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

[TIG 20] 리니지는 어떻게 만들어졌나 (上): 낭만과 야만 사이

우티 (김재석) | 2025-04-07 18:51:34

<리니지>는 놀라운 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온라인게임이라는 개념이 대중화되기 전인 1998년 9월 상용서비스를 시작해 '에피소드 1: 말하는 섬'에서 동시 접속자 100명을 기록했습니다. 이후 첫 달 동시 접속자 500명, 1,000명을 기록한 이래로 1999년 7월 공성전 시스템과 마법사 직업을 추가하면서 만 명의 동시 접속자를 모았습니다. 2001년 12월, <리니지>의 동시 접속자 수는 18만 명을 돌파합니다. 이 무렵 대만의 국가 전산망이 <리니지>로 모인 트래픽을 감당하지 못해 내려갔다는 이야기도 전설처럼 전해집니다.


<리니지>의 매출은 1998년 2억 원, 1999년 66억 원, 2000년 559억 원, 2001년 1,226억 원으로 폭발적으로 성장합니다. 1998년부터 2009년까지 <리니지>의 누적 매출은 1조 2,899억 원으로 단일 온라인게임 최초 기록이자 국내 문화콘텐츠 상품으로서도 첫 기록입니다.


<리니지>가 걸어온 역사의 시작점에는 채윤호 개발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온라인게임 역사에 한 획을 그은 <리니지>의 팔방미인으로 활약했습니다. 화장지를 구겨 사운드를 입혔고, 캐릭터와 몬스터의 디자인을 구현했고, 유능한 기획자와 함께 던전을 설계하는 한편, 음악 프로듀서로서 게임에 들어갈 정식 OST 앨범을 작업했습니다.


채윤호 나이트 앤 비숍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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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 오타쿠, 한국 게임 개발의 첫 페이지에 뛰어들다 (바로가기)

디지털 국어사전 만들던 엔지니어, 리니지 개발자가 되다 (바로가기)




Q. 디스이즈게임: 엔씨소프트에서는 SI(시스템 통합) 업무도 맡은 적 있다고요.


A. 채윤호 대표: 당시(1997~1998년) 엔씨 SI팀 주 고객이 가톨릭 교구청이었어요. 홈페이지가 많이 만들어질 때였는데, 그때 교구청 자원 봉사자들을 대상으로 프론트 페이지라는 웹 저작 도구를 교육했습니다.

그걸 하면서 <리니지>에서는 (말하는 섬에서) 본토로 가는 배를 만들고, 본토의 맵을 디자인하고 그랬습니다. 요즘 용어로 말하면 레벨디자인이죠. 배경 리소스와 몬스터 이런 것들을 어떻게 집어넣을 거냐. 그러면서 민수와 엔씨소프트 홈페이지 말고 <리니지>용 홈페이지를 만들었어요. 별도의 웹사이트를 만들고 거기에 게임 업데이트랑 게임 업계 소식을 같이 올리려고 했죠.



Q. 게임 잡지나 오늘날 게임 웹진 역할을 겸하려 했던 건가요?


A. 네. <리니지>만 말고 다른 게임에 대해서도요. 그걸 둘이 함께 했어요. 웹 코딩은 제가 하고, 디자인은 민수가 하고, 콘텐츠 매니지먼트는 또 제가 하고. 서버는 어차피 제가 맡았으니까요. 모든 사내 서버는 제가 담당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할 수 있었죠. 그때(<리니지> 베타서비스 시점)는 해외 유저들도 꽤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위한 아티클이나 업데이트될 몬스터나 새로운 지역에 대한 소식을 올려두었죠.


그때 '야, 이걸 누가 봐'라는 이야기가 나왔거든요. 서버 동시 접속자가 20~40명이고, 웹 서버 커뮤니티에서 이야기하던 사람들이 100명 수준이었습니다. 그 유저들하고 계속 이야기하면서 피드백을 반영해서 게임을 만드는 게 큰 일이라고 이야기했고, 그런 문화가 아이네트 시절, 초창기 엔씨에 쭉 이어졌거든요. 콘텐츠를 같이 만들었다는 인식이 그때부터 컸어요. 그때 유저들은 개발자 아이디를 다 알고 있었어요. 


운영팀이 따로 있었던 게 아니기 때문에 '송재경 아이디', '채윤호 아이디', '김민수 아이디'가 다 공개가 되고 있었던 거죠. 그래서 그 아이디가 뜨면 유저들이 모여서 Q&A를 하기도 하고, 짬짬이 같이 사냥을 하거나, 사용성 테스트를 했던 그런 기억이 납니다. 저번에 클래스 2개, 성별 2개라고 말씀을 드렸는데 이어서 여자 엘프를 작업했어요. 남캐보다 여캐를 항상 먼저 작업했던 기억이 납니다.


제이크(송재경 당시 개발실장)는 아이네트 시절에는 유닉스 서버로 <리니지>를 만들었어요. 엔씨로 넘어온 후로는 엔씨가 MS의 솔루션 파트너였기에, 자연스럽게 서버를 윈도우즈 NT로 바꾸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서버를 윈도우즈 NT로 포팅하는 작업을 먼저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Q. 엔씨소프트에 합류한 지 채 1년도 되지 않아 <리니지>가 정식 론칭했습니다. (1998년 9월 1일)


A. 처음에는 게임이 그렇게 빨리 나가도 되는 건지 긴가민가했어요. 왜냐하면 저는 패키지게임(세균전)을 만들었잖아요. 그러니 완성이 게임을 출시한다는 상상할 수가 없었거든요. 근데 이거를 1년 2년 후도 아니고 후에 '출시하지 뭐' 이런 식이니까 개인적으로 황당했어요. 근데 출시해도 된다는 논리가, 듣고 보니까 또 그럴듯한 거야.


'어차피 온라인게임은 끝이 없어', '우리 이런 식으로 계속 업데이트 건데 언제 출시하나 마찬가지야' 그러니까 '그런가?' 하고 설득이 된 거죠. (웃음) 처음에는 '이렇게 완성도가 떨어지는데 어떻게 출시하냐'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는데, 적극적으로 반대하지는 않았어요. '온라인게임이니까 적어도 패키지 시절 힘들게 했던 불법복제는 없겠구나', 이 정도 생각이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때 온라인게임이라는 것을 처음 론칭하다 보니까, 그냥 아무것도 모르고 세상에 내놓는 상황이었거든요. 무료이거나, 베타일 때는 사람이 제법 있다가도 과금이 시작되고, 정식 론칭이 되면 유저가 무조건 빠져나가는 것이 공식이었습니다. 론칭 시점에서는 모두가 그렇게 예측했는데 딱 한 사람만 반대로 예측했었습니다. 근데 그 사람 예측대로 출시하자마자 유저가 올라가더군요. 그 한 사람이 엔씨에서 굉장히 중요한 사람이었습니다.


베타테스트 시절의 <리니지>. " admin이라는 이름으로 개발자가 게임에 직접 접속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지금은 추억을 찾아 나서야지나 볼 수 있는 셀로브가 최강 몬스터로 군림하던 시절"이라는 설명이 있습니다. 어째선지 좌하단의 여성 디자인이 인기가 있었다고 하네요(...)


Q. 그 분이 누구인가요?


A. 출시하면 유저가 늘어날 거라고 사내에서 유일하게 예측한 사람은 배재현 부사장(당시 대리)였습니다. 전동진 대리(편집자 주: 前 블리자드코리아 대표, ​ 원스토어 대표)​가 출시 이후 PC방 영업이라는 것을 개척하면서 그 예측이 맞아 떨어진 거죠.


원래 새로운 엔터테인먼트 트렌드라는 게 대학가에 먼저 들어오잖아요. 그때 저희 집이 연희동이었고, 민수랑 놀던 주 무대가 연희동, 신촌, 연남동이었는데 그때 PC방보다 게임방이 먼저였어요. 콘솔 게임기를 갖다 놓고 노래방 부스 같은 데 들어가서 게임을 하는 거죠. 노래방 기계 대신에 게임 컨트롤러랑 모니터는 있고, 게임기는 카운터에 있어서 거기서 CD를 넣고 실행시켜 주는 그런 모델이었어요. 


그리고 나서 여러 PC가 인터넷으로 연결이 되는 기술적 근간이 마련이 되니까 PC방이 빵 뜨게 된 거죠. 지금 시기(1998년)가 어떤 시기입니까? IMF죠. 실직자들이 넘칠 때라서 시간을 때우려던 사람들이 다 PC방에 모였어요. 그 돈을 내고 그렇게 오래 있을 수 있는 곳이 없었으니까요. 대학가를 중심으로 PC방이 태동했지만, 묘하게 그곳은 직장인과 대학생이 섞여 있던 곳이었던 거죠.


그때 전동진 대리 한 사람만 그 트렌드를 읽고 있었습니다. 회사 전체에서 사업팀이 3명이었고, 그 3명 중에서도 막내였던 걸로 기억해요. 그런데 매일 PC방을 정탐하러 다니면서 가능성을 본 거죠. 그때까지 없던 PC방 영업 모델을 동진이가 뚫은 거고, 그게 <리니지>, <아이온>의 주된 BM이 됐던 거잖아요. 


저는 그(전동진 당시 대리)가 훨씬 더 좋은 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도 PC방을 보지 못했을 때, 이 친구는 사업 감각이 있어서 B2B 모델을 본 거죠. 아직 게임 산업에서 B2B라는 개념이 명확하게 있지 않을 때였어요. 우직하게 그걸(MMORPG의 PC방 사업 모델) 개척해 낸 겁니다. 


최초의 <리니지> 굿즈인 뱃지. 경인지역 총판 연락처가 남겨진 것으로 보아 피씨방에 홍보할 때 함께 사용된 것으로 추정. 채윤호 제공.


Q. 초기 MMORPG의 서버에 대한 전설이 많이 회자되곤 합니다.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있다면요.


A. 세 사람이 앉아 있던 개발팀 섹션에서 조금 떨어진 위치에 있는 작은 방 안에 <리니지> 서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얘(서버)가 자꾸 죽어요. (웃음) 하루에 한 번 두 번은 죽었어요. (A. 비 오는 날에는 게임 접속이 잘 안 된다거나 그런 이야기인가요?) 그 보다도 한참 전에요. 윈도우즈 NT로 포팅한지 얼마 안 됐고, 송 실장님이 이게(윈도우즈 서버) 익숙하지 않고, 그럴 때였죠. 


서버가 죽으면 임시조치로 서버를 다시 켰어요. 사람들이 '접속이 안 된다' 이런 식으로 공식 사이트 게시판에 게시물이 올라오거나, <리니지> 클라이언트에 화면이 멈춰있거나 하면 서버를 껐다 켰죠. 그땐 회사로 전화가 많이 왔어요. 서버가 죽었다고. 나중에는 서버가 죽으면 PC 스피커로 '삐삐삐' 소리가 나게 만들어서 그 서버를 껐다 켜고 그랬어요. 사무실에 있는 누구라도 서버를 재시작할 수 있도록 실행 방법을 알려줬죠.


또 게임이 개발되던 초기(유닉스 서버를 쓰던 시절, 윈도우즈 NT 이후에는 MS SQL을 사용)에는 데이터베이스가 붙어 있지 않았어요. 보안 문제는 있었지만 실험을 빠르게 해볼 수는 있었죠. 게임이 돌아가고 있는 중에 텍스트 숫자를 고쳐 무기의 숫자의 능력치를 고쳐서 테스트를 했습니다.


초창기 유저들은 되게 말도 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지금에야 대부분의 사람들은 국가별로 서버가 분리된 뒤에 들어온 사람들이지만, 초창기는 서버가 그냥 한 대였으니까 전 세계 유저들이 한 서버에 모였죠. 외국인 유저들이 있었는데 의외로 비율이 7 3 정도 됐어요.​ 그 3의 외국인에서 절반은 영어권이고 나머지 절반은 비영어권이었습니다.


근데 이 외국인끼리도 노는 방식 다르더라고요. 북미  유저들은 RPG에 대한 플레이 패턴이라는 있어서요. 사냥하러 나가고, 퀘스트 돌고, 파밍하고 이런 것들이 어느 정도 이제 교육이 있는 상태에서 플레이를 하더라고요. 우리나라 유저들은 그냥 아사리판이었습니다. 사람 만나면 대뜸 칼질하고, 몬스터 만나면 일단 때려잡고, '어! 외국인이다' 하면서 쫓아가 잡고. (웃음)


사람들에게 그나마 익숙한 <리니지>의 모습. 정식 출시 이후의 스크린샷입니다.


야만의 시대이자 낭만의 시대였는데 일본 유저들은 항상 들어가 보면 마을에 사과나무 밑에 모여 있더라고요. 게임에서 일본어 입력은 안 되니까 알파벳으로 글자를 입력하더라고요. 하루는 궁금해서 '너네는 왜 채팅을 하냐. 모여있지 말고 사냥도 하고 월드도 구경해라'라고 이야기했는데 '나가면 죽인다'라는 거야. 이길 수가 없대. GM이 있던 시절도 아니고, 일본 서버가 있던 시절도 아니고. 그래서 제가 걔네들 데리고 같이 사냥을 나가준 적 있어요.


'변신 막대'(편집자 주: <리니지>의 아이템으로 변신 가능한 몬스터 중 하나로 랜덤하게 변신하는 설정을 가지고 있다.)가 생기고 시간이 지나면서 개발자 아이디로 들어가기가 부담스러워졌어요. GM이 있던 때가 아니니까. 변신 막대가 생긴 뒤로는 개구리나 슬라임이나 나무, 울타리 이런 오브젝트로 변신해서 게임을 들여다보고 그랬거든요. (Q. 누가 몬스터처럼 변신해 놓고는 몬스터처럼 움직이면서 다가와서 한 번에 죽인다던지...) 애니메이션 프레임이 적으면 유리했죠.


그게 공속(공격속도), 이속(이동속도)이랑 관련이 있었기 때문에. 어느 날은 사람들이 'PK 마을'이 있다는 거예요. 이상하다? 나는 PK 마을 같은 걸 만든 적이 없는데? 나중에 보니까 그건 편의상 부르는 표현이었고 맵의 어느 허허벌판에 사람들이 PK를 피 터지게 하던 장소가 있었어요. 처음 시작 마을에서 좀 떨어진 곳을 자기들끼리 PK 마을이라고 부른 거예요.



Q. 많은 사람들이 '<리니지>에 손맛이 있었다'라고 기억합니다. 그리고 그 '손맛'에 사운드를 빼놓을 수 없을 텐데요.


A. 사운드 이펙트가 손맛을 만드는 데 일조했다고 평가해 주시는 분들이 많았죠. 나름 신경을 썼는데 캐릭터가 추가할 때마다 제가 사운드 이펙트를 추가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오크 계열을 팰 때 손맛이 좋다고들 하시는데, 제 목소리로 직접 '우, 우' (피격음을) 녹음한 거예요. (웃음) 그때 효과음 라이브러리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요. 제가 폴리(편집자 주: Foley, 영화나 게임의 각종 효과음을 연출하는 것)로 직접 만든 효과음이 많았어요. 화장지를 비벼서 발자국 소리를 내고, 벨트를 휘둘러서 활 소리를 내고요. 칼은 (<리니지> 프로젝트가) 아이네트에 있을 때 만들었는데, 사무실 구석에 양철로 된 쓰레받기가 있더라고요. 그걸 쳐서 칼 소리를 내고 그랬어요. 



Q. '딩동댕동' 하는 최초의 OST도 직접 작곡한 겁니까? PC방에 갈 때마다 그 메인 화면 음악을 들은 기억이 납니다.


A. 그건 아닙니다. 아이네트 때부터 있던 음원인데 PC통신 미디 동호회 중 한 곳에서 받은 것으로 기억합니다. 지금도 예전 유저들은 그때 음악이나 그래픽을 더 좋아하는 분들이 있어요.





Q. 통과 방지와 관련한 에피소드는 없습니까?


A. 이 이야기는 아마 출시 이후였던 같은데요. 초보자 존(Zone)이 필요하다고 해서 이제 유저들을 분산시켜야 된다는 것들에 대한 인식이 생기면서 수련장을 만들었어요. 초창기에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기면 그걸 해결하면서 다음 업데이트에 반영되고 이런 식으로 게임을 운영했던 것 같은데, 지금도 <리니지>에서 되게 중요한 아이덴티티가 통과 방지잖아요. 사람끼리 통과가 안 된다.


그게 불편은 하지만, 또 다른 게임성을 만들어낸 오묘한 양날의 검 같은 거잖아요. 그런데 초창기에도 문제가 됐던 게 맵을 예쁘게 만들면 '길막' 문제가 생겨버린다는 거예요. 수련장 가는 길이 예쁜 오솔길이었는데, 오솔길이니까 좁아야 하잖아. 그런데 거기 이상한 유저가 와가지고는 길을 막고 통행료를 받기 시작한 거예요. 원성이 자자하니까 길을 넓힐 건지, 아니면 이게 예쁘니까 놔두는 게 맞는지 한창 이야기했던 생각이 나네요.


충돌 방지의 백미였던 공성전 콘텐츠. 스크린샷은 첫 인터페이스 변경이 이뤄진 후의 모습.


Q. 그 시절 이야기는 말씀대로 '낭만'이나 '야만'이 넘치는 것 같습니다. 


A. 말하는 섬 선착장에서 있었던 일인데, 선착장은 있는데 배가 없었거든요. 근데 유저 하나가 계속 서 있는 거예요. 그래서 하도 궁금해서 물어봤죠. '뭐 하시는 거냐'고. 그러더니 '배 기다려' 하는 거예요. '현웃'(실제 웃음이) 터졌지. 난 아직 배를 안 만들었는데, 배가 언제 온다는 거지. 그 정도로 사람들이 <리니지> 세계에 몰입감을 느꼈던 것 같아요.


(게임 안에서) 결혼식을 한다거나, 그 당시에 나타난 여러 사회 현상이나 이벤트들이 나타났던 것 같아요. 여기는 나 부캐가 사는 곳이고, 나는 세계에서 완전히 녹아들어서 세계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본인들의 상상력을 최대한 발휘해서 속에 사는 거예요. 지금의 온라인게임하고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부족한 여러 가지 시스템이나 리소스지만, 그걸 갖고 노는 거예요.


바닥에다가 변신 막대기나 돈 같은 아이템들을 쭉 깔아서 꾸민 다음에 스크린샷을 찍고, 기사들이 이렇게 검 들고 도열해 서 있으면 여자 엘프랑 남자 기사가 손잡고 걸어가면서 결혼식 장면을 연출하고, 장로로 변신해서 주례를 보는 것들을 보고 있으면 '이게 뭐지' 싶은 장면들이 많았어요. 그런 것들이 유저들의 상상력에서 나온 거고요. 당연히 유저들 아이디어가 다음번 콘텐츠나 업데이트에 반영될 밖에 없죠.


<리니지>가 <디아블로>를 베꼈다는 말이 많았는데, 오히려 많이 참고한 건 <울티마>랑 <넷핵>이었어요. 어떻게 보면 그때 우리는 <울티마> 같은 걸 만들고 싶다면서 꼴랑 전투 시스템만 만든 건데요. 전투 시스템을 사람들이 워낙 좋아하고, 다른  만들 겨를이 없을 정도로 전투 시스템 중심의 게임이 됐죠. 그게 정체성이 되어버린 거예요. 


그런데 나중에 데스티네이션 게임즈(편집자 주: 개리엇 형제, 스타 롱이 오리진 시스템즈에서 떠난 뒤 2000년 설립한 게임사. 2001년 엔씨소프트에 470억 원에 인수된다.) 미팅을 할 때 오히려 <울티마> 시리즈에서 해볼 건 다 해본 뒤에 "어차피 사람들은 전투에 올인하는데 뭐 하러 쓸데없이 시스템 많이 만들었을까. 전투 중심으로 만들었으면 심플하고 운영도 편하지 않았을까?"라는 고민을 하고 있더군요.


개리엇의 데스티네이션 게임즈가 엔씨소프트에 합류한 것은 2001년 게임 업계 최고의 사건이었습니다.

Q. 최초의 3인방에서 인원 확충은 어떻게 이루어졌습니까?


A. 사업 쪽에서 ​전동진 당시 대리 이야기를 했는데, 개발 쪽에서는 라울(편집자 주: 김형진 前 엔씨소프트 상무, 현재는 스타트업 에누마에 재직 중)가 단연 독보적이었죠. 기획 파트에서 해야 하는 온갖 일을 라울이 맡았어요. 저는 레벨 디자인을 해야 하니까 맵을 만들고, 라울이 한 페이퍼워크를 제가 시각화하는 그런 작업이었죠.


라울은 덕력도 높고 게임, 만화, 영화, 문학을 정말 많이 보는 친구라서 <리니지>에 있었던 그 많은 설정의 구멍을 메웠어요. 그것 때문에 기획이 늘어나기도 했지만, 정리도 빨리 됐어요. 라울이 기획이 가능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나누어서 스케줄링을 하고, 저는 시각화의 관점에서 깎아낼 것을 깎아내고 추가할 것을 추가하고 그러면서 일했습니다. 


최초의 던전은 제가 설계하고, 거기 들어가는 콘텐츠나 시스템은 라울이가 만들고, 몬스터는 민수가 만들고 그랬어요. 배재현 부사장은 저랑 같은 대리 직급이었는데 처음에 만났을 때는 SI 팀에 있다가 게임 쪽으로 '귀순'했습니다. (웃음) 그래서 송재경 실장은 '웰컴' 했죠. 혼자서 서버랑 클라이언트를 다 책임져야 했으니까 그의 존재가 반가웠던 거죠. 훗날 <요구르팅>을 만드는 고동일 PD가 프로그래머로 잠시 합류했고요.


전동진, 김형진은 좀 더 역사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았어야 할 훌륭한 막내들이다... 이 이야기를 이런 기회가 아니면 언제 이야기하나 싶네요. (웃음)


(편집자 주: 배재현 現 엔씨소프트 부사장은 몬스터, NPC의 AI 동작을 제어하는 서버를 작업했다. 김형진 개발자에 따르면 "제가 원하는대로 스크립팅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셔서 던전과 필드의 몹 활동이 매우 다양해졌다"고 술회했다.) 


엔씨소프트 재직 시절의 채윤호 개발자


Q. 김형진 개발자와 함께 만든 <리니지>의 첫 던전 스모크 테스트에서 허망한 일이 있었다고요.


A. 우리가 만든 최초의 던전이야말로 정말 두근두근했죠. 재밌다고 느낄 때까지 충분히 테스트했고, 딱 내놨는데 대차게 까였어요. 지옥 같은 설계 끝에 던전을 내놓았거든요. 여러 가지 트랩도 만들고, 협력 플레이를 유도하는 장치도 만들었는데 유저들이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방식으로 트랩을 깨고 통과하는  보고 경악했어요.


그러니까 이런 기믹이었어요. 두 명이 있어야지만 열 수 있는 문이 있어요. 한쪽이 발판을 밟고 있고, 나머지 한 명이 문 안으로 들어가서 레버를 잡아당기면 발판을 떼어도 문이 열려있는 그런 기믹. 그런 구조로 자연스럽게 만들었고, 우리는 울타리나 돌 같은 걸로 위장을 해서 게임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죠. 근데 유저 한 명이 오더니만, 1초도 고민을 안 하고 그 기믹을 통과하더라고요.


아데나 하나를 딱 꺼내 가지고 발판 위에 올려놓고 유유히 들어가는 거예요. 경악을 했죠. '아 참, 우리 아이템에 무게 개념이 있었지!'. 그렇게 허무하게 트랩이 박살 난거예요. 문을 통과하면 강력한 몬스터가 나오니까 그 던전을 깨지는 못했지만, 야심 차게 만든 트랩들이 무수히 박살 나는 걸 보면서 괴로워하면서 또 재밌어했죠. 그러니까 게임이 유저들이랑 같이 큰다는 느낌도 강했고요.


그러던 어느 날, 본토 던전을 만들 때 일인데요. 창의성이 바닥날 때쯤에 한 층에다가는 아예 던전 자체를 엔씨 로고처럼 만들기로 했어요. 그런 층을 이스터에그처럼 넣었는데 꽤 오래도록 아무도 모르더라고요. 그러다가 언젠가 던전 공략 기사가 나왔을 때 미니맵 스크린샷을 죽 이어 붙이니까 엔씨 모양이 나타나게 되면서 그게 발견된 거죠. 그게 밝혀졌을 때 레벨 디자이너로서의 소소한 재미 같은 게 있더라고요.


시간이 지나서 형진이가 100층짜리 던전을 들고 왔는데, 제가 버럭 했어요. '100개를 어떻게 만들어?'. 그래도 기획자의 의도대로 만들었습니다.



Q. 아직 리니지 OST 이야기는 시작도 안 했습니다. (웃음) 그때 이야기를 해볼까요.


​A. 그걸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엔씨의 북미 지사부터 말해야 해요. 캘리포니아에 지사가 있었고, 동부에서 <리니지>를 열심히 하는 파워 유저가 GM으로 있었죠. 5인 규모의 사무실이었는데, 당시 지사의 미션은 원대했죠. 그런데 미국은 마케팅하기에는 너무 큰 나라였어요. 홍보 자체가 허들이었죠. 의외로 <리니지>가 PC게이머 같은 게임 잡지에서 평가가 나쁘지 않았어요. 나머지 평가가 7~8점인데 음악 부문만 평가가 2점대였죠. 회사에서 OST를 만들자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사내에 그런 일을 하는 인력은 없었고, 자연스럽게 제 일이 됐어요. 상업용 음악은 예산에 비례하는 거였는데 우리는 이제 막 상용화에 성공한 시점이었죠. 처음엔 (OST를 만들자는 제안에) 싫다고 그랬어요. 회사에서는 웅장한 관현악, 또는 오케스트라 음악을 바랐죠. 마침 <글래디에이터>가 개봉할 때였어요.


음악, 음향 업계에서 주워들은 풍월이 있다 보니 이건 제가 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도 꾸역꾸역 하게 됐어요. 2000년 12월 15일, 9개의 샘플곡이 나오게 됐습니다. 해비 메탈에 가까운 기타연주곡 위주로 시안을 만들었는데, 당시의 예산으로는 그 정도가 한계라는 것을 보여주는 신호이기도 했습니다.


근데 2001년이 되니까 <리니지> 매출이 엄청 성장하면서, 저에게 그 미션이 다시 주어진 거죠. 이제는 예산까지 맞춰서 나오니까 제가 피할 수가 없게 된 거예요. 한국에서는 매출이 나오는데 미국에서는 잡지 부록으로 껴놓고 해봐도 잘 진출이 안 됐어요. 2점 나왔던 게임의 배경음악 평점을 올리고 싶다는 의지가 강했습니다. 저는 회사에서 3D 모델링을 하다가, 네트워크를 하다가, 던전을 디자인하다가 이제(2000~2001)는 음악 프로듀서까지 하게 생긴 거죠.



Q. <리니지> 전 분야에 관여를 하게 된 거군요.


A. 저는 주로 '잡부'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당시 제이크는 'mud-dev'라는 곳에서 북미 MMORPG 개발자들이랑 놀고 있었어요. 거기 스타 롱 (Starr Long, <울티마>의 핵심 개발자 중 한 명. 당시 리차드 개리엇 팀의 프로듀서)도 놀고 있었어요. 제이크는 '우리 게임 동접자 이만큼임'이야기를 했고, 북미의 개발자들은 믿지 않았죠. 근데 진짜였거든요. 당시 한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른 인터넷 속도를 가진 나라였고, PC방이 성장하고 있었고, 56k 모뎀에서 VDSL까지 단숨에 왔단 말이에요.


그런데 북미는 아직도 56k 모뎀을 쓰니까 패키지를 배포하지 않으면 게임을 배포할 수가 없는 거예요. 통신비가 많이 나오니까. 그걸 배포할 유통 채널도 마땅치 않았고. 그러다가 제이크가 북미에 가서 서로를 만나게 되고 이러던 시점에 저는 <리니지>에 들어갈 OST를 담당하는 미션을 맡게 됐던 거죠. 억 대의 예산을 지원받고, 생전 처음 해보는 미션을 맡게 된 후, 몇 곡이나 만들고 어떻게 만들어야 되나 몇날 몇일을 나름의 고민끝에 작전을 세웠는데요.


제 작전은 그거였어요. 엠비언스 사운드는 미국인에게 맡기고, 감성적인 음악은 한국인에게 맡겨서 이거를 조합하자. 조이 뉴먼(Joey Newman)​이라는 미국 작곡가를 앞쪽을 맡고, 국내에서 가요 작곡을 많이 해오신 안진우 작곡가가 뒤쪽을 맡았습니다. 그리고 일관성을 위해서 조이 뉴먼이 편곡을 했습니다. 이후에 서로 작업하기 편하도록 제작 지침을 만들었죠.


'이 곡은 이런 상황에서 쓰일 곡이다', '이런 곡을 참고하면 좋겠다', '이렇게는 만들지 말아달라' 이런 식으로 레퍼런스를 만들어서 조이 뉴먼에게 전달했습니다. '이렇게는 만들지 말아달라'는 내용이 신선하고 편했다고 하더라고요.


조이 뉴먼은 회사에 제출하는 마스터 CD와 별개로 MD(미니디스크)에 따로 녹음을 해주기도 했어요.​ 아무튼 그 가이드를 보내놓고, 오케스트라 녹음을 위해서 한국에서 미국으로 날아갔습니다. 그렇게 북미에 날아가고 보니 그곳에서 제 인생에서 예상치 못한 이벤트들이 펼쳐집니다. (계속)


채윤호가 두 음악가에게 공유한 제작 지침 CD(왼쪽), 그가 프로듀서로 참여한 <The Blood Pledge> MD(오른쪽)

[도움 주신 분: 김형진, 송용성, 오영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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