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초반 온라인게임은 밀레니얼세대에게 모종의 노스탤지어를 자극하고 있다. 데브캣의 <마비노기 모바일>은 향수라는 키워드 없이는 설명되지 않는다. 노스탤지어의 가장 깊은 곳에는 음악이 있다. <테일즈위버>나 <메이플스토리> 같은 오래된 게임의 OST를 듣고 있노라면 안온하고 행복했던 과거가 몽글거리는 듯하다. 뇌과학자들은 과거의 좋은 기억을 떠올리면 쾌락 호르몬이 분출된다고 설명한다.
게임음악이 주는 노스탤지어를 주제로 EP를 발매한 뮤지션이 있으니 바로 피슈(Pishu, 옛 피아노슈게이저)다. 피슈는 피아노를 중심으로 다양한 음악을 빚어내는 1인 뮤지션으로 포스트락, 전자음악 리스너 사이에서 상당한 기대를 받고 있다. 기자는 피슈가 '게임음악을 추구한다'는 정보 없이 새 EP <Birds, Promises, Moonlights>를 접했고, 2000년대 초반 온라인게임 속 노래들을 떠올렸다.
과연 그는 과거의 게임음악이 주었던 모종의 감성을 재현하는 것은 물론 '디지털 열화'의 창작방법론까지 탐구한 끝에 이번 EP를 만들었다. 게임지라고 해서 게임음악가만 만나라는 법은 없다. <바람의나라>의 '비바람'이 떠오를 만큼 비가 쏟아붓던 봄날, 1평 남짓한 작업실에서 샘플과 플러그인을 뒤적거리며 몰두하던 피슈를 깨워 이야기를 나누었다.

Q. 디스이즈게임: EP를 들으면서 2000년대 즐겼던 온라인게임의 노스탤지어를 강하게 느꼈다. 어떤 게임을 즐겨왔나?
A. 피슈: 다른 분들에 비하면 게임을 안 좋아하는 편이다. 고등학교 때 PC방에 가면 <스타>도 못하고 <서든>도 못했다. 끌려가서 <O2Jam>(오투잼)을 했는데 '그걸 왜 PC방에서 하느냐' 그랬다. <오버워치> 정도 한 것 같다. 메르시 500시간? (Q. 하나의 게임을 500시간 한 거면 게임 좋아한다고 해도 될 것 같다.)
그런가? (웃음) <철권>도 열심히 했다. <EJ2DJ>(이지투디제이)를 하려고 오락실에 갔다가 시작했다. <철권>은 '무서운 형들의 게임'이었다. 웃긴 마음이지만, 강해지고 싶었다. <철권 7>은 스팀에서 다운받아서 주작단(23단)까지 올라갔다. <리그 오브 레전드>는 여러 사람이랑 인터랙션이 부담스러워서 못했다. <롤토체스>(전략적 팀 전투)는 잘 맞을 것 같다는 말에 시작했는데, 3주 만에 다이아를 찍었다. 시즌 4 그랜드마스터를 찍었다. 자랑 맞다. '디제이오사무'가 내 아이디다. 실시간 통번역 일을 하면서 대기 시간에 계속 큐를 돌렸다.
Q. '게임 음악을 사랑하는 마음을 담았다'고 말했다. 게임 말고 어떤 게임음악을 즐겼는지 이야기 해보자.
A. 초등학교 때부터 오락실에 다녔다. <이지투디제이> 사운드를 좋아했다. 거기서 테크노와 락을 들으며 '이런 음악을 만들고 싶다'는 꿈을 꿨다. <R.F.C.>는 서태지의 바이브가 느껴지는 곡이었고, <FIRE STORM>은 에이펙스 트윈 같은 바이브가 있었다. 서점에서 <바람의나라> 가이드북을 사서 한달 정액권을 등록하며 <바람>을 했다. 부여성 음악이나 환상의섬 음악을 즐겼던 것 같다.
사실 게임은 나보다 동생이 더 많이 하는 편이었다. 나는 뒤에서 동생이 게임하는 것을 더 많이 바라보는 편이었는데, 그게 요즘 게임방송이 된 듯하여 재밌다. <크레이지 아케이드> 음악도 좋았고, <시간의 오카리나> 음악도 좋았다. <마비노기>는 아예 안에 음악 콘텐츠가 있어서, 동생이 보스를 다 잡고 음유시인한테 가면 내가 직접 노트를 찍은 기억이 난다.
<오투잼>, <DJMAX>(디제이맥스) 같은 리듬게임을 정말 많이 즐겼다. 유저게시판에 직접 만든 곡을 업로드하기도 했다. <오투잼>에 서태지 7집이 들어갈 때 엄마 몰래 ARS 결제를 했다가 혼난 기억도 있다. (웃음)
크고 나서는 <언더테일>의 음악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모뉴먼트 밸리>는 아예 한 장의 음반과 같다고 생각한다. <스매시 히트>의 앰비언트 기반 전자음악도 즐겼고, <사요나라 와일드 하트>의 음악도 좋아했다. <심즈>와 <롤러코스터 타이쿤>의 음악도 즐긴 것 같다. <심즈>에서 정지할 때 나오는 대기 음악이 너무 좋아서 네이버 지식in에 '이런 느낌의 음악을 추천해달라' 했는데 라디오헤드의 <High & Dry>가 답변으로 나왔다. 좋은 추천은 아니었지만, 그 덕에 라디오헤드를 알게 됐다. (웃음)

Q. EP <Birds, Promises, Moonlights>에 쓰인 전자음은 무엇이라고 정의할 수 없는 '그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기술적으로 자세한 설명이 가능한가?
A. 가능하다. 90년대 후반 들어 게임기에 사운드카드가 보급되기 시작했다. 노래방에서도 사운드카드를 교체하면 더 좋은 음질의, 더 악기 같은 음악을 재생할 수 있게 됐다. 그때 롤랜드 사운드 캔버스가 나오게 됐는데 황주은 작곡가(편집자 주: <창세기전>, <바람의나라>, <아스가르드>, <아이온> 등의 게임음악을 작곡한 한국의 게임 음악 작곡가)이 사운드 캔버스로 <바람의나라> 음악을 작곡했다.
쉽게 말해서 당시의 게임음악은 웨이브파일이나 MP3로 재생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악보를 넘기면 사운드카드가 재생하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이번 EP에서 그런 소리를 재현하려고 했다. 이후에 롤랜드 사운드 캔버스를 중고나라에서 구매해서 그것을 연구했다. (Q. 그 소리를 실제 EP에도 쓴 건가?) 그렇다. 그렇지만 기술적 한계를 시험하는 데에 더 큰 의의가 있었다.
그 시절 게임음악의 용량제한도 재현하려고 했다. PS1 모델이 두 종류인데 지역에 따라서 사운드칩이 달랐다고 한다. 그런데 한 쪽의 음질 열화가 더 '예뻐서' 그 버전이 중고 매물로 비싸게 돌아다닌 적 있다. 테이프에 재생된 음악에 빛바랜 느낌도 있듯이, 나는 '디지털 열화'에 주목했다. '짤' 같은 이미지 파일이 '디지털 풍화'가 된다고 하지 않나? 오디오도 그렇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넘어오고, 디지털에서 다운로드가 연달아 일어나면서 손실이 가해진다. CD 파일을 컴퓨터에 업로드하고, MP3로 전환하고, 다운로드할 때 그 모든 과정에서 '풍화'가 일어난다. 작업하면서 그런 '디지털 풍화'가 느껴지는 플러그인을 많이 사용했다. 소리바다와 와레즈가 지배하던 '야만의 시대'가 있지 않나? 그때 음질의 느낌을 내게 해주는 플러그인 이름이 '와레저'다.

Q. 왜 디지털 열화를 추구했는가? 노스탤지어에 대한 강한 집착 때문인가?
A. 음질은 냄새와 같다. 정보를 뇌에서 처리하기 이전에 떠오르게 만드는 장치가 음질이다. 열화로 인해 느꼈던 감동과 향수가 강력했던 앨범으로는 스파클홀스(Sparklehorse)의 작업물이 있다. 옛날 게임을 요즘 모니터에서 열어보면 열화된 것 같지만, CTR 모니터로 열어보면 느낌이 달라지지 않나? 그런 경험을 계속 염두에 두고 작업한 것 같다.
그런 경험에 대한 추구가 없으면, 모방된 체험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사실 디스코, 시티팝, 뉴잭스윙 등 많은 음악 장르에서 추구하는 레트로 코드가 음악과 가창을 동반한다. 춤과 노래로 과거를 재현하는 것인데, 게임음악이 레트로를 추구한다고 한다면 당시 콘솔과 사운드카드의 물성이 핵심이라고 봤다. 그 물성은 음질에 의해서 달성되는 것이었다.
Q. 몇몇 사람들은 LP 재생 때의 '지지직' 소리를 좋아하는데, 정작 수집가들은 그런 소리를 싫어한다. 음악에 담겨있던 사운드가 아니라 관리 소홀로 음반에 스크래치가 난 것이기 때문이다.
A. 그렇게 과장된 노스탤지어는 지양하려 했다.
몇몇 로우파이(lofi)에서 나오는 '지지직'은 구한말 엘피 정도는 재생해야 나오는 수준이다. 마찬가지로 게임음악이라고 해서 너무 멜로디가 동화적일 필요는 없다. 다만 내가 생각한 것은 당대의 환경과 현장을 존중하고자 했던 것이다. 실제로 (게임음악으로) 월급을 받는 분들이 계시고, 그 기술이 전수가 되고 있는 현장이 있는데 그것을 너무 과장하거나 낭만화하는 것은 피하고 싶었다.
실제 사운드 캔버스로 만든 음악들도 들어보고, 1990년대와 2000년대의 게임 사운드 트랙도 많이 들어봤다. 진짜로 있을 법한 게임 음악을 만들려 했다. 칩튠 커뮤니티를 돌아다니면서 샘플과 플러그인을 '파밍'했다. 곡마다 가급적이면 오버 테크놀로지를 안 하려고 했다.
Q. 작업을 위해서 예전 하드웨어를 구매하고, 당대에 활동한 사람들을 존중하려는 모습은 250의 <뽕>(2022)이 떠오른다. 황주은 작곡가의 소개글은 어떻게 받은 것인가?
A. 트위터(現 X)에서 알게 됐다. 그때 트위터에서 디지털 열화에 대한 글을 쓰고 있을 때였다. 사운드 캔버스로 옛날 사운드를 재생하는 것을 올렸더니 작곡가님께서 옛날에 만든 음악을 재생하는 것을 보여주셨다. 이후에 EP가 나오게 되고, 소개글을 부탁드린다고 메일을 드렸는데 당일에 바로 답장을 주셨다. 제약으로부터 자유가 나온다는 것은 요즘 화두다. 브라이언 이노(Brian Eno)도 '결핍에서 창의력이 나온다'고 했다.
무인도에 기타만 가지고 가서 갇히게 된다면 명반이 나오게 된다는 건데 (웃음) 90~00 년대의 게임 음악 제작 환경이 그것과 비슷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이것은 DIY와 인디 정신과도 맞닿아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이전 작업물들은 발산을 하고, 모르는 기술을 끌어다 모으는 것에 집중했는데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하드디스크가 50GB 미만인 시절의 음악을 생각했다.
황주은 작곡가의 소개글
90년대의 게임 음악을 유난히 좋아하는 이유는 거대한 제약 때문입니다. 사용할 수 있는 채널, 혹은 용량과도 같은 개발 환경에 의한 강제적인 제약은 자유로운 표현을 하기 어려운 환경이었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공유하는 조건이었고, 게임 음악을 만든다는 건 같은 선상에서 출발하는 공정한 경쟁과도 같았습니다. 제약을 풀어가는 과정에서 개성을 느낄 수 있었고, 어떻게든 음악으로 모든 장면을 표현하려는 시도들은 다양한 상상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기술의 발전으로 인하여 개발 환경의 제약이 사라졌고, 게임 음악의 표현 범위는 보다 넓어졌습니다만, 의외로 자유를 느끼기 어려울 때도 있습니다. 제약을 걸어두고 좁은 공간을 집요하게 파고들어가는 시도들은 아련한 그리움을 전해주기도 하지만, 여전히 멋지고 재미있습니다.
Q. <ppqq>는 기타 선율로 시작해 신비로운 전자음이 더해지다가 피아노가 이어진다. 온라인게임 메인 테마가 떠올랐는데 어떻게 작업한 곡인가?
A. 스토리텔링보다는 기술 측면에서 접근한 곡이다. 화이트노이즈와 글리치가 어쿠스틱과 어울리는 그림을 생각했다. 새가 물 위를 떠가다가 갑자기 픽셀이 묻었다가 사라지는 그런 모습을 떠올렸다. 곡 명은 청자들이 '피피큐큐'라고 발음하면 귀엽다고 느껴져서 그렇게 지었다. 내 안의 슈게이징 박스를 깨려고 했다. 수렴보다 발산의 방식으로 작업했다. 내 노래들이 슬픈 편인데 이번에는 귀엽고 상큼하고 싶었다.
Q. 그런데 슈게이징이란 무엇인가? 신발(shoe)을 본다(gazing)는 의미인데, 기자는 슈게이징이 장르보다는 펑크(Punk) 같은 일종의 정신을 일컫는 게 아닌가 싶다.
A. 슈게이징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재밌지만, 사실은 조금 지쳐있다. 그래도 대답하자면 '스스로에 대한 펑크' 정도로 답하겠다.
Q. <re:re:re:re:memory>는 어떤 곡인가?
A. 시부야케이를 레퍼런스 삼았다. <페르소나> 같은 학원물을 떠올렸다. 학교에서 일어나는 판타지와 회귀 같은 사건을 생각했다. re:re:re:를 붙인 것도 인터넷의 옛날 게시판 느낌을 주고 싶었다.
Q. <promises>는 어떤 약속을 말하려고 한 것인가?
A. PS 스노우보드 음악들을 참고했다. 나레이션 샘플에서 말하는 게, 아포칼립스 이후의 대피 요령이다. 주변의 벙커를 찾아서 빨리 숨기를 바란다 뭐 이런 내용이다. 게임 서버가 닫히기 전에 어디론가 달려가는 유저들을 생각했다. 제목은 무슨 의미인가. 슬픔을 주고 싶었다. 아마 게임 세계가 닫히기 전에 못 지킨 약속들이 있지 않았을까? 사람들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달리는 것이다. 각자 무슨 약속을 위해 달리는지는 상상에 맡기려 한다.
Q. <How to save a bird>의 새는 <ppqq>의 새인가?
A. 그것을 의도하지는 않았다. <ppqq>가 2010년대, <re:re:re:re:memory>가 2000년대, <promises>가 1990년대라면, 이 곡은 1980년대라는 생각이다. 발매하고 나서 깨달았다. 사운드적 제약이 가장 큰 곡이다. 오버 테크놀로지가 나오면 안 됐다. 4번은 그러니까, (게임음악에서) 청동기 시대와 같아서 사운드를 엄격하게 제한하고 작업했다.
김승일 시인의 <방법이 있어>라는 시에서 영감을 얻었다. 교실에서 자다가 꿈을 꾸고, 꿈에서 친구들이 전쟁터에 나가서 모두 죽었는데, 꿈에서 깬 나를 아무도 이해하지 못한다는 내용의 시다. 이 곡에서 일단은 여전히 달리고 있다. (Q. 앞에서 약속을 위해 달렸다면, 이번엔 어디를 향해 달리나?) 모르겠다. 탈출과 구원이 반복되는 것 같다. <언더테일>처럼 친구가 대마왕이 되어서, 그 친구랑 싸워야 하는 거다. 온갖 필살기를 써도 이길 수 없지만, 파훼법은 간단한 느낌이다.
이번 EP를 바탕으로 다른 작업도 하고 있는데, 본질을 놓치고 있지 않나 고민이 든다.
Q. 무슨 본질?
A. 게임음악을 존중하는 것이 본질이다. 요즘 키젠코어(Keygencore)라는 장르가 있다. 불법 게임의 키 제네레이터를 실행하면 나오는 음악을 그렇게 부른다. (Q. 아마도 스팀 이후에 게임을 접한 사람들은 키 제네리어터를 안 써봤겠지.) 이제는 그런 분들이 키젠코어를 작업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베이퍼웨이브(Vaporwave)처럼 과거의 향수를 재현만 하는 것은 피하려고 했다. 고고학을 하고 싶지 Y2K를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Q. 게임음악을 작곡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 있나?
A. <모뉴먼트밸리>처럼 인터랙티브하게 게임 플레이가 곧 연주가 되는 음악을 작업해보고 싶다. <언더테일>처럼 캐릭터 테마가 연결되는 곡도 만들고 싶다. 토비 폭스를 따라한 거 같지만, 그런 유기성을 다른 방식으로 달성하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