라는 종말적 상황에서 살아남는 것으로 끝난다. 그렇다면 뒷이야기를 어떻게 이어 가야 완성도 높으면서 지루하지도 않은 이야기가 될 수 있을까? 다음은 뭐지? 인류의 미래를 가로막을 새로운 ‘적’은 뭘까?
‘자연’(nature)이 아닌 ‘인간 본성’(human nature)이 새로운 적이 되어야 한다는 게 우리 결론이었다. 인간 본성에 뒤따르는 분열, 극단화, 갈등이야말로 궁극의 위협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를 하려면 전편과는 많은 것이 달라져야 했다. 그러니까, 40일 만에 사회가 극단화해서 뒤집힐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나? 인게임 시간이 더 길어야 했다, 도시 규모를 비롯해 모든 것이 더 커져야만 했다. 따라서, 도시가 확대되고 시민과의 거리가 멀어진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상이지 의도한 바가 아니다.
A. 유슈치크: 또한 잘 살펴보면 시민과의 애착을 형성하기 위한 여러 수단이 인게임에 마련되어 있기는 하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당신의 생각에 동의한다. 분명히 1편과 비교해 유대감 형성이 분명하지 않고 어려운 부분이 있다.
재미있는 건, 우리 자신도 이전에 똑같은 고민을 했었다는 거다. <디스 워 오브 마인> 이후 <프로스트펑크>를 개발했을 때, 우리끼리도 카메라와 함께 유저들도 캐릭터들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우려했었다.
A. 스토칼스키: 맞다. 원래는 4명의 시민 이야기였는데, 80명으로 시작하게 되었으니까.
정말 재미있는 지점이다. 얼마 전에 관련해서 한 <프로스트펑크 2> 유저가 쓴 글을 봤다. 글의 내용은 이렇다. 다른 유저들이 <프로스트펑크 2>을 <프로스트펑크> 1편과 비교하며 게임 규모와 감정적 거리감을 비판하고 있는데, 그 비판 논리가 <프로스트펑크> 1편 출시 당시 <디스 워 오브 마인>과 비교하며 나왔던 논리와 완전히 똑같다는 거다. 그래서 어쩔 수 없는 현상 같다고 느꼈다.
Q. 전편과의 또 다른 큰 차이는 ‘파벌’ 시스템이다. 2편의 파벌들은 게임오버 상황도 만들어 내고, 도시의 앞날에도 깊이 관여하는 존재들이다. 그러다 보니 실제 시민들이 겪고 있을 고충보다는 파벌들의 요구와 비위에만 신경을 쓰게 되더라. 현실 정치의 풍자를 의도한 것인지?
A. 스토칼스키: 얘기한 대로의 효과를 내는 장치가 많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우리가 그런 효과를 구체적으로 의도한 게 아니라는 거다. 정치라는 게 원래 그렇게 생겨 먹은 것(it is what it is)일 뿐이다.
규모가 커지면 자체적 의지를 가지고 움직이는 사회 체계의 본질을 부분적으로 담아냈다고 생각한다. 그 안에서 당신은 모두의 생존을 위해 여러 의제를 조율해야만 한다. 궁극적 목표는 분명 시민의 생존일진대, 정작 신경 쓰게 되는 건 시민이 아닌 정치적 관계들이다.
A. 유슈치크: 당신이 그런 깨달음을 얻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든다. 다음은 그 생각을 어디로 이어 나갈 것인지다. 예를 들어 이전에 질문했던 ‘유대감이 느껴지지 않는 이유’와도 연결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마 커다란 이념들이 부딪히는 가운데 개인이 가려지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듯, <프로스트펑크> 1편의 경험을 그리워하더라도 2편을 통해 새로 얻은 깨달음에서 만족을 얻을 수 있다. 플레이어들이 게임을 서로 다르게 해석하고, 새 의미를 찾는 모습을 보는 게 우리의 기쁨이다.
G-con 강연에서도 이 얘기를 할 예정이다. 2편을 지금과 같은 형태로 만드는 것이 정말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유저들이 우리의 차기작에 특정한 유형의 기대감을 가진다는 걸 알면서도, 그들을 실망시킬 위험을 감수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랬듯 플레이어들도 위험을 감수하고 새 경험을 받아들이기를 강력히 권하고 싶다. 게임이 기대와 다를 때, ‘그럼 대체 개발진은 무슨 얘길 하고 싶어서 이렇게 만들었나’ 생각해 보는 거다.
Q. <프로스트펑크> 1편의 정책 결정들은 유저에게 도덕적 딜레마를 직접 던져서 유저를 고민에 빠뜨렸다. 반면 이번 게임은 유저 내면의 도덕적 기준을 은연중 전복하려는 것처럼 느껴진다. 정말 그런 의도가 있었는지, 나의 과한 해석인지 궁금하다.
A. 스토칼스키: 분명히 나올 수 있는 해석이라고 본다. 유저를 조종(manipulate)할 의도는 물론 없었다. 하지만 우리가 게임에 표현한 요소들로 인해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는 그림이다. 유저는 서로 다른 파벌들의 요구들 속에서 미래를 찾아 나서야 하고, 그 과정 중에 동의할 수 없는 결정에 따르게 될 수도 있다. 이것은 유저 내면에서 펼쳐지는 하나의 내러티브로 볼 수 있다.
처음부터 그런 것을 의도했던 것은 아니지만, 게임의 모든 요소들을 의미있게 마련해 넣었기 때문에 방금 말한 것과 같은 ‘권력은 사람을 어떻게 바꾸는가’와 같은 메시지도 전달될 수 있는 것 같다. 또한 아까 말한 ‘시민들과의 거리감’이 어떻게 도덕성 상실로 이어질 수 있는지에 대한 흥미로운 고찰 같기도 하다.
A. 유슈치크: 우리가 개발에 참고한 사회학 이론 중 ‘오버톤 윈도’(overton window)라는 게 있다. ‘끓는 물 속 개구리’와도 비슷한 개념이다.
* ‘오버톤 윈도’는 사회 구성원들이 ‘허용 범주’로 여기는 사회적 결정의 범위에 관한 이론이다. 이론에 따르면 사회는 ‘오버톤 윈도’를 벗어나지만 않는다면 한 방향으로 치우친 결정이어도 쉽게 선택한다. 다만 이러한 경향이 지속되다 보면, 어느새 맨 처음과 비교해 한쪽 극단에 해당하는 제도에까지 도달할 수 있다.
오버톤 윈도 이론에 따르면 특정 시점에는 사회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선택지’였던 것이, 다른 시점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을 수 있다. 위기에 처해 있는 사회는, 평화로운 시기의 사회와는 전혀 다른 사회적 관념들을 받아들이기 마련이다.
지구의 종말을 피할 수 없고, 일주일 만에 생존 대책을 세워야 하는 1편의 상황에서라면 선택지들이 더 엄격하고 분명한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2편은 그 뒤로 오랜 시간이 지난 시점이기 때문에, 다른 유형의 사회 정책들이 고려될 만하다. 그래서 1편과 2편의 정책이 주는 느낌이 다를 수 있다.
Q. 지역별로 게임에 대한 반응이 상당히 다를 것 같다. 한국 유저들에게서 유독 두드러지는 반응 같은 것이 있었나?
A. 스토칼스키: 한국을 포함해 동아시아권 게이머들은 서양권과 비교해 2편이 1편과 같지 않다는 사실에 불만족한 유저의 비율이 더 높게 나타난다. 1편의 생생한 생존의 감정 등을 더 사랑하는 것 같다.
Q. 마지막으로 <프로스트펑크 2>와 11비트 스튜디오의 앞날에 관한 여러분의 계획을 공유해주길 바란다.
A. 스토칼스키: <프로스트펑크 2>는 두 달 전에 출시해서 지금까지 벌써 어마어마한 양의 패치가 이뤄졌다(웃음). 이전부터 계획했던 대로이고, 앞으로도 이렇게 <프로스트펑크 2>를 지원하고 확장해 나갈 것이다.
출시 시점부터 아주 많은 피드백을 받고 있다. 이 중 일부는 기술적인 것들로, 최대한 빨리 해결해 나가고 있다. 한편 유익한 비판도 많이 받고 있다. 이러한 피드백을 잘 종합해서 패치로 고쳐나갈 것이다. 또한 DLC도 분명히 출시된다. <프로스트펑크 2>의 정체성을 확장해 나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
11비트 스튜디오 전체를 보자면 <디 알터스>가 출시될 예정으로, <프로스트펑크> 시리즈와는 완벽하게 다른 팀이 만든 완벽하게 다른 콘셉트의 아주 멋진 게임이다.
마지막으로, <프로스트펑크> IP는 우리가 계속 다루고 싶은 세계다. 현시점에서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없지만,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A. 유슈치크: <프로스트펑크> 1편에서 그랬듯, 당연하게도 <프로스트펑크 2> 역시 오랫동안 지원할 예정이다. 향후 의미 있고 풍성한 DLC를 개발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