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나드 쏜’, 이 가엾고 딱한 사내의 손에 들린 편지엔 어떤 이야기가 남겨져 있을까.
인디게임, 그중에서도 공포게임을 좋아하는 이들이 주목하고 있는 개발사가 있다. ‘코리안 링귀스틱스 랩(Korean Linguistics Lab)’, 우리말로는 ‘한국어 언어학 연구소’. 한국인 개발자 최세윤이 속한 1인 개발사다.
2019년 그가 선보인 첫 작품 <러브, 샘>은 여러 의미로 파격적이었다. 게임의 내용도 그렇고, 공포적인 연출도 그렇고 “이게 국산 게임이라고?”라는 말이 감탄처럼 튀어나오게 만든다. 기자 역시 여기에 완전히 매료됐던 사람 중 하나다.
그런 그가 지난 3월 30일, 신작으로 돌아왔다. <버나드 쏜의 편지>, 이번에도 역시 공포게임이다. 망설이지 않고 게임을 구매해 즐기고 난 소감을 밝힌다. “왔노라, 보았노라, 그리고 울었노라”라고.
버나드 쏜의 편지 (Letters of Bernard Thorne)
출시일: 2025-03-30
개발사: Korean Linguistics Lab
유통사: Korean Linguistics Lab
플랫폼: 스팀, 스토브
가격: 11,000원
장르명: 공포 어드벤처
리뷰 버전: 스팀
리뷰 빌드: 정식 출시 버전
※ 주의: 아래부터 <버나드 쏜의 편지>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버나드 쏜의 편지’라는 제목은 중의적이다. 무릇 편지에는 보내는 이와 받는 이가 있지 않은가. 그러니 보내는 이, 혹은 받은 이가 누구냐에 따라 제목의 의미도 달라진다. 버나드 쏜이라는 인물이 보낸 편지를 의미할 수도, 반대로 버나드 쏜이 받은 편지를 의미할 수도 있다. 재밌게도 게임의 영문명도 ‘Letters of Bernard Thorne’으로, 여기서도 보낸 이(from)와 받는 이(to)를 찾을 수 없다.
그렇다면 버나드 쏜은 누구인가? 그는 하루하루 진통제를 물에 녹여 삼키는 휠체어 신세의 74세 노인이다. 그는 과거 월남전에 참전해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입었다. 박격포에 맞아 오른손을 못 쓰게 되었지만 그보다 큰 상처는 따로 있으니, 바로 자신을 구하러 온 전우를 죽게 만들었다는 죄책감이었다. 박격포 폭발로 얼굴이 완전히 사라진 전우의 모습은 뒤틀린 괴물의 모습으로 그의 앞에 나타났으며, 당시 하늘을 붉게 물들였던 조명탄은 트라우마로 남아 그의 여생을 괴롭힌다.

월남전 당시 하늘을 붉게 물들였던 조명탄 불빛은 그의 트라우마로 남게 되었으며,

전우를 잃은 충격은 평생 그를 괴롭힌다.
총성과 비명이 빗발치던 월남전 속에서도 인연은 피어났다. 한국군의 간호장교로 참전했던 민영을 만난 것이다. 전쟁이 끝난 뒤 두 사람은 미국에서 부부의 연을 맺었다. 슬하에 아들 하나를 두고 행복한 삶을 이어가던 것도 잠시, 불의의 사고로 그는 자신의 눈앞에서 아내를 잃어야 했다.
의병 전역 이후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민영에게 자주 편지를 보냈다. 자신을 구해준 것에 대한 감사의 뜻도 있지만, 가만히 있어서는 견딜 수 없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고통을 덜어내기 위한 뜻도 있었다. 아내가 세상을 떠난 이후에는 이제 어엿한 가정을 꾸린 아들을 위해 펜을 들어 편지를 썼다. 아니, 정확히는 유서에 더 가까웠다.

전역 후 전기공으로 일하며 아내와 평범한 일상을 살았던 그는

아내를 잃고 난 뒤, 남겨진 아들만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고 일하라고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되뇌었다.
게임은 진행 과정에서 그가 보냈던 편지들을 플레이어에게 하나하나 빠짐없이 보여준다. 만약 제목이 '버나드 쏜이 보낸 편지'를 의미한다면 이토록 기구하고 박복한 그의 삶을 조명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제목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또 다른 의미에 힘을 더 실어주고 싶다. '버나드 쏜이 받은 편지' 말이다. 누가, 언제, 그리고 왜 그에게 편지를 썼는지는 이야기의 결말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는 게임을 통해 직접 확인해보시길.

살면서 그는 참 많은 편지를 썼다.
제목은 그가 쓴 편지를 뜻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가 받은 편지를 뜻하는 것일까?
해석은 우리의 몫이다.
잠깐 개발자의 전작 이야기를 꺼내보겠다. 이번 작품이 전작에서 이어지는 시퀄(sequel)은 아니지만, 두 작품을 나란히 놓고 보면 이번 작품의 좋은 점과 아쉬운 점이 선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전작 <러브, 샘>과 <버나드 쏜의 편지> 모두 과거의 사건을 텍스트로 전달한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차이가 있다면 전작은 일기장 위에, 본작은 편지지 위에 텍스트가 쓰였다는 정도다.
일기장 위에 쓰인 전작의 텍스트는 읽기 좋은 정도로 알맞게 분절되어 있었다. 페이지 단위로 나뉘어 있어 이어지는 내용을 궁금하게 만들었고, 구어체로 쓰인 문장도 자연스러워 소리 내 읽기에 부담이 없었다. 전작이 스트리머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은 것도 이 말맛 있는 문장 덕분이다.
반면, 이번 작품은 텍스트를 편지지 위에 고봉밥처럼 꽉꽉 눌러 담았다. 이런 편지가 게임 곳곳에 등장하는데 내용이 내용인 만큼 대충 읽고 넘길 수도 없고, 낱낱이 읽고 있자니 호흡이 늘어지는 딜레마가 발생한다. 개발자가 말하는 '일상 속 공포'가 이 위압적인 텍스트가 주는 공포를 말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될 정도였다.

전작 <러브, 샘>은 일기장 위에 텍스트가 적절하게 분절되어 있던 반면,

이번 작품에선 텍스트가 편지지 위에 고봉밥처럼 한 가득이라 읽다 보면 호흡이 늘어진다.
다시 전작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자. 전작이 훌륭했다고 평가받는 이유는 무엇인가? 일기장을 읽는 주인공과 일기장 속 화자의 정체를 모호하게 표현해 우리가 그 정체를 추리하게 하다가, 종국에 가서는 날 선 도끼 같은 반전이 우리 안에 얼어붙은 사고를 깨부순다. 이 짜릿한 한 방이 우리의 인상에 진한 자국을 남긴 것이다.
이에 비하면 <버나드 쏜의 편지>는 우리를 게임 속 이야기에 끌어들인다는 느낌이 부족하다. 몇 가지 이유를 찾아보자면, 하나는 게임의 진행 목표에 대한 불충분한 설명이다. 게임이 시작되자마자 주인공 버나드에게 주어지는 목표는 다락방 위로 올라가는 것이다. 점프스케어로 등장한 아내의 환영이 오르라 해서 오를 뿐, 진짜 이유는 게임의 후반부에서야 드러난다.
그런데 아뿔싸, 다락방에 오르기엔 통증이 너무 심하다. 이때부터 집 안 어딘가에 있는 진통제를 찾는 것으로 게임의 목표가 바뀐다. 문제는 당초에 다락방으로 올라가야 하는 이유가 불분명해서 이 과정이 절실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드러나는 주인공의 과거 회상은 몰입의 영역으로 넘어가지 못하고 '감상'의 영역에 머물다 휘발되어 버린다.

진통제를 찾기 위해 창고를 뒤지고

지하실을 누비고

두꺼비집에 콘센트까지 고쳐야 하는 주인공, 그의 나이는 74세다.
앞서 다뤘듯 버나드의 삶이 지나치게 기구하고 박복하다는 점도 몰입을 방해하는 또 다른 이유다. 기자 역시 엔딩에서 눈물을 살짝 삼키긴 했지만, 돌이켜보면 버나드의 삶은 지나치게 신파적이다.
버나드는 월남전에서 유족들이 동료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도록 목숨을 걸고 전우의 시체를 구한 한없이 선한 사람이다. 게다가 아내의 죽음 이후에는 자식 하나만을 바라보며 몸을 사리지 않고 일했던 헌신적인 아버지이기도 하다.
이런 그에게 연민을 느낄 짧은 시간도 없이 게임은 그가 겪은 전쟁과 상실의 고통만을 보여준다. 극단적으로 선한 사람이 겪는 극단적인 비극, 그 둘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어서 오히려 현실과 동떨어진 것처럼 느껴진다. 마치 엔딩을 위해 더해진 작위적인 설정 같다고 할까?
다행히 게임의 후반부에 이르러서는 모든 사건의 전말이 드러난다. 버나드가 왜 굳어가는 몸을 이끌고 다락방을 올라가려고 했던 이유가 밝혀지면서 이야기에 한층 더 몰입할 수 있었다. 여기서 빛을 발한 것이 성우들의 훌륭한 연기다.
게임 내내 덤덤히 자신의 묵은 과거와 회한을 털어내던 버나드가 격한 감정으로 울부짖는 장면은 그 짧은 순간에 죽지 못해 겨우 숨을 이어가는 노인을 연민하게 만들었고, 이어지는 엔딩은 지금까지의 모든 공포와 연민을 해소시키며 카타르시스를 이끌어낸다. 다소 신파적이긴 했지만, 그럼에도 좋은 비극으로 기억에 남게 만드는 훌륭한 장면과 연출이었다.

잠깐의 평화롭고 행복한 일상이 지나고 나면

차가운 현실이 그를 맞이한다.
전작도 그랬지만, 이번 작품에서도 개발자의 대단히 치밀하고 영리한 게임 디자인이 돋보인다.
공포게임에서 플레이어에게 온전한 공포감을 선사하기 위해선 플레이어의 행동을 적절한 수준에서 제한할 필요가 있다. 애써 준비한 연출을 플레이어가 지나쳐버리면 허무할 노릇 아닌가. 일부 공포게임이 플레이어를 무력하게 만드는 것도, 굳이 좁은 공간에서 괴물을 조우하는 것도 결국 플레이어가 오롯이 공포감을 느끼게 만드는 연출이다.
<버나드 쏜의 편지>는 주인공이 탄 휠체어를 활용해 플레이어의 이동을 제한한다. 기자처럼 휠체어 신세를 져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이게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다. 방향전환도 마음처럼 안 되고, 어디 좁은 길에 들어가려면 주차하듯 휠체어를 이리저리 돌려야 한다.
게임 속 버나드의 휠체어도 그렇다. 앞으로 나가는 속도는 한없이 느리고, 고개는 많이 돌아가지 않는데다가 바라보는 방향을 돌리는 것도 쉽지 않다. 이 불편한 조작감 덕분에 플레이어는 화면 속 공포 연출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지켜볼 수밖에 없으며, 뒤에서 들리는 소리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한참을 긴장하며 고개를 돌려야 한다. 즉, 철저히 개발자의 의도대로 연출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디자인이 제대로 통한 구간이 있다. 게임의 후반부에 버나드는 빠른 속도로 쫓아오는 괴물(정체는 밝히지 않겠다)과 추격전을 벌이게 되는데, 이때 집안의 가구들이 그의 앞을 가로막으며 굽이굽이 미로길을 만든다. 타들어 가는 속과 달리 느긋하게 움직이는 휠체어 덕분에 오히려 긴박감 넘치는 추격전이 펼쳐진다.

뒤에서 괴물이 쫓아오는 상황에 저 가구들이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미로를 만드니 절로 비명이 나오더라.
휠체어가 플레이어의 이동을 제한했다면, 게임 내 조명은 플레이어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역할을 맡는다.
주인공 버나드는 암소공포증을 앓고 있어 어두운 공간에 들어가면 공황 발작을 일으킨다. 야심한 밤, 진통제를 찾기 위한 그의 여정을 밝혀주는 빛은 휠체어 옆에 달아둔 태블릿의 손전등 기능과 아버지를 위해 아들이 집 곳곳에 둔 조명 뿐이다. 특별한 지표 없이 조명을 찾아 켜는 것으로 게임의 진행 방향을 알 수 있는데, 이 역시 게임의 긴장감과 몰입감을 꾸준히 유지하는 좋은 디자인이다.
어두운 곳에 가면 어김없이 일어나는 공황발작 때문에 집안 곳곳에 배치된 조명을 켜면서 게임을 진행해야 한다.
전반적인 게임 디자인은 참 좋았지만, 딱 하나 옥에 티를 찾아본다면 중반부의 미로 구간을 꼽겠다. 지하실로 내려간 주인공이 죽은 자신의 환영에게 쫓기며 미로와 퍼즐을 해결하는 구간인데, 이 구간이 다소 길고 단조로워서 앞서 소개한 게임의 개성과 매력이 옅어 진다. 암전된 공간임에도 불구, 필요한 상황에서만 공황 발작이 발생해 애써 쌓아 놓은 설득력을 놓치기도 하고. 개인적으로 이 구간에서 처음으로 게임이 지루하고 조작감이 불편하다고 느꼈다.

중반부에 너무 지루했던 지하실 미로 구간
전작에 이어 이번 작품에서도 개발사는 공포 장르에 대한 자신의 전문성을 확실하게 입증했다. 특유의 연출력과 게임 디자인은 다른 어떤 유명 공포게임과 비교해도 꿀리지 않을 만큼 훌륭했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부분은 텍스트에 녹여낸 말맛이다. 한국어 언어학 연구소라는 개발사명에 걸맞게 살아있는 말로 쓰인 텍스트는 우리에게 자연스럽게 술술 읽힌다. 기자 역시 글을 쓰는 사람인지라 그의 글발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게임을 두 번, 세 번 곱씹다 보면 입안에 묘한 잔맛 하나가 남는다. 때로는 무섭고, 때로는 슬프고, 때로는 안타까운 감정이 독특한 게임 디자인을 만나 요동치듯 흘러가고 나니 약간의 아쉬움이 늦게서야 다가온다. 호흡이 좀 더 일정하게 유지됐으면, 게임 플레이가 좀 더 다양했으면 하는 사소한 아쉬움들이다.
이런 아쉬움으로 평가절하하기엔 <버나드 쏜의 편지>는 충분히 “읽어볼 만한” 문학 같은 작품이다. 단, 소위 ‘유튜브 에디션’으로 가볍게 소비하면 제맛을 못 느낀다. 휠체어의 그 불쾌한 조작감도 놓쳐서는 안 될 중요한 컨텍스트이니, 다시 한 번 강조한다. 한 번쯤 직접 플레이해보시길.

엔딩은 아니지만 가장 충격적이었던 장면 중 하나.
죽음 앞에 선 그에게 온화한 모습으로 등장한 그의 아내는 말없이 그의 목에 손을 집어넣었다.
이유는 직접 확인해보시라.
버나드 쏜의 편지 (Letters of Bernard Thorne)
한줄평
말맛이 살아있는 텍스트, 영리한 게임 디자인 위에 감동 한 꼬집
장점
- 언제 봐도 감탄이 나오는 개발자의 빼어난 글발
- 공포감을 극대화시키는 치밀하고 영리하게 짜여진 게임 디자인
- 눈물샘 자극하는 훌륭한 성우 연기
단점
- 전작에 비해 살짝 아쉬운 스토리텔링
- 지루했던 중반부 지하실 구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