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니지>의 잡부' 채윤호는 2001년 미국에서 놀라운 일을 겪습니다.
그는 이틀 일찍 귀국한 덕에 9.11테러의 참상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리니지> 사운드트랙을 녹음하러 간 길에 엔씨소프트와 데스티네이션 게임즈의 역사적 미팅 자리에 우연히 동석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두 회사는 서로에 대한 '덕력'을 확인하고 동행을 결정합니다. 이 동행은 훗날 '우주먹튀'로 기억되기도 합니다만, 이 '딜'로 엔씨소프트는 그간 한국 게임사가 겪어본 적 없었던 효과를 누리기도 했습니다.
모쪼록 채윤호, 그의 일대기를 보고 있노라면 마치 영화 <포레스트 검프>를 보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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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디스이즈게임: 그보다 먼저 OST 이야기를 마무리할까요.
A. 채윤호 대표: 사운드트랙 작업은 작전대로 진행이 됐습니다. 20곡이 완성됐죠. 마지막 미국 출장이 2001년 9월 녹음이었는데, 캐피톨 레코드 건물(편집자 주: 미국 캘리포니아의 녹음 스튜디오 건물을 보유한 곳. 프랭크 시나트라, 마이클 잭슨, 비치보이스 등 유명 아티스트들이 녹음한 곳으로 유명)에서 라이브 녹음 작업을 했습니다. 복도에 엘비스 프레슬리와 마이클 잭슨 사진이 걸려있었죠.
10인조 오케스트라를 섭외해서 녹음했습니다. 음악 녹음도 영상 촬영처럼 잘 된 테이크가 있고, 그렇지 않은 테이크가 있습니다. 스튜디오 대여 시간도 비용이기 때문에 리테이크가 많이 나오면 당연히 비용도 더 들고, 아티스트도 힘들게 됩니다. 근데 그게 제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니까요. 합주를 12곡을 해야 하는데요. 그것을 보고 있는데, 제 인생에서 손꼽히는 신비로운 경험이었습니다. 작곡자들도 본인 곡이 연주되는 퀄리티에 만족했고, 놀랍게도 원테이크에 끝나버려서 연주자들도 굉장히 신기해했어요.
리테이크를 대비해서 스튜디오 대여 시간을 넉넉하게 잡았는데, 그래서 시간이 왕창 남았어요. 원래 녹음할 예정이 없었던, 미디로 하려고 했던 곡을 라이브로 하기로 했죠. 안진우 작곡가가 기타로 메인 테마를 연주하는 서정적인 곡이 있어요. 안진우 작곡가가 출장 기간에 악기점에서 산 기타를 직접 꺼내서 그걸 들고 있었는데, 녹음할 예정에 없던 곡을 남은 시간을 활용해 본인이 직접 연주해 녹음하자고 안진우 작곡가가 제안을 했죠. 바로 녹음했고, 아주 예쁘게 잘 나왔어요.
추가로 두 곡을 더 라이브 작업했다고 누가 알아주는 것은 아니었지만, 스스로는 뿌듯했습니다. 나름 미국까지 와서 각 잡고 만든 OST니까요. 이후에 '리니지 월드 챔피언십'을 할 때 믹싱 스튜디오에 외주를 맡길 일이 있었는데 그곳 스튜디오 PD가 저를 알아보시고는 이 작업에 너무 감명을 받았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지금은 게임에 들어간 OST만 가지고 음악회도 하는데, 그때는 그런 게 전혀 없었죠.
작곡자와 연주자와 코디네이터, 저까지 모두 분위기가 좋았습니다. 이 일을 할 수 있어서 너무 뿌듯했고, 저도 커리어에서의 도전이었습니다. '내가 왜 이걸 하고 있지?'와 '근데 이게 되네?' 같은 복잡한 느낌이 동시에 들었습니다.
Q. 이런 시도가 있었기 때문에 훗날 엔씨소프트가 <아이온> 때 양방언 작곡가도 섭외해서 OST를 작업하게 된 것이군요.
A. 제가 퇴사한 뒤에도 그런 것들(음악적 요소)을 잘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PD들이 있었습니다. 또 이후에 '인프라 팀'이라고 사내의 공용 리소스를 생산하는 부서가 생겼습니다. 사운드 이펙트도 게임과 어우러져야 하는데, 외주로 맡기고 끝낼 일이 아니라는 인식을 가지고 만들어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물론 저는 제가 했던 일에 대해서 자랑질하듯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서 민망합니다. 제가 음악이나 사운드 전문 인력도 아니고, 프로도 아니었으니까요.
Q. 출장 뒤에 휴가를 붙였다가 큰일이 날 뻔했다고요.
A. LA에서 안진우 작곡가가 (미국 뉴욕) 퀸즈에 있는 자기 집에 놀러 가자고 했어요. 체재비만 제 돈으로 내고 숙박비는 안 드니까 동부로 넘어가는 비행기표만 내고 한 이틀 놀다 가면 좋지 않을까 생각했던 거죠.
좋아서 회사에다 허락을 맡으려 했더니 '안 돼, 빨리 와'라고 대답이 와서 엄청 투덜거리면서 돌아왔어요. 그게 9월 8일에서 9월 9일 넘어가는 때였죠. 시차 때문에 이틀이 지났고, 그때만 해도 원래 회사에서 잘 때가 많았으니까, 회사에서 잠을 자고 일어났더니… 회의실에 불이 켜져 있고 모두 거기 모여서 TV를 보고 있는 거야. 웬 비행기가 건물을 꽝 하고 박고 있더라고요.
(Q. 9.11?) 맞습니다. 저는 처음에 잠에 덜 깨가지고 '무슨 영화야?' 했는데, 진짜라는 거예요. 그때 생전 처음 느껴보는 이상한 기분을 느꼈죠. 퀸즈에 갔다면 뉴욕에 놀러 갔을 테고, 무역센터 구경을 빼놨을 리 없으니, 시간대를 생각해 보면 저 무렵이었을 것 같은 거예요. 등허리에 땀이 나고, 슬프기도 하고, 무섭기도 한 복잡한 기분이 한꺼번에 몰려오더라고요. 훗날 작곡가님이랑 술을 마시면서 '그런 일이 있었지' 했습니다.
Q. 우여곡절 끝에 완성한 사운드트랙 덕에 평점은 회복을 했습니까?
A. 구체적인 점수까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좋은 평가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사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사건이 엔씨소프트에 일어났거든요.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해드릴 건데, 녹음 때문에 북미 지사에 출장 갔을 때 일이에요. 미국에 내렸는데, 데리러 올 사람이 없어서 버스를 타고 찾아갔어요. 그랬더니 김규호 지사장님(편집자 주: 현 이화여대 산학협력중점교수, 한게임 기술임원 등을 역임) 첫 마디가 "여기까지 버스를 타고 왔어?"였어요. 제 미션은 미국인 코디네이터하고 조이 뉴먼을 만나서 사운드트랙에 관한 미팅을 하면 되는 거니까 지사는 굳이 가지 않아도 됐는데, 간 김에 지사에 들렀던 거예요.
그렇게 지사에 도착한 지 1시간도 안 됐는데, 저더러 갑자기 회의에 들어가야 한다고 그러는 거예요. '아니, 나는 영어도 잘 못하는데 무슨 회의?' 했더니 리처드 개리엇 팀이랑 만난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니까 제이크가 텍사스에 한 번 갔고, 이번엔 그쪽에서 답방을 오는 때였던 거예요. 그 날 하필 제가 북미 지사에 있었던 거고요.
그래서 '제가 왜 들어가요' 했더니 '너도 <리니지> 개발 팀이니 너도 같이 들어가자' 이러는 거예요. 그날의 미팅이 데스티네이션 게임즈를 인수하는 데 씨앗이 되는 역사적인 장면이었던 겁니다.
Q.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았나요?
A. 제가 영어가 잘 안 되는데 그날만큼은 1년 치 영어를 하루에 다 쓸 만큼 내용이 쏙쏙 들어오더라고요. 성공하는 RPG에는 겉에 보이는 것만큼 밑을 받쳐주는 탄탄한 경제 시스템이 필요한데, 라울(편집자 주: 김형진 개발자, 전편 참조)이 첫 직장에서 처음 경험하는 업무임에도 꽤 잘 해나갔던 것 같아요. 회의에 들어갔더니 매체에서나 보던 리처드 개리엇의 얼굴이 먼저 들어와서 신기했고, 마침 경제 시스템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되던 타이밍이었어요.
그날 미팅의 최대 화두가 드레인 시스템이었어요.온라인 사회는 실물 경제랑 달라서 재화가 계속 생기기만 하는데, 차기작에서는 어떻게 재화를 자연스럽게 소모시킬 건지 고민이었어요. <리니지>는 공성전이 재화를 크게 소모시키는 역할을 했습니다. 돈이든 아이템이든 생산만 계속되면, 온라인 사회에서도 결국 인플레이션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모든 아이템을 소모성 아이템으로 구성할 수는 없으니 적절한 선에서 인플레이션을 억제해 주는 시스템이 필요했습니다.
주문서를 넣고 강화를 할 때 일정 확률로 날아가게 만드는 것도 일종의 드레인 시스템이고, 전쟁을 할 때 일시적으로 많은 재화와 아이템이 소멸하는 것도 드레인 시스템이죠. MMORPG에 대한 디테일로 서로의 '덕력'을 확인하면서 스파크가 '파지직' 붙은 거죠. 그 만남이 결국 이어져서 합병의 계기가 되고요. 합병 뉴스로 나오면서, 엔씨의 고민이었던 미국에서의 매스 마케팅 문제도 해결될 수 있었어요.
Q. 원래는 엔씨소프트 이름을 몰랐는데, 데스티네이션 게임즈 인수로 모두가 그들 이름을 알게 됐다?
A. 우리나라 뉴스에서도 크게 보도됐는데 인수 규모가 커서 화제가 된 느낌이라면, 미국에서는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엔씨는 그 이벤트로 월스트리트저널에도 기사가 나면서, 단번에 글로벌한 회사가 되었으니까요. 최근에는 'K' 열풍으로 한국에 오고 싶어하는 외국인도 많다지만, 그때만 해도 코리아는 노스 코리아가 더 유명했고요. 사우스 코리아는 인터넷이 되는지도 몰랐던 나라의 들어보지도 못한 회사가 '엔씨'였으니까요.
하지만 알고 보니, 당시 기준 세계 최대 동접자수를 가진 게임(리니지)을 서비스 중이었고, 그랬기에 EA에서 독립한 리처드 개리엇 팀의 다음 행보를 알리는 중요한 뉴스였던 거죠. 그의 새롭고 혁신적인 MMORPG 차기작을 제작하는 파트너로서 엔씨를 선택했다는 것은 게임 업계에서는 엄청난 뉴스였지요. 리처드 개리엇은 시드 마이어, 윌 라이트, 피터 몰리뉴와 함께 손꼽히는 게임 개발자였고 그런 개발자와 한국의 개발사가 함께한다는 것만으로도 매스 마케팅에 성공한 겁니다.
그것도 그냥 팔고 회사를 팔고 엑시트한 게 아니라, 그 팀이 그대로 자회사로 가서 새로운 MMORPG를 창작한다는 기대감이 생긴 거니까요. 당시의 인수를 계기로 해외에서는 아무런 인지도가 없던 엔씨를 '현시점 전 세계 최다 동접을 보유한 온라인게임 <리니지>를 서비스하는 회사'라고 소개할 수 있게 된 거죠. 그래서 개리엇의 집이 있던 텍사스 오스틴에 지사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편집자 주: 엔씨소프트는 2001년 5월 데스티네이션 게임즈를 인수했다. 리처드 개리엇은 <타뷸라 라사>의 개발에 착수했다. 이 게임은 2007년 11월 출시됐다가, 2009년 2월 서비스를 중단했다. 리처드 개리엇은 2008년 11월 엔씨소프트를 떠났다. 한편, <길드워>의 아레나넷은 엔씨소프트가 데스티네이션 게임즈를 인수한 것으로부터 1년 뒤에 엔씨소프트에 합류했다.

Q. 민원인이 찾아와서 사무실에 '아이템을 돌려내라'는 식의 요구를 하는 '공성전'에 대한 기억은 없으십니까?
A. 항상 있었죠. <리니지>에 개발팀이 3명이던 시절부터 심상치 않은 조짐이 있었어요. 새벽 3시에 갑자기 엘리베이터 벨이 울리더니, 덩치 큰 3인조가 나타났어요. 다짜고짜 '아이템을 사기당했으니 물어내라'고 하더군요.
인지부조화가 와서 '이게 뭐지' 그랬는데, 그때 처음 알았어요. <리니지> 아이템을 현금을 내고 거래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약) 3만 원짜리 정액제 구독권만 팔던 때인데, 갑자기 30만 원짜리 칼을 내놓으라고 난리를 부리니까 이해가 안 됐던 거예요. '우리 아이템이 30만 원이라고?'… 막무가내였지만, 시간이 지나고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리니지>를 즐기는 사람들 중에서 아이템을 현금 거래하는 사람이 생기고, 사기를 치는 사람도 생겨났다는 것을 알게 된 거죠.
<리니지>는 비교적 컨트롤을 쉽게 만든 게임이었는데, 그러다 보니 기존에 게이머로 분류되지 않던 일반인들도 PC방 붐을 타고 <리니지>에 유입이 된 거예요. 저희는 종일 컴퓨터 앞에서 온라인으로만 <리니지>를 보고 있던 사람들이라, PC방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고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유저들끼리는 거리낌 없이 현금을 주고 아이템을 거래하는 문화가 생겨났던 거죠. (아이템 거래) 중개 사이트가 생겨나기 이전의 일입니다.
당시에는 우리에게 그런 경우(유저들이 사무실에 찾아오는 일)에 관한 대응 매뉴얼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 일로 몸살을 앓았죠. 그게 GM와 CS 팀을 만들게 된 계기가 되는 겁니다. 세간에 알려진 '진짜' 공성전은 GM, CS 팀이 생기고 난 이후의 일이에요. 옛날에는 회사 대표 전화로 항의 전화가 오면 개발자가 직접 전화를 받아야 했었죠.
Q. 혹시 기억에 남는 '공성전'이 있나요?
A. 민원인의 요구사항이 점점 거칠어지면서, CS팀도 생기고, 또 강화가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사용자들이 늘어갈수록 민원의 요구도 더욱 많아지고 거칠어졌습니다.
점차 그런 부분에 대한 대응 매뉴얼이 생기고, 시스템적으로도 아이템의 이력에 대해서 트래킹하기 시작했죠. 아이템이 생성되어서 소멸할 때까지, 소유권이 이전하는 개념은 있었지만 아이템이 <와우>에서처럼 귀속된다는 개념은 그때까지 없었습니다.
유저 입장에서는 해킹이라고 하지만, 진짜로 기술적으로 해킹인지 아닌지 여러 시나리오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검증하기 위해서라도 로그에 아이템에 대한 기록을 남길 수 있게 했습니다.
Q. 슬라임 레이스는 어떻게 넣게 된 건가요?
A. 팀에서 슬라임 경주 아이디어가 나왔을 때, 저는 찬성보다는 반대쪽에 가까웠어요. 그냥 저는 '사행성' 콘텐츠에 거부감이 있던 터라. 근데 한편으로는 '뭐 있으나 없으나 있는 리소스 가지고 만드는 거니까'라면서 나쁠 건 없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막상 들어가니까 이게 인기가 너무 좋은 거예요.
게임성 면에서만 생각했지, 그 유저층의 취향을 저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못 했거든요. 역시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 유저층들 취향에 딱 맞았던 거죠. 그래서 굉장히 잘 된 콘텐츠가 됐죠. 라울이 냈던 아이디어로 기억하는데, 잘 되니까 나중에 가서는 공들여서 만들게 됐습니다. 처음에 슬라임 레이스를 한 이유는, 이미 애니메이션도 있고 제작도 심플하고, 색깔이 구분하기도 편하니까 넣은 건데요. 각을 잡고 만들면서 트랙이 설치되죠.
이후에 몬스터나 가축들이나 이런 것들을 레이스의 대상으로 넣으려고 했는데 역시 수명이 길지 못했던 거죠. 나중에 사행성 문제가 제기되면서 싹 사라졌습니다.

Q. 사행성 문제라고 한다면, 당시 전 사회적으로 화제가 됐던 '바다이야기' 사태(2004)를 빼놓을 수 없을 텐데요. 그때 그 사태가 미쳤던 영향을 잠시 떠올려볼까요.
A. 어마어마한 대미지를 받았죠. 별의별 일이 다 있었어요.
PC게임과 이른바 '릴 게임'은 완전히 다른 업계였단 말이죠. 모바일게임은 나오기 전이었고요. 온라인게임이랑 오락실 기판이랑 다른 업계란 말이에요. 그런데 바다 이야기 사건이 터지니까 게임업계에 대한 이미지가 엄청나게 안 좋아진 거죠. 장인어른께 인사를 드리러 갔다가 게임 회사 다닌다고 했더니 분위기가 심각해졌다는 어느 예비 신랑의 이야기도 있었어요.
이제 막 게임에 대한 사회적 이미지가 좋아지려고 하는데 '바다이야기' 때문에 타격이 컸죠. 사람들 표정이 다 안 좋았을 때고. 다들 침울해 하고. 어디 가서 자신이 게임 회사 다닌다고 말을 못 했던 그런 때였습니다. 회사가 돈을 얼마나 버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자신이 일하는 분야에 대해서 자신감을 가질 수 없었을 때였습니다.
Q. 그때는 명함 때문에 곤란한 일도 있었다고요.
A. 초기 명함에는 저희 직책이 없었어요. 회사에서도 닉네임을 붙여서 하레(채윤호 대표 본인), 라울 이런 식으로 불렀죠. 회사가 규모가 커지고 성숙해지면서 여러 문제가 생기더라고요. 명함에 직책이 없으면 은행에 가서 문제가 생기더라고요. 과장 대출 액수랑 이사 대출 액수는 다르잖아요? 회사에 직책을 만들 건지를 놓고 전 직원 투표를 한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현실적인 문제가 이겨버린 거죠.
제가 종종 교육 때 써먹는 레파토리이기도 한데, 미국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직장 상사한테 자유롭게 대하고, 다리 꼬고 얘기하고, 책상 위에 올라가 앉아 있고 그러잖아요. 수평적으로 보이지만, 겉으로 봤을 때 그런 거지, 전혀 그렇지 않아요. 미국은 책임있는 직장 상사가 곧바로 소속 직원을 내보낼 수 있어요. CEO라는 말에서 'O'가 'Officer'(오피서)라는 뜻인데, 군대에서 장교라는 뜻으로도 'Officer'를 씁니다. 철저한 상명하복관계인거죠.
아무튼 오피서라는 말은 그런 곳에서 온 것이기 때문에 그냥 멋있어 보인다고 막 갖다 쓰면 안 된다고 봐요. 이런 것도 의미를 알고 쓰는 게 저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회사의 체계나 기업 문화를 만드는 데 되게 중요한 지점이고요.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