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

[방구석게임] 절반 뿐이지만 캠코더로 가득 채운 감성 '로스트 레코드'

깐kkan (김가은) | 2025-02-19 14:37:37

<라이프 이즈 스트레인지> 시리즈의 본가 돈노드(Don't nod) 엔터테인먼트의 신작 <로스트 레코드: 블룸 앤 레이지>가 전반부의 이야기를 공개했습니다.

배경은 팬데믹의 끝자락인 2022년, 플레이어는 '스완'이라는 여성이 되어 10대였던 1995년에 함께 시간을 보낸 친구들과 아주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이게 됩니다. 추억을 회상하며 가벼운 재회의 순간을 보내기도 하지만 이야기는 그 시절 소녀들이 어떻게 만나고 헤어지게 됐는지 잊고 지낸 기억을 되짚어 떠올리는 데 초점을 맞춥니다.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90년대의 감성이 배어 있는 드라마를 감상하게 되죠.

<라이프 이즈 스트레인지>의 1편과 2편의 디렉터가 참여한 만큼 시리즈의 초기 분위기가 꽤 되살아난 느낌까지 들었던 <로스트 레코드: 블룸 앤 레이지>의 몇 가지 특징을 하나씩 짚어 보겠습니다. /작성=깐(게임 리뷰어), 편집=김승주 기자


로스트 레코드: 블룸 앤 레이지 (Lost Records: Bloom & Rage)
출시일: 2025-02-18 (테이프 1) 
개발사 / 유통사: Don't Nod
플랫폼: PC, PS5, XSX
가격: 40,250원 (스팀)
장르명: 어드벤처
리뷰 버전: PC (Steam)
리뷰 빌드: 테이프 1 (사전 제공 빌드)
플레이 타임: 7시간

※ 테이프 2는 2025년 4월 15일 출시 예정

# 수줍은 캐릭터로 그리는 성장기

1995년의 스완은 빨간 머리에 뚱뚱하고 주근깨가 많은 16살 소녀입니다. 스스로를 예쁘지 않다고 여기며 실제로 외모 때문에 비웃음을 당하기도 하죠. 

자존감이 바닥난 소녀를 조작해야 하는 건 달가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소심함과 어설픔이 안쓰럽기도 하고요. 하지만 영화를 무척 좋아하고 직접 촬영하는 것도 즐기는 스완을 플레이 하며 이 소녀가 지닌 섬세한 감수성과 영화적 상상력에 조금씩 정이 들게 됐습니다. 자연스레 공감하고 응원하게 됐고요.

또 다른 주인공인 스완의 친구들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과장된 리액션과 메이크업으로 그려진 '노라'는 여드름투성이고 신경질적으로 날이 선 '캣'은 꽤나 왜소합니다. 겁이 많고 우유부단한 '어텀'은 동네에 흔치 않은 흑인이죠. 또래들 사이에서 인기 없는 녀석들이라는 공통점을 지녔지만 서로에게 유대감을 느끼며 가까워져 갑니다.

<로스트 레코드>의 캐릭터들

<로스트 레코드>의 주인공들은 특출 나지 않은 외모와 평범한 소녀다운 내면의 조합으로 무난한 공감을 자아냅니다. 다만 너무 전형적인 타입으로 소수자를 그리려는 안일한 접근 탓에 <라이프 이즈 스트레인지>의 첫 게임이 반향을 일으키도록 만든 주역인 '맥스'와 '클로이'만큼의 매력을 전하지는 못합니다. 

네 명이나 되는 캐릭터로 빠르게 설득력 있는 공감대를 얻기 위해 효율적인 방법을 택하지 않았을까 하는, 짐작이 되면서도 멋진 캐릭터를 가공하기 위해 공을 들이기 보다는 즉각적으로 캐릭터성을 보여줄 수 있는 쉬운 길을 택한 것 같아 조금 아쉽더라고요.



# 여전히 또렷한 정치적 올바름의 표현

돈노드의 게임은 다른 디렉터와 작가들이 참여한 기존의 여러 작품들을 포함해 사회적 다양성과 소수자 대표성을 스토리텔링에 녹여내려고 줄곧 노력해 왔습니다. 

이번 게임 역시 동성 연애와 함께 다양한 체형, 인종 등 여러 정체성을 반영합니다. 90년대 인디씬에서 주목 받았던 여성 펑크 록 밴드 "비키니 킬"과 이들로 대두되는 라이엇 걸 무브먼트의 묘사는 몇 번씩이나 등장하고요.

다만, 주된 갈등으로 부각되기보다는 일상적인 대화에서 취향과 감정을 표현하는 과정 중 자연스럽게 드러납니다. 캐릭터들의 서로 다른 배경을 설명하기 위한 일부 특성으로 담담하게 그려지기 때문에 캐릭터의 입체감을 높이는 데 일조하는 부분이기도 하고요.

 영화 속 흑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캐릭터

이런 표현들에조차 거부감이 드는 플레이어라면 이 게임을 플레이 하는 게 불편한 경험이 될 수 있어 주의가 필요하지만, 돈노드가 이전 게임에서 보여준 수준과 크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하찮은 비유이긴 하지만 전기구이 통닭집에서 '바삭한 후라이드 치킨'을 찾으려는 게 아닌 이상 당황할 일은 일어나지 않고요. 

제가 아직 덜 깨어난 플레이어임을 인정해야 하겠지만, 개인적으로는 플레이를 하며 이러한 요소를 마주하는 걸 선호하지는 않습니다. 어느 정도 불편할 거라는 각오를 해야 했죠.

90년대의 페미니즘 운동, 라이엇 걸


# 감정적인 연기로 생동감 넘치는 대화

그럼에도 이 게임의 대화에 참여할 때마다 좋아했던 <라이프 이즈 스트레인지>의 첫 시리즈보다 훨씬 몰입이 됐습니다. 그 이유는 선택지를 고르는 타이밍과 카메라로 움직이는 주인공의 시선에 있었는데요. 대화는 그저 텍스트와 음성을 읽고 선택하는 단계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현장에 함께 앉아 있는 듯한 연출을 동반합니다.

대부분의 답변 선택지는 한 번에 전부 공개되지 않고 주인공이 주변을 둘러보는 타이밍이나 어떤 친구를 바라보느냐에 따라 추가로 열립니다. 다른 게임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전에 나눈 대화를 기반으로 달라지는 건 물론이고요. 

음료의 안내판을 바라봐야 고를 수 있는 선택지

대답을 언제 선택하느냐에 따라 말을 아끼거나 말을 자르고 다음 대화로 넘어가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선택에 따른 상대의 반응도 볼 수 있고요. 또 여러 인물이 동시에 대화를 주고 받을 땐 화면이 다양한 구도로 재배치돼 누가 언제 발화하는지 시선을 돌려가며 바라보게 유도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상황과 맥락에 따라 변화하는 선택지와 화면 연출이 대화하는 순간순간의 흐름을 생생히 체험하게 해 주더라고요.

더빙과 표정 연기 또한 굉장히 섬세하게 구현돼 말끝을 흐리는 장면이나 약간의 머뭇거림, 혹은 웃음기 어린 목소리 톤까지 세밀하게 느껴집니다. 드물게 발견되는 오역은 살짝 아쉬움을 남기지만 번역도 전반적으로 분위기와 내용을 분명하게 전합니다.


# 흐릿한 선택의 결과와 분할 출시의 아쉬움

하지만 대화의 생동감과는 별개로 선택의 결과를 확인하는 재미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대화를 선택할 때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는지 아이콘과 효과음을 즉각 확인할 수 있고, 후일에 영향을 줄 선택을 했다는 긴장감은 충분합니다. 어떤 선택지를 골랐는지 다른 플레이어들의 선택과 비교하며 돌이켜보는 개발사 전통의 시스템도 그대로이기는 하고요.

그렇지만 결과를 들여다보는 두근거림을 찾을 수는 없었습니다. 이건 두 개의 파트로 나뉘어 공개되는 만큼 이야기의 전체 흐름에서 중반까지만 확인할 수 있다는 데에서 기인하는 문제일 겁니다. 친구들과의 관계도 중간 점검만 가능하며 모든 선택의 최종 결말은 짐작조차 할 수가 없으니까요.


<로스트 레코드>의 이번 첫 번째 테이프와 4월에 공개될 두 번째 테이프의 구성은 완결성 있는 두 시즌의 드라마가 아닌 하나의 시즌을 반으로 쪼갠 내용입니다. 빠르게 전반부를 공개해야 하는 내부 사정이 있었을 수도 있지만 이런 분할 공개는 이야기를 감상하는 측면 뿐 아니라 선택의 즐거움을 온전히 즐기는 측면에서도 매우 아쉬운 부분입니다. 

전반부를 공개한 후 화제성을 높이고 유저 간 토론의 장을 위해 일부러 시차를 둔 것이라는 해석도 가능하겠지만요. 대신 후반부 이야기에 대한 궁금증을 증폭시키는 데에는 성공했으며, 이야기가 마무리 된 후에는 전반부만 플레이 해서 느낀 이런 아쉬움을 상쇄시켜 줄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해 볼만 합니다.

2월 18일 출시된 버전에서는 전반부인 테이프 1만 플레이 할 수 있다


# 빛과 음악이 이끄는 영화적 감수성

현재 전반부만 플레이 하더라도 만족할 만한 부분은 확실히 있습니다. 차분하고 따뜻한 색감은 <라이프 이즈 스트레인지>를 처음 플레이 하면서 맥스의 교정과 숲길에서 느낀 감성을 되살리는 것만 같았습니다. 

자연광을 포근하게 살린 풍경들은 세련되고 깔끔한 카메라 워크와 수려한 미장센으로 눈과 마음을 사로잡더라고요. 주인공이 영화와 자연을 좋아한다는 설정과 맞물려 주변 환경을 섬세하고 감성적으로 바라보는 데 동화되기도 쉽고요.

따뜻한 빛이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그래픽

배경 음악 역시 유사한 감성적 연출로 어우러집니다. 무심한 고양이가 낮잠을 즐기는 아늑한 방부터 여름 방학의 한가로운 놀이터와 숲을 비집고 내려앉는 따사로운 햇살까지 매 순간 매 장면에 잔잔하면서도 서정적인 멜로디가 흐릅니다.

철없지만 꿈 많은 소녀들의 치기 어리고 발랄한 모습을 보여줄 때에도 모든 감성에 공감하는 건 쉽지 않았지만 사랑스러운 연출 덕에 조금씩 경험해 볼 수 있었고요.




# 캠코더로 포착하는 순간의 추억들

<로스트 레코드>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자 그림자처럼 떼어 놓을 수 없는 <라이프 이즈 스트레인지>와도 확연한 차별성을 주는 점은 어린 스완이 손에서 절대 놓지 않는 캠코더와 직접 촬영한 회고록 영상입니다. 

플레이 도중 수시로 찍게 되는 영상들은 오래된 홈비디오 특유의 손떨림과 아스라한 화질 감성이 뛰어나 평범하고 사소한 것들도 마구마구 찍고 싶어집니다. 찍은 내용을 편집하고 재생하는 기능은 감성을 감상하는 걸 넘어 체험하게 하고요. 특히 촬영 당시 녹음된 대사와 게임에 흐른 배경 음악까지 그대로 담기기 때문에 단순한 플레이 액션이 아닌 직접 녹화한 것처럼 느끼도록 합니다.

이 촬영이 더 특별한 건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역할을 하면서도 적극적으로 둘러보고 빠져들게 하는 수집 활동의 보조적인 기능도 한다는 데 있습니다. 플레이를 하다 보면 캠코더를 들고 친구들의 주변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시간이 자주 주어집니다. 메인 스토리와 관련된 주요한 현장과 대상을 찍어야 할 때도 있고 순간을 포착해야 하는 희귀한 장면이나 구석구석 살펴야만 담을 수 있는 것들도 있죠.

수시로 외치게 되는 "이건 찍어야 해!"

처음 카메라를 갖게 됐을 때 이건 찍어야 된다며 호들갑을 떨었던 경험이 있다면 누구나 신이 날 만한 장치일 뿐 아니라 친구들 속에서도 자신이 좋아하는 세계에 빠져들곤 하는 스완의 개성과 맞닿아 몰입감을 굉장히 높이는 부분이었습니다. 특별하게 남은 일상이 소중한 추억이 되는 감각을 캠코더를 통해 감성과 게임성을 모두 챙기며 구현해 정말 마음에 들었고요.

참고로 저는 친구들은 뒷전에 두고 촬영에 매진해 플레이했지만 한 번에 모든 수집품을 얻지는 못했습니다. 만약 이야기부터 빠르게 진행하고 싶다면 촬영은 가볍게 넘기며 플레이 할 수도 있습니다. 언제든 진행과 선택지에 영향을 미치지 않고 수집물 모드를 통해 지나간 장면을 재방문할 수도 있으니까요.


# 절반으로도 따뜻한 추억의 드라마

<로스트 레코드: 블룸 앤 레이지>는 90년대 복고풍 무드를 현대의 정서와 결합해 과거와 현재가 자연스레 교차하는 체험을 설득력 있게 풀어낸 드라마입니다. 자신을 충분히 사랑하지 못했던 수줍은 소녀의 성장 이야기라는 틀 안에서 비슷한 친구들이 함께 어울리는 과정을 특유의 대화 시스템과 감성적인 연출로 감싸 안죠.

전개가 빠른 편은 아니며 후속 파트가 나누어 출시된다는 점에서 굵직한 아쉬움을 주지만 그 모든 기다림을 보상해 줄 만한 정서적 스펙트럼과 캠코더를 활용한 독창적인 플레이 감각을 갖추고 있기도 합니다.

돈노드 엔터테인먼트와 떼어내기 힘든 PC 요소에 강한 거부감만 없다면 <라이프 이즈 스트레인지>를 좋아했던 팬들에게든 <트윈 픽스>와 <엑스파일>과 같은 90년대 미국 드라마, 혹은 그 감성에 닿아 있는 <스트레인저 띵스> 등을 좋아하는 이들에게든 매력적인 선택일 겁니다.



김가은(깐) - 게임 리뷰어

폭 넓은 장르의 게임에서 다양한 경험을 찾고자 합니다. 새로운 게임을 찾는 분들에게 제 경험담이 도움이 되길 바라며 글과 영상을 남겨 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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