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색 옷을 보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작품이 무엇인가? 머릿속에 스치는 많은 명작들이 있지만, 기자의 경우 게임은 <젤다의 전설>, (코믹스를 포함해) 애니메이션은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이하 히로아카)다.
“녹색 옷 입은 애가 젤다죠?”라는 긴 역사를 가진 질문에, 드디어 제대로 된 답변을 할 만한 작품이 나왔다. 시리즈 최초로 링크가 아닌 ‘젤다’가 플레이어블 주인공으로 등장한 <지혜의 투영>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재미에 대한 긴 설명이 필요할까, 2024년에 제값 주고 산 게임 중 가장 만족스럽게 즐겼다는 말 하나면 충분하지 않을까.
게임에 대한 구구절절한 설명보단 <지혜의 투영>을 가장 빛나게 해준 요소들을 짚어보는 편이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런 교차점이 없어 보이는 <젤다>와 <히로아카>는 꽤 많은 지점에서 맞닿아 있었다. 접점을 가운데 두고, 어떤 부분에선 비슷한 방향으로, 어떤 부분에선 완전히 정반대로 뻗어 있다는 게 재밌는 포인트다.
미리 말씀드리자면, 이번 칼럼에는 최근 완결된 <히로아카> 코믹스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다. <히로아카>를 포함한 소년만화 전반을 잘 아는 분일수록 이 글을 재밌게 읽을 가능성이 높다. 반면, 일부 전작들에 대한 언급은 있겠지만, <지혜의 투영>을 포함해 <젤다> 시리즈에 대한 사전 지식은 전혀 요구하지 않고 게임에 대한 스포일러는 없으니, 이에 대한 부담은 덜어 두시라.
<젤다의 전설: 지혜의 투영>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
[배관공인 ‘마리오’가 ‘쿠파’에게 납치된 ‘피치 공주’를 구하러 떠난다.] <마리오> 시리즈의 일관된 테마다. 닌텐도 안에서 친척(?) 관계에 있지만 <젤다> 시리즈와는 결이 많이 다르다. 최근에야 ‘피치 공주’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모습이 종종 나오곤 한다지만, ‘공주’를 활용하는 방식만 이야기하려는 건 아니다. 주목해야 할 지점은 '플레이어의 목표'다.
‘링크’가 주인공인 지난 30년 가까운 세월 사이에도 일관된 목표는, 젤다를 찾는 동시에 [‘하이랄’을 구하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젤다> 시리즈는 하나의 대원칙을 밑바탕에 두고 있다. ‘하이랄’이 어떤 세계인지 그 안에선 어떤 인물들이 살아가는지 충분히 보여주고, 그 세계를 탐험하는 것을 중심에 뒀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러면서 ‘링크’와 ‘젤다’라는 핵심 인물의 서사에는 자유의 폭이 생겼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지혜의 투영>처럼 ‘젤다’가 직접 전투에 나서는 뒤집힌 서사가 되어도 전혀 위화감이 없다. 시리즈마다 각기 다른 역할과 성격의 (실제로 다른) ‘젤다’가 등장해왔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무녀 공주’, ‘구세의 영웅’이라는 역할만 전승, 공유되어 왔을 뿐이다.
세계의 위기 앞에 왜 발벗고 나서야 하는가. 처음에는 ‘나만 할 수 있는 역할’이 있기 때문이라는 느슨한 구조로 시작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목표는 점차 ‘소중한 존재들을 지키기 위해서’로 나아가지 않는가. 이는 ‘영웅 서사’의 핵심이고, <히로아카>와 <젤다>를 모두 관통하는 주제다.
'소중한 존재를 지킨다'는 주제는, 주체가 '링크'일 때도 '젤다'일 때도 한결 같았다.
사진은 <젤다의 전설: 왕국의 눈물> 중 한 장면.
<지혜의 투영>은 이 지점에서 꽤나 재밌는 설정을 도입했다. 한 번 본 사물 또는 생물을 그대로 복사해 소환하는 ‘투영’이라는 능력을 ‘젤다’에게 쥐어줬다. 물건을 활용해 퍼즐을 풀어내는 건 기본이고, 심지어 몬스터도 소환한다.
‘링크’가 그동안 검과 활, 폭탄으로 능동적인 싸움을 펼쳐왔다면, ‘젤다’는 게임 후반부로 갈수록 ‘더욱 강한 몬스터를 더 많이 소환’하는 방식으로 싸우게 된다. 소환된 몬스터는 단순히 적을 공격하는 것 외에도, 이목을 끌어 ‘젤다’를 지키는 역할도 수행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주체를 지우고 행위만 남기면 ‘마왕(가논)’과 매우 닮아 있다.
<지혜의 투영>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균열’들로 인해 ‘하이랄’과 주변 마을이 큰 피해를 입으며 시작된다. ‘링크’ 또한 ‘젤다’를 구하는 과정에서 균열 안에 삼켜진다. 여기서 또 하나의 재밌는 설정이 나오는데, 균열에 삼켜진 존재는 ‘가짜’(니세모노)로 등장해 세상에 혼란을 준다는 것이다.
젤다의 아버지인 국왕도 균열에 삼켜진 후 ‘가짜 국왕’으로 등장해 “젤다를 잡아 감옥에 넣으라”는 명령을 내린다. 젤다는 ‘가짜 링크’와 여러 차례 싸우며 ‘링크’의 기술들을 습득해 나가기도 한다. 거짓된 싸움이긴 하지만 지켜야 할 존재들에 칼날을 겨누게 되는 ‘젤다’의 운명은 또 한 번 ‘빌런’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그래서 게임은 계속해서 질문한다. 자, 이제 무엇이 ‘진짜’지?
이번 <지혜의 투영>에서 제한된 시간 동안 마치 '링크'처럼 싸울 수도 있는 '젤다'지만
'젤다'는 이번 작품에서 '투영'으로 몬스터를 소환하는 방식을 가장 많이 활용하게 된다.
'가짜 국왕'은 세계를 집어삼키는 '균열'을 '젤다'가 만들었다며 누명을 씌운다.
'젤다'는 이후 '가짜 링크'와도 여러 차례 싸우게 된다. 기존의 관계를 생각하면 가혹한 운명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지혜의 투영> 속 ‘젤다’는 여러모로 <히로아카>의 ‘미도리야’와 닮아 있다. 자신을 구해준 ‘올마이트’의 뒤를 따라 세계를 구하는 ‘미도리야’. 자신을 구해준 ‘링크’의 행적을 따라가며 오히려 ‘링크’를 뛰어넘는 영웅이 되는 ‘젤다’.
미도리야의 개성 ‘원 포 올’이 선대의 능력을 모두 물려받는다는 점도 마찬가지다. <꿈꾸는 섬> 리메이크 그래픽 베이스 위에서, <야숨>의 마그넷 캐치와 <왕눈>의 울트라 핸드와 유사한 조작법을 가진 ‘싱크’라는 능력이 <지혜의 투영> 속 ‘젤다’에게 주어진 점을 떠올려 보시라. 상술한 것처럼 ‘링크’의 전투 능력도 따라하게 되면서 ‘영웅의 계승’이라는 구조까지 완성하게 된다.
재미있게도 이번 젤다의 ‘싱크’는 미도리야가 5대에게 물려 받은 개성 ‘검은 채찍’과 유사한 점이 많다. 단순한 외형 외에도, 자신이 적 또는 사물을 구속할 수 있는 대신 자신도 적의 움직임에 묶일 수 있다는 점에서, 본질적인 의미까지도 맞닿아 있다.
<지혜의 투영>에서 '젤다'는 '싱크'라는 기술로 대상의 움직임을 조종하거나, 대상의 이동에 자신을 동기화시킨다.
<히로아카>의 주인공 '미도리야'의 '검은 채찍'과 닮은 면이 많다. (사진 출처: 애니박스, 슈에이샤, 본즈)
미리 말하자면 기자는 <히로아카>를 정말 좋아한다. 정확히는 좋아해왔다. 여전히 뜨거운 애정을 가지고 있지만, 그 온도가 조금 내려간 건 결말이 등장하기 전부터였다. 후반부 어느 시점부터 루즈해졌다는 평을 종종 듣곤 했던 작품엔 무슨 차이가 생겼던 걸까.
<히로아카>가 정말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 받을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무개성’이었던 미도리야를 비롯해, 모든 히어로가 필사적으로 ‘신념’을 지키는 과정에 대한 섬세한 묘사가 아니었던가.
<히로아카>의 작가 호리코시 코헤이는 매력적인 인물을 만들어내는 데 도가 튼 인물이다. 그의 능력은 ‘히어로’의 성장에만 쏠리지도 않았다. ‘매력적인 빌런’은 영웅의 활약 이상으로 중요한 게 사실이니까. 전설적인 히어로 ‘올마이트’를 동경해 빌런이 됐다는 ‘스테인’은, 히어로들보다도 더 설득력 있는 논거를 많이 제시해 깊은 인상을 남겼다.
<히로아카>의 매력적인 빌런 중 한 명인 '스테인'
그러나 작품은 후반부로 진입할수록 ‘빌런’에게 너무 많은 무게를 부여해버렸다. ‘시가라키’를 주축으로 한 ‘빌런 연합’과 ‘올 포 원’ 같은 캐릭터들은 이미 충분히 매력적이고 탄탄한 서사를 가지고 있음에도, 주인공들보다 더 많은 서사와 감정적 동력을 가져가게 됐다.
소년만화의 전개에 익숙한 독자들이라면 충분히 공감하겠지만, 결정적 순간에 끌어올 수 있는 ‘추억’과 ‘동기’가 얼마나 있느냐-가 곧 전투력의 척도가 되곤 한다.(안타깝게도 ‘개성’의 객관적 강함과는 무관할 때가 많다.) 수많은 히어로가 목숨을 걸고 덤벼들어도 아무렇지 않다는 듯 다시 각성하는 메인 빌런들을 보고 있노라면, 작가가 의도한 절망보다 공허함이 더 크게 느껴지곤 했다.
우리가 응원한 히어로들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 죽어나가고 희생되고 있는 것인가. 결말이 나오기 전부터 이런 공허함은 꽤 오래 유지되어 왔다. 결국 ‘미도리야’가 해결해줄 거야-라는 한 문장으로 뒤집기엔 너무 많은 희생이 뒤따랐기 때문이다. 어느 시점에 분명 반문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독자들이 보고 싶었던 게 과연 ‘빌런’ 중심의 자기 파괴 서사였을까?
<히로아카>에서 '시가라키'를 포함한 빌런 연합의 캐릭터들은 모두 분명한 매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주인공 이상으로 비중이 커지면서 작품이 균형을 잃을 때가 많았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히로아카>에 등장하는 수많은 히어로들에게도 길고 깊은 감정적 서사와 동기가 부여되지 않았느냐고. 독자가 집중하고 이입하기 나름 아니겠느냐고. 사람에 따라 충분히 그렇게 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히로아카>는 인물 내면의 이야기를 굉장히 구체적인 ‘대사’로 표현해왔다는 게 문제였다.
아주 과묵한 몇몇 캐릭터를 제외하곤 <히로아카>의 캐릭터들은 모두 길고 많은 독백 씬을 가지고 있었다. 심장을 뛰게 만드는 음악에, 캐릭터의 표정을 극대화한 클로즈업, 절묘한 연출까지 더해져 <히로아카> 특유의 낭만 넘치는 대사들은 빛을 발해왔다. 서로가 서로에게 지켜주는 든든한 히어로인 동시에, 지켜야 할 소중한 동료가 아니었던가.
그렇게 중요한 ‘대사’의 비중이 어느 쪽에 더 많이 부여됐는지 돌아보면, 왜 ‘빌런’에게 무게가 쏠렸다고 하는지 금방 눈치챌 수 있다. 빌런의 서사가 탄탄해질수록, 세계관 안에서 모두가 외면하고 질타한 그들의 감정만 쓸쓸하고 깊은 흔적으로 남을 뿐이었다.
결국 히어로들에게 남는 것은 무엇인가.
'평화' 하나를 위해 너무 많은 희생이 연이어 등장해 공허함만 커졌던 연재 과정이었다.
반면, <지혜의 투영>을 비롯해 <젤다> 시리즈를 해본 사람들이라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닌텐도는 플레이어블 캐릭터에게 의도적으로 ‘절제된 대사’만을 부여한다. 간결한 대답을 할 때는 있어도, 말을 많이 하는 건 모두 주인공을 제외한 다른 인물들이다.
<지혜의 투영>에선 재밌게도 ‘균열’에 삼켜졌던(게임에서는 ‘증발’했다고 표현하는 현상을 겪은) 인물 중 일부에게 ‘실어증’을 겪게 했다. 그래서 ‘링크’도 말하지 못하던 상태라고 명시한다.
플레이어블 캐릭터인 ‘젤다’는 ‘실어증’에 걸리진 않았지만, 개발진은 ‘젤다’가 직접 말하는 장면을 의도적으로 제외했다. 여러 등장 인물들과 꽤 상세한 대화를 나누고 있음에도, ‘말하는 시늉’만 보여줄 뿐 ‘젤다의 대사’를 표기하지 않는다. 다른 인물들의 반응과 이번 작품에서의 핵심적인 조력자 ‘트리’의 입을 빌려, ‘젤다’가 한 말을 플레이어가 상상하게 만든다.
균열에 삼켜졌던 '링크'는 실어증을 겪고 있고, '젤다'는 플레이어블 캐릭터이기 때문에 '말하는 장면'을 의도적으로 감췄다.
<꿈꾸는 섬> 리메이크의 연장선에 있는 아기자기한 그래픽은 ‘표정’을 적극적으로 보여주기에 좋은 환경도 아니다. 그래서 개발진이 집중한 것은 ‘인물’과 ‘상황’이다. <지혜의 투영>에 등장하는 여러 지역 중 초반에 등장하는 두 곳의 에피소드로 살펴보자.
균열 때문에 위기를 맞게 된 조라족들. 강 조라족의 족장 ‘도라도’와 바다 조라족의 족장 ‘크샤’는 서로 적대적인 관계였기에, 위기 상황 앞에서도 좀처럼 합심하지 못한다. 개발진은 이를 두 족장의 ‘악기 연주’로 아주 영리하게 풀어낸다. 개별적으로 들으면 아름다운 선율이 한 곳에 뭉쳐졌을 때 불협화음인 상태를 먼저 제시해, 둘 사이의 관계를 단번에 알게 해줬다.
‘젤다’의 도움과 활약으로 강 조라족과 바다 조라족 모두 조금씩 위기를 타개할 틈을 찾은 상황. 이 과정에서 ‘도라도’와 ‘크샤’는 각자의 마을을 지키는 족장으로서의 모습을 보며, 상대도 자신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음을 깨닫고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게 된다. 두 캐릭터의 선율과 하모니는 문제 해결 과정에도, 상황이 종료된 후 자축하는 과정에도 멋지게 활용된다.
'도라도'와 '크샤'의 불협화음은 감동적인 '하모니'로 거듭나게 된다.
고론족의 어린 새내기 족장 ‘다르스톤’의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아버지, 할아버지와는 달리 육체적으로 강인한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은 ‘다르스톤’은 작은 결정을 할 때도 물려받은 ‘석판’에 쓰여진 ‘마음가짐’을 줄줄이 외워야 할 정도로 유약한 아이였다. 비상한 두뇌로 문제 상황에 대해 그 누구보다 빠르게 인지했지만, 스스로 해결할 수 없어 매번 자책하는 캐릭터다.
‘젤다’는 여러 과정 끝에 숨겨진 길 뒤에서, 누가 봐도 ‘싱크’로 옮기면 그 너머로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은 바위를 마주하게 된다. 플레이어는 자연스럽게 버튼을 눌러보게 되지만, ‘싱크’로 옮길 수 없는 바위다. 이때 ‘다르스톤’이 달려온다.
“여기는 내게 맡겨 줘! 이 바위의 형태와 크기를 고려해서… 어느 방향으로 힘을 줘야 할지 계산하면…! 하아압!!”
명석한 계산과 미약하나마 자신이 가진 주먹의 힘으로 바위에 균열을 낸 ‘다르스톤’. “석판에 적혀 있는 일은 매우 중요해! 하지만 석판만 보고 있으면 훌륭한 족장이 될 수 없어! 나만의 방법을 찾아야 해…! 그러니 지켜봐 줘!!!”
‘다르스톤’은 바위의 조그만 틈에 자신이 신줏단지처럼 아껴오던 석판을 끼우고 바위와 함께 부숴 길을 터준다. 가르침은 마음 속에 이미 새겨져 있다며, 자신에게 가장 소중했던 석판을 ‘젤다’를 위해, ‘마을’을 위해 과감히 희생하는 ‘다르스톤’은 말 그대로 ‘영웅’이다. ‘젤다’의 여정은 결국 이런 작은 ‘영웅’들을 지켜내는 진짜 ‘영웅 서사’로 거듭난다.
선대의 '마음가짐'이 새겨진 석판을 과감하게 바위 틈에 넣고 부수는 '다르스톤'.
이 장면이 나오기 전까지 '다르스톤'이 석판을 얼마나 애지중지해왔는지 지켜봤기 때문에 감동은 배가 된다.
뻔하다면 뻔한 연출이지만, 닌텐도는 이런 디테일을 참 잘 살린다.
‘링크’와 ‘젤다’가 직접 입을 열지 않아도, 우리는 충분히 이들의 감정에 동화된다. ‘젤다’와 아무런 사이도 아니었던 인물들은, ‘젤다’의 노력을 보며 함께 성장하고, 마을을 구해줬음에, 자신들이 한 걸음 더 나아간 인물로 거듭날 수 있었음에 충분한 ‘감사’를 표한다.
<지혜의 투영> 인게임에서 많은 양의 ‘루피’와 희귀한 ‘아이템’을 얻어도 악당을 어렵사리 무찔러도 잠시 스치듯 짧은 웃음을 보여주는 ‘젤다’는, 주변 인물들이 자신에게 ‘감사’의 인사를 할 때, 가장 편안한 웃음을 지어 보인다. (그 해맑은 인사들을 바라보며 왜 씁쓸한 의미로 <히로아카>가 떠올랐던 것일까.)
굳이 뻔한 ‘해피엔딩’이 아니었더라도 <히로아카>의 서사와 결말이 주인공 ‘미도리야’를 웃게 할 수 있는 방법은 많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미도리야’의 웃음은 곧 독자와 시청자의 웃음이 아닌가.
서로 다른 두 제작진이 ‘젤다’로는 지켜냈고, ‘미도리야’로는 지켜내지 못한 것이 무엇인가. No.1 히어로였던 ‘올마이트’와 그의 정신을 이어 받은 ‘밀리오’가 한결같이 작중에서 강조해온 바에 정답이 있다. 영웅은 빌런에게 고통스럽게 맞서는 자신의 얼굴에서도, 지켜내야 할 대상의 얼굴에서도, 이를 지켜보는 이들의 표정에서도 ‘미소’를 잃지 않게 해야 한다.
'올마이트'와
'밀리오'가 항상 강조해왔던 게 '웃음'과 '미소'가 아니었나.
'젤다'와 일면식도 없던 인물들이, 하나 둘 자신의 마을을 지켜낼 수 있을 만큼 성장하고,
'젤다'에게 진심을 다해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모습을 보며 많은 생각이 들었다.
<젤다의 전설>은 3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혁신과 도전을 거듭하면서도 지킬 가치는 지켜왔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