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들입니다. 만드는 것을 좋아하든, 하는 것을 좋아하든, 보는 것을 좋아하든 게임이라는 미디어는 이미 막대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 1990년대 초부터 게임 개발 문화의 일원이었던 사람이 있습니다. 디스이즈게임은 창간 20주년을 맞이해 <세균전>, <연세말뭉치>, <리니지>, <XL1> 등에 참여했던 개발자 채윤호를 만났습니다.
<세균전>은 플로피 디스켓에 담겨 나오던 게임입니다. 유명 보드게임 '오델로'의 룰을 변형한 게임으로 1990년대 인기를 끌었습니다. 원래 흑백 버전만 존재했던 <세균전>은 컬러 버전을 출시하면서 오프닝 애니메이션과 이펙트가 추가됐는데요. 이 작업을 맡은 사람이 바로 채윤호 개발자입니다. 그는 '오타쿠'라는 말이 한국에서 쓰이기 전부터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오타쿠'였습니다.
게임 개발 1세대, 아니면 0세대라고 부를 수 있는 채윤호 개발자의 구술기록을 통해서 한국 게임 역사의 몇 가지 장면을 되돌아보려 합니다. 게임과 컴퓨터보다 그림의 세계를 훨씬 좋아했던 그는 어떻게 1세대 PC게임인 <세균전>의 비주얼을 담당하게 되었을까요? 채윤호 개발자는 어떻게 컴퓨터를 접했을까요? 이야기는 19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Q. 디스이즈게임: 원래는 게임을 좋아하지 않으셨다고요.
A. 채윤호 대표: 저는 원래 컴퓨터도 안 좋아했고 게임도 안 좋아했어요. 그런데 나중에 지나고 되돌아 보니 제가 있었던 곳이 세계 대전의 한복판 같은 그런 상황이었죠. 이런 게(컴퓨터에 대한 선호) 내재화가 되어있는 사람들이 있어요. 원래부터 컴퓨터를 좋아해서 다루는 사람들, 원래부터 게임을 좋아해서 만들기를 좋아하는 사람들... 그런데 저는 그런 쪽은 아니었어요.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랑 이야기도 잘 안 통했죠. 몰랐으니까.
사실 저는 애니메이션이나 만화 쪽을 훨씬 더 좋아했어요. 이게 컴퓨터, 게임 쪽이랑 나중에는 통하게 되어 있었지만 제가 (덕질을) 시작할 때만 해도 완전히 분리되어 있고, 문화라고 하기에도 미미한 그런 시대였죠. 숨어서 본다고 해야 하나? 제 뒷 세대는 오락실, 게임센터가 핍박을 받았는데 제 때는 만화였죠. 만화책 불태우기 같은 걸 했으니까. 만화가 문화 콘텐츠라는 생각도 전혀 없었고 그냥 좋아했던 거죠. 어른들은 '학생들이 공부나 해야지' 했던 거고요. 그냥 그게 당연한 시절이었어요.
저희 집이 부유한 집은 아니었는데, 아버지께서 일본 특파원 생활을 하셨어요. 국민학교 1, 2학년 때죠. 그때 아버지가 일본의 소학교 학생들이 학년별로 보는 잡지를 책방에서 구해오시곤 하셨죠. 거기에 만화가 차지하는 비중이 컸죠. 또 우리나라 신문에서 읽을 수 있는 거라고는 사컷 만화나 만평 뿐이었는데, 일본 신문은 보니까 만화가 반 면을 다 차지하고 있는 거에요. (<천년여왕>)
Q. 그럼 그때부터 일본어를 할 줄 아셨던 건가요?
A. 몰랐죠. (웃음) 당연히 몰랐고 다만 일찍 읽을 수 있었어요. 공부를 한 것은 아니고, 만화를 읽으면서 글자 수를 맞추는 거죠. 마징가 제트라고 일본어로 써있으면 글자를 찾아서 맞춰가는 식으로 읽었어요. 아버지한테 '이게 마(マ)야?'라고 여쭤보면 '어 맞아' 이런 식이었죠. 그렇게 일본어를 읽을 수는 있게 됐어요. 일본어를 하는 게 아니라.
소공동 중국대사관 앞에는 외국 서적을 전문적으로 파는 골목이 있었어요. 또 시청 앞 호텔 뒷편의 가판대에는 호텔 투숙객들이 놓고 가는 잡지들을 수거해서 파는 아저씨들이 있었어요. 그때 제 기억으로는 일본 엔화하고 한국 원화의 환율이 1대 3이었는데, 아버지께서는 제일서적에서 저는 혼자 서점가를 뒤지면서 잡지를 많이 샀어요.
아버지께서 제가 태어나기 전에는 일본 특파원이셨고, 태어난 뒤에는 서울에서 근무하셨는데 그때는 금속 활자로 식자를 하던 시절이었단 말이에요. 80년대가 되면서 신문사에서 전산화를 추진하면서 CTS(Computerized Typesetting System)라고 워드에 글을 입력해서 신문을 인쇄하는 시스템을 도입하려 하죠. 아버지께서 그 일을 주도하셨어요. 일본에서 전자출판을 미리 보셨으니까요. 편집국장을 하셨다가 CTS 도입을 하기로 하면서 전산제작국 국장으로 보직을 변경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구하셨던 잡지 중에 컴퓨터 관련 잡지가 엄청 많았습니다. 뭐, 저는 그림만 미친듯이 찾아봤죠. <팝퓰러 사이언스>, <뉴턴>, <메카닉스>, <로그인>, <팝컴> 이런 잡지들. 앞에 둘은 과학 잡지고, <메카닉스>는 공학 잡지고, 뒤에 둘은 퍼스널 컴퓨터 잡지였거든요. PC 잡지는 절반 가까이 게임 내용이었어요. 게임이 애니메이션이랑 연결이 많이 되어있으니까, 이런 식으로 분야도 겹치게 됐던 거죠. 그런데 저는 그때 게임을 별로 안 좋아했던 게, 애니메이션이랑 비교하면 게임화되어서 나온 게 너무 퀄리티가 안 좋았던 거에요.
Q. 어떤 게임이 기억에 남으시나요?
A. 16컬러에서 256컬러로 넘어가는 과도기 쯤에 일본에서 PC 시장이 열리고, 8비트 게임들이 쏟아져나왔죠. <로드러너> 같은 게임이 있었고, <킹스밸리>도 그랬고. 애플 II 복제품이 청계천 세운상가를 통해서 퍼져나갔는데 <로드러너> 류는 기본으로 깔아주는 목록에 꼭 포함됐던 거 같아요.
제가 언제 컴퓨터를 처음 만졌는지 생각해 보니까 1983년이네요. 세운상가에 가면 컴퓨터를 부품 단위로 수입해서 조립할 수 있게끔 모듈을 팔았어요. 제 기억에 따르면, 애플 II 보드랑 부품 해적판이 33만 원에서 34만 원 정도였어요. 중학교 동창 한 명이 컴퓨터 덕후였는데, 그걸 구했다는 거예요. 제가 납땜을 할 줄 알았거든요. 친구도 제가 컴퓨터를 좋아하는 줄 알았겠죠. 제가 우연히 6502b(애플 CPU)가 그려진 티셔츠를 입고 다닌 것을 보고는 같은 과라고 생각한 거에요.

Q. 납땜은 어떻게 익혔나요?
A. '007 제작집'이라고 있었습니다. 회로를 만들 수 있었던 회로집 같은 거였죠. 발광 다이오드로만 된 게임기를 만들 수 있었는데, 납땜질을 하면 7 세그먼트와 디지털 회로를 이해할 수 있게 돼요. 그래서 당시에는 그런 제작집을 좋아했던 소년들은 납땜질을 어느 정도 잘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친구네에서 애플 II 해적판을 둘이서 조립한 거에요. 근데 그렇게 연결한 게임이 제 상상이랑 별로였던 거죠.
Q. 유년기 시절의 채윤호에게 게임은 그닥 좋지 않은 이미지였던 것 같습니다. 플레이했던 게임이 기대와 달랐던 건가요?
A. 제 머릿속의 해상도와 게임에서 구현된 해상도 사이에 갭이 컸습니다. 보따리상에게 어렵게 NEC의 PC-8001을 구해서 갖고 논 적이 있어요. 제가 <마징가 제트>를 정말 좋아했는데, 당시에 8001에 읽을 수 있는 <마징가 제트> 게임이 나온 거에요. 카세트 테이프로 된 걸 구해다가 돌렸죠.
멋진 <마징가 제트>의 액션이 나올 줄 알았어요. 딱 켰는데 게임이 정상적으로 로드됐고, 글씨도 나오고, 영문으로 '마징가 제트' 글자도 나왔거든요? 근데 베드 픽셀이 점들이 찍혀있더니 시간이 지나더니만 화면이 조금씩 움직이면서 '삐' 소리가 나더라고요?
그 뒤에 못생긴 호버 파일더가 '지이잉' 내려오더니 조작이 되는 거더라. 좌우로만 이동이 가능하고. 검은 화면 위에 하얀 점을 피해서 화면 맨 밑까지 내려가면 도킹이 완성이 되어서 '마징가 제트' 로봇이 짠 나오는 거에요. (웃음) 그게 다였어요. 그때 애니메이션과 게임의 갭 때문에 게임 자체에 대해서 실망을 좀 많이 했죠.
또 잡지를 보면 기계어 코드가 수록이 되어있었는데, 그걸 따라서 치면 장시간 '노가다'를 한 거에 비해서 나오는 결과물이 개인적으로 보람이 없었어요.
Q. 그런 IP 게임이 그때도 있었군요.
A. 많이 있었어요. 이미 나와 있는 장르를 그때 서로 베끼는 경우가 많았죠. <스페이스 인베이더>가 나온 다음에 그 뒤에 아류 게임이 얼마나 많이 쏟아져 나왔어요? 그런 시기였죠. 특정 하드웨어에서 잘 되는 게임이 나오면 다른 하드웨어에서 호환되는 비슷한 게임이 나오고 그랬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영향 덕에 IBM PC보다는 NEC에서 온 컴퓨터들을 책으로 먼저 접했어요.

Q. 컴퓨터공학과에는 어떻게 진학하게 된 건가요? 원래는 디자인이나 만화 쪽에 관심이 많으셨다고 하셨는데.
A. 아버지께서는 사내 CTS 교육용 책자를 만드실 때 일이 생각나는데 그때 제가 만날 집에서 만화만 보고 있으니까, 사내 교육용 책자에 들어가는 삽화를 저보고 그리라고 시키신 일이 있어요. 그때부터 디자인이랑 (인연이) 있었던 거 같아요. 뭐 그렇게 아버지 잡지 뒤적거리면서 만화, 애니메이션, 프라모델 오타쿠로 살았죠. 그때 오타쿠라는 표현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요. 혼자서 잡지 들여다 보고 좋아하고 그랬던 거에요.
진로를 결정하게 될 때 원래는 컴퓨터를 전공할 생각은 없었어요. 같이 다니던 무리 중에 한 명이 저한테 컴퓨터를 알려줬어요. 집에 컴퓨터가 있는 친구였거든요. 그때 컴퓨터라는 게 영어권에서 만든 물건이니까 한글을 입력하는 게 굉장히 어려운 일이고 한글을 표현하는 것 자체가 많은 노력이 들어간다는 걸 배우게 됐죠. 이 경험이 뒤에 이어지는데요. 컴퓨터를 처음 접할 때는 영어로 하는 게 당연한 건 줄 알고 시작했습니다.
아무튼 컴퓨터란 것도 이렇게 저렇게 나름 만져보니까 잘 맞는 거에요. 그래서 1988년에 대학을 가면서 컴퓨터를 전공하기로 했어요. 코볼(Cobol), 포트란(Fortran), 파스칼(Pascal) 이런 걸 배웠죠. 카드 천공기도 제가 딱 마지막 세대였어요.
Q. 이후에 잠시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에서 일했다고요.
A. 대학교 2학년을 마치고 군대 가기 전에 휴학을 잠깐 했어요. 대학에 가서도 만화, 애니를 좋아하던 오타쿠 무리가 있어서 같이 어울려 다녔어요. 세 명이 같이 다녔는데요. 저만 취미였고 나머지 둘은 진로와 관련이 있었죠. 그때 죽 때리던 프라모델 가게가 있었거든요. 거기서 만날 모여서 수다를 떨었죠. 그때가 한국에 비비탄(BB탄)이 수입되기 시작할 땐데, 새로 들어온 비비탄 총 구경하고 그러면서 놀았어요.
그 가게에 자주 오던 손님 중에 우리보다 서너 살 차이밖에 안 날 것 같은 사람이 있었어요. 알고 보니 애니메이션 하청업체 사장이더라고요. 그 분이 우리가 모였을 때 우리가 그려놓은 그림을 보고 '아저씨들은 뭐 하는 분들이세요?' 하더라고요. 그래서 '얘네는 뭐 준비하고, 나는 군대 가려고 휴학했어요' 이러니까 '(하청업체에) 한 번 놀러오라'고 하더군요.
가봤는데요. 와. 완전 신세계인 거야. (웃음) 우리나라에서도 애니메이션 작업을 하는 걸 그때 알았어요. 어렵게 보던 VHS 비디오가 거기에는 오리지널 레이저 디스크로 쫙 깔려있었어요. 80년대 말부터 90년대 초까지. 우리나라 애니메이션 하청 산업의 전성기였어요. 2000년대부터는 중국이나 동남아로 많이 넘어갔는데, 그때만 해도 일본이나 미국에서 한국으로 애니메이션 외주를 많이 줬죠.
세 명이 프라모델 가게 놀러 갔다가 그 스튜디오에 취업까지 하게 돼요. 사장님이 '너네 여기서 일 해보지 않으련' 하셨던 거죠. 잠깐 그 일을 하다가 군대에 갔어요. 그때는 군대가 30개월이었든요? 다녀와서 학교로 돌아가니까 세상이 달라진 거에요.
Q. 어떻게 말인가요?
A. 컴퓨터가 컬러가 됐죠. 제가 배우던 것들이 더 이상 쓰이지 않게 됐고요. 디스켓이 메인 스토리지가 아니고 하드 디스크라는 게 생겼더라고요? 디스켓은 하드웨어에서 하드를 옮길 때에만 쓰는 장치가 됐죠. 세상이 바뀌었는데 정작 집에는 컴퓨터가 없었으니 미치겠는 거에요. 컴퓨터를 사야 했는데 그때 돈으로 200만 원이었어요. 숙제를 하려면 컴퓨터가 있어야만 했거든요.
지금은 사라진 6개월, 18개월 단기사병 제도가 있어요. 당시 3~4학년 때 친했던 룸메이트 동기가 18개월 단기사병을 다녀왔는데, 그 친구가 군생활 중에 만났던 6개월 단기사병이랑 아주 죽이 잘 맞았다는 거에요. 서로 완전 겜돌이였던 거죠. 두 사람은 게임을 만드는 걸 게임을 하는 것보다 좋아하는 체질이었어요. 제 룸메이트랑 그렇게 잘 맞았던 분이 바로 홍동희 막고야 사장님이었습니다.
저는 제대하고 복학 직전에 홍동희 사장님을 처음 만났습니다. 그게 제 첫 게임 업계 경력입니다.

Q. 복학하자마자 <세균전>의 디자인에 참여하셨다고요.
A. <세균전>이 '오델로'에서 영감을 받은 게임인데, 원래 '오델로'는 흑백의 돌을 놓는데 흑백 버전에서 개발을 시작하다가 이후에 컬러 버전으로 게임을 바꾸는 작업부터 시작했어요.
원래는 일본식 RPG를 초기 기획 단계 중이었는데, RPG는 시간이 많이 들어가니까 빨리 만들 수 있는 <세균전>을 먼저 작업하고 있었던 겁니다. 제가 합류할 때 <세균전>은 이미 홍동희 대표랑 두기(박두기 프로그래머, 채윤호 대표의 대학 동기)랑 이미 로직을 다 완성한 게임이었죠. 스테이지도 레벨도 몇십 개 이상 완성이 된 상황이었으니까요. 컬러 PC가 나오면서 저는 친구 부탁에 비주얼 쪽을 담당하게 된 거에요.
근데 '오델로'가 원래 흑백이다 보니 컬러 버전의 게임은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캐릭터를 입히기로 생각했던 거죠. 색깔도 빨간색, 파란색으로. 그때 제 기준은 기술은 없는데 눈높이만 올라온 상황이었습니다. 어떤 비주얼을 가져야 시장에서 통할 수준이 될지 대략 알고 있었던 거죠. 하지만 군대를 다녀오면서 프로그래밍의 유행이 바뀌니까 해야 하는 게 달라진 거죠.
그때는 한글 OS가 없어서 영문 OS 위에서 한글을 타이핑할 수 있는 '도깨비'를 썼거든요. 그런데 저는 컴퓨터를 영어로 배웠었거든요. 또 그래픽 카드 전국시대였기 때문에 그래픽 카드 별로 코딩을 따로 해줘야 했어요. 저 군대 가기 전에는 허큘리스가 천하를 통일하고 있었는데, 제대하니까 컬러 시대가 되면서 그래픽 카드 종류가 많아졌고, 서로 호환성이 없다보니 카드별로 따로 코딩을 해야 했던 거죠.
답답했죠. 군대 다녀오느라 다 바뀌었는데, 인터넷에 정보 같은 건 없고 컨퍼런스 같은 것도 없던 시절이니까요. 사회 부적응자가 된 거 같았어요. 나는 컴퓨터를 전공하고 있는데, 컴퓨터를 몰랐던 거에요. 막고야에서 <세균전>을 만들면서, 학교 공부를 하면서 컴퓨터를 새로 익히게 된 겁니다. <세균전>은 비주얼은 요즘 용어로 하면 픽셀 아트입니다.
예전 용어로 하면 '도트 노가다'였죠. '오토데스크 애니메이터'(AA)로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는데 한 점 한 점 찍어서 작업을 하고 AA에 스프라이트를 등록하고, 키 프레임을 만들었습니다.

Q. 비슷한 시기로 알고 있는데 <세균전>이 먼저인가요, <폭스레인저>가 먼저인가요?
A. 지금은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는데요. 제가 기억하는 게 맞다면 최초의 <세균전> 패키지가 조금 앞섭니다. 제가 막고야에서 일하기 이전부터 흑백 버전으로 개발되어 나온 <세균전> 패키지가 존재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폭스레인저>가 나온 것으로 기억합니다. 제가 작업한 버전은 이후에 컬러로 작업된 <세균전>이기 때문에 최초의 버전은 아닙니다. 최초 버전의 <세균전>은 모노톤의 패키지였고, 판매량이 많지 않았습니다.
Q. 기록에 따르면, <세균전>이 1만 장 정도 팔렸다고 합니다. 보상은 없었나요?
A. 당시의 개발자들은 디스켓을 대량 구매하고 이 안에 게임을 넣어야 하는데, 이게 다 돈이었거든요. 자체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죠. 마침 국내 대기업들이 비디오 테이프나 카세트 테이프를 만들다가 비슷한 기술로 디스켓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한때 합성섬유 기술이 우리나라 성장기를 이끌었잖아요. 대표적으로 SKC(선경합성섬유)가 있었는데요.
SKC가 자신들이 만든 비디오테이프나 디스켓에 넣을 음악이나 게임 사업을 한 적 있어요. 콘텐츠 사업, 게임 산업의 개념도 없던 시절인데 이걸 한 거죠. 제가 막고야에 합류하기 전의 시점이라서 잘은 모르지만, 홍 대표님께서 해줬던 이야기로는 SKC에 들어가서 <세균전>을 만들 건지, 독립해서 게임 개발을 완성할 건지에 대해서 논의가 있었다고 해요.
생각해보면 서로 그런 거죠. '우리(SKC)는 유통망과 정보망이 있어', '그래? 우리(막고야) 말고 한국에 게임사가 또 있어?'... 그러다가 결국 SKC에 유리한 조건으로 계약이 체결됐을 거에요. 셋이서 조그만 방에서 개발을 했는데요. 밥 먹어야죠. 스타트업, 초기 투자 이런 개념도 없었으니까 자영업보다 못한 환경에서 모여서 게임을 만드느라 개발비가 다 쓰였을 거에요. 그 정도로 두 분은 게임을 좋아하셨던 거고, 저는 옆에서 도운 겁니다.
Q. 당시에(1993년 2월 무렵) 한국에 게임사가 얼마나 많이 있었나요?
A. 기억나는 곳은 네 곳입니다. 저는 막고야에서 고용도 아니고 계약도 아니고 그냥 컴퓨터 셋방살이 하던 입장에서 같이 하고 있었고요.
미리내는 <그날이 오면>, 소프트액션은 <폭스레인저>를 개발하고 있었죠. 만트라라고 한 곳 더 있었는데 <프린세스 메이커>를 한국어로 옮기는 작업을 했던 곳입니다. 업계라고 할 것도 없었지만, 그때 주변에 트렌드가 2개 정도 있었어요. 하나는 슈팅 게임이 유행이었고, 다른 하나는 오프닝 애니메이션을 잘 만들어야 한다는 거였어요. 그게 영화 트레일러처럼 사람을 끌어들인다고 생각한 거죠. <폭스레인저>의 오프닝 애니메이션은 정말 충격이었어요.
네 곳의 개발사가 한 자리에 만난 일이 있는데, 그게 1993년의 일이에요. 그때 용산에 있던 한국통신 지하에서 93' 대전엑스포를 홍보하는 박람회를 열었어요. 그때 게임사들은 전부 돈이 없었죠. 정부에서 지원을 해줘서 게임 쪽 전시도 열게 됐어요. 제가 그 전시회에 <세균전>이 나갈 수 있도록 오프닝 애니메이션 같은 걸 만들어달라는 부탁을 받았어요. 제대하자마자 막고야에서 그 전시회 준비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나머지 회사 사람들이랑 친분도 생기고 그랬죠.
그렇게 한국 패키지게임의 창세기를 경험했습니다. 전시회가 끝나고 <세균전>에 이어서 <요정전사 뒤죽>의 콘셉트 아트랑 초기 기획을 맡다가 떠났어요. 6개월 정도 게임업계에 있었는데, 그때 제 생각은 '이걸로 밥 먹고 살기는 힘들겠더라'였어요. 집도 지하였고, 회사도 지하에 있고, 출퇴근도 지하철로 하고, 밤도 자주 새니까 햇볕을 못 보는 일상을 살게 되면서 생체 리듬은 엉망이 되더라고요. (계속)
[편집자 주] 교차 검증 결과, 비슷한 시기 게임 관련 사업을 진행하던 기업으로는 동서게임채널, 아프로만, 토피아, 으뜸소프트, 미키소프트 등등이 있었다. 막고야, 미리내, 그리고 소프트액션은 게임을 직접 만든 개발사에 해당한다. 만트라는 1994년 팔콤의 <이스 II>를 기반으로 한 <이스 II 스페셜>을 만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