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

[게임과 책] "게임 모르는 상사는 도태된다"… MZ 직원들의 비밀

박한슬 (박한슬) | 2024-10-22 12:59:53

게이미피케이션(Gamification)이라는 개념이 한동안 인기를 끈 적이 있다. 

생소한 분들도 계실 테니, 간략히 설명하자면 이렇다. 우리가 일상에서 의무적으로 수행해야만 하는 과업들은 재미가 없다. 그러니 갖은 방법을 동원해도 자발적으로 참여할 의욕을 보이는 사람은 적다. 그런데 사람들이 게임에는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게임이 수행토록 요구하는 과업을 즐겁게 행하더란 것이다. 여기에 주목해 자발적으로 게임에 참여하게끔 하는 요인들을 일상의 과업에 덧씌워, 일상적 과업을 ‘게임처럼 즐기게’ 만들자는 것이 게이미피케이션의 핵심이다. 

매력적인 착안이었지만, 아쉽게도 이런 접근은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 게임의 외피를 덧씌워도, 사람들은 여전히 일상에서 수행하는 과업에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한 것이다. 물론 아주 성공적인 사례들 – 듀오링고와 같은 학습앱 등 – 도 존재하긴 하나, 다수의 게이미피케이션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법정의무교육에서 제공되는 지루한 동영상 강의 끝에 미니게임 형태로 퀴즈가 나온다는 이유로, 법정의무교육을 진심으로 즐길 사람이 얼마나 있겠나. 서투르게 외양만 덧씌운 게이미피케이션의 전형적인 실패 사례는 성공 사례보다 훨씬 많다.

예비군훈련 원격교육의 퀴즈를 풀면서 흥미를 느끼는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

그렇지만 이런 실패에서도 우리가 배울 점이 있다. 일상의 과업에 게임적 요소를 덧씌우는 게 가능했던 이유를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아무런 유사성이 없는 두 체계를 하나로 묶을 수는 없다. 게임과 현실이 공유하는 부분이 상당히 있으니, 게임 요소의 일부를 끌어와 현실에 덧씌울 수 있던 것 아니겠나. 그렇다면 게이미피케이션의 실패 다음에 나와야만 하는 질문은 왜 그 반대의 경우는 그다지 고려되지 못하냐는 것이다.

현실에 게임적 요소를 덧씌워 게임적 재미를 느낄 수 있다면, 반대로 게임에 현실적 요소를 덧씌웠을 때는 어떨까. 결론부터 얘기하면 게임적 세계관을 통해 대안적 현실을 충실히 학습한 이들은 본인들이 경험한 게임의 세계관을 현실에 덧씌운다. /기고= 박한슬 작가



# 젊은 사람들은 왜 빠른 보상을 요구할까?

예를 들어보자. 최근 장년층들이 신세대에게 갖는 불만 중 하나는 젊은 세대들이 예전보다 ‘참을성’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장년층들이 익숙하게 경험한 세계는 어떤가? 특정한 과업을 수행하고, 그로부터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지연된 보상을 수령하는 게 일반적이다. 사원 시절에 쌓은 야근이 차장 직무의 연봉과 태업으로 보상(?)받는 식이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요즘 젊은이들은 그런 형태의 보상체계를 잘 받아들이지 못하더란 것이다. 이렇게 보상을 늦추는 세계관이 바람직 하느냐는 의문은 잠시만 미뤄두자. 이 예시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건 젊은 층에서 ‘지연된 보상’을 꺼리는 태도가 유년기부터 쌓아온 게임 경험과 무관하지 않다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젊은 세대는 지연된 보상을 견딜 수 없다. 어쩌면 명확한 보상이 따라야 한다는 세계관은 비디오게임에서 왔을지도 모른다. (출처: 이라스토야)

잠시 게임 속으로 들어가 보자. 게임 내에서 수행하는 과업을 흔히 퀘스트(Quest)라 칭하는데, 이런 퀘스트들은 과업 착수 이전에 명확한 보상을 제시하거나 퀘스트 완료 이후 보상이 거의 필연적으로 보장되어 있다. 퀘스트 수행을 통해 캐릭터가 경험치(XP)와 아이템 등의 보상을 얻고, 게임 시나리오를 진행 시켜야만 하기 때문이다. 

도구적 목적을 위해 구성된 장치이지만, 이런 체계가 자리잡은 게임을 유년기부터 반복적으로 즐긴다면 어떨까. 게임 속 NPC를 돕는 친사회적 행동(Prosocial behavior)에는 명확한 보상이 따른다는 세계관을 체득하는 게 자연스러울 것이다. 중국 광저우의과대학 보건관리학부 취보위(邱博宇) 교수의 연구가 말해주듯, 비디오게임 내에서 적절한 행동을 파악하는 판단 회로가 현실에서도 사용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을 이해하고 다시 현실로 돌아와 보자. 선행(善行)과 보상 간의 상관관계가 뚜렷하던 공정한 게임 속 세상과 달리, 현실에서는 보상조차 명확하지 않은 고강도 과업이 쏟아진다. 고과를 평가할 권한을 쥔 상급자 내부에서는 무형의 평판이 누적된다지만, 구체화되고 가시화된 형태의 보상이 언제 돌아올지는 기약이 없다. '세상이 원래 그런 것 아니냐'는 반론도 타당하나, 어릴 때부터 공정한 보상의 경험을 쌓아온 세대에게는 이것이 너무도 낯설고 불편한 세계다.

어릴 때부터 공정한 보상의 경험을 쌓아온 세대에게는 기성세대의 요구가 불편할 수 있다.

이들을 다루기 위해 보상의 지연이 불가피함을 설득하려다 보니, 필연적으로 마찰이 생긴다. 이미 자리잡은 세계관을 바꾸라며 강요할 게 아니라, 차제에 즉시적이고 명시적인 형태로 보상을 잘게 쪼개서 제공하는 게 더 나을 수도 있다는 걸 몰라 생기는 불필요한 갈등이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본인이 게임을 즐기지 않는 장년층일수록 게임에 대해 알아야만 한다.

게임을 적극적으로 즐기거나, 게임을 직접 해보라는 게 아니다. 청년층들이 경험하고 익숙해진 게임의 세계에서는 보상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게임에 참여하는 게이머들이 어떤 게임 내 메커니즘에 따라 플레이를 수행하는지라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일반적인 또래보다 더 나은 형태의 용인(用人)이 가능해진다. 서점에 수두룩하게 깔린 리더쉽 조언보다 이쪽이 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시작이 쉽지 않다. 나는 게임을 즐겨본 적 없는데, 대체 어디서 시작해야 할까. 게임을 즐기는 청년층과 그 문화가 익숙지 않은 장년층 사이의 아득한 간격을 메우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책이 바로 1세대 게임평론가 이상우가 쓴 <게임, 게이머, 플레이>다.


# 캐릭터와 플레이어 중 '성장'하는 것은 누구인가?

장년층이 게임이 제공하는 경험을 얕잡아보는 태도를 보이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게임보다 훨씬 복잡한 현실 세계에서 쌓은 경험이 수십 년인데, 얼핏 봐도 세계를 지나치게 단순화하고 축소한 것처럼 보이는 게임 내에서 쌓은 경험이 그걸 뛰어넘긴 어렵지 않나. 그들에게 놀이에 적합한 형태로 매끄럽게 가공된 게임의 세계관을 풍파로 가득한 현실과 견주는 건 바보 같은 일이다. 

그런데 게임에는 게임만이 제공할 수 있는 독특한 경험이 존재하고, 젊은 세대는 그런 현실에 없는 세계관이 제공하는 경험에 부쩍 익숙해졌다는 걸 이해할 필요가 있다. 대표적 예시가 바로 ‘캐릭터’의 성장이다. 게임이라는 게 원래 자기가 키우는 뭔가가 세지는 게 아니냐면, 조금만 더 읽어보시라. 윗세대에서 흔히 전자오락이라고 칭했던 아케이드 게임류에서는 잘 인지하기 어려우나, 근래 게임의 주류에는 ‘캐릭터의 성장’이라는 개념이 옅든 짙든 포함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과거 아케이드 게임과의 대조를 통해 비교해보면, 캐릭터의 성장이라는 게 얼마나 낯선 요소인지를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어보자. 고전 아케이드 게임의 대표주자 중 하나인 <테트리스>를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다음에 떨어질 블록을 확인하는 동체 시력, 어디다 블록을 쌓아야 하는지에 대한 높은 공간지각력은 물론 빠른 순발력과 블록 쌓기 순서를 결정하는 전략, 끝없는 연습이 필요하다. 즉, 플레이어 본인의 역량 성장이 필수적이다.

그런데 이런 식의 성장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다는 점이 문제다. 게임을 반복적으로 플레이하며 플레이어의 경험이 누적되기는 하지만 플레이어의 태생적 재능이나 나이에 따른 반사 속도 등을 따라잡을 수는 없기에, 결국 플레이어는 성장의 한계에 도달하고 만다. 현실과 엇비슷한 잔혹한 결말이 게임에서도 똑같이 변주되므로, 설정과 배경이 다르다고 한들 게이머가 아케이드 게임에서 경험하는 세계관의 작동 원리는 현실과 그리 다르지 않다. 

<테트리스>를 잘하게 되는 데에도 한계가 있다.

오롯이 나의 재능과 역량 범위 내에서만 성과를 얻는 시리도록 냉정한 세계의 원리를 공유해서다. 그렇지만 이상우가 설명하듯, 롤플레잉게임(RPG) 장르에서 출발한 ‘캐릭터의 성장’은 이와는 결이 전혀 다른 경험을 선사한다. 예컨대 <리니지>를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다수의 게이머가 게임 내에서 조직한 혈맹(길드) 간의 치열한 정치 암투와 같은 부분은 잠시 젖혀두자. 그런 플레이어 간의 고도화된 상호작용을 배제한다면, <리니지>의 실력은 리니지의 캐릭터를 육성하는 데 든 시간에 거의 정비례하여 올라갈 수밖에 없다.

이런 특징은 <테트리스>와의 비교에서 더 극명하게 드러날 수 있는데, <테트리스>는 해당 게임을 1만 시간 이상 플레이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같은 게임을 고작 1시간 플레이한 재능있는 플레이어에게 패배하는 게 흔한 일이다. 그런데 <리니지>에서 1만 시간을 육성한 캐릭터가 고작 1시간 키운 캐릭터에게 질 수는 없다. 이처럼 플레이 경험의 누적이 캐릭터의 강함으로 연결된다는 게 ‘캐릭터 성장’이라는 개념의 핵심이다.

이상우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런 접근은 ‘성장의 부담’을 모두 캐릭터에 전가한 형태다. 플레이어 본인의 플레이 역량을 늘려야만 한다는 부담을 짊어지지 않고도 성장의 재미와 쾌감을 느낄 수 있다니, 얼마나 혁신적인 장치인가. 덕분에 롤플레잉게임(RPG) 게임 장르는 세계 각국의 게이머들을 사로잡았고, 지금은 명시적으로 RPG를 표방하지 않는 게임들도 게임 내 요소로 ‘캐릭터 성장’을 채택하고 있다.

내가 과거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지는 않더라도, 내가 투입한 시간 혹은 투입한 노력에 어느 정도 비례해서 그만큼의 성취가 돌아오는 경험이 지금 세대의 게이머들에게는 무척이나 친숙하고 당연한 개념이 된 것이다. 그런 장치가 작동하지 않는 현실에 대해 유독 더 적개감을 표출하는 젊은 세대의 전형성이 이 자장(磁場)에서 벗어나 있다고 볼 수 있을까.

<테트리스>를 1시간 한 사람이 1만 시간 플레이한 사람을 이길 수 있어도, <리니지>를 1시간 한 사람이 1만 시간 플레이한 사람을 이길 수는 없다.

# 영상 매체와 비교되는 게임적 체험의 의미

특정 세대의 사람들이 시대를 관통하는 매체의 영향을 깊게 받는다는 건 당연한 얘기이나, 게임을 조금 더 특별하게 하는 지점은 따로 있다. 게임은 플레이어가 게임 요소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서사를 만들고, 게임을 진행해 나간다는 점이다. 소설과 같은 텍스트 매체는 물론이고 영화나 드라마 같은 영상매체와도 구분되는 게임만의 고유성 중 하나다.

게임 대중화 이전에 가장 선호되는 유희 거리 중 하나였던 영화를 생각해 보자. 갖은 실험적인 시도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제공하는 플레이 타임은 본질적으로 상영 시간을 넘길 수가 없다. 그 한정된 상영 시간 내에서 영화 내적인 서사를 어떻게, 얼마나 진행 시키느냐를 조절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런데 게임은 그렇지 않다. 통제 가능한 다수의 객체와 상호작용하며 서사의 시간 흐름보다 압도적으로 긴 플레이타임이 유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서사 자체가 없을 수도 있다.

결국 게이머들은 오롯이 스스로의 선택에 따라 게임을 어떻게 즐길지 선택하고, 그만큼의 플레이 타임을 가질 수 있다. 같은 미션을 몇 차례씩 반복하기도 하고, 한 미션도 클리어하지 않은 채로 주어진 자유도를 활용해 본인 깜냥대로 할 일을 하며 보낼 수도 있다. 이런 자유도가 보장되는 탓에 게임 소비의 주체도는 비약적으로 향상되고, 그 순간마다 호출되는 우리의 판단 중추는 ‘게임만을 위한’ 별도의 체계로 존재하기보단 세상을 살아가는 일반적인 사고회로를 빌려올 개연성이 높다. 

젊은 세대를 이해하려면 게임을 이해해야 한다. 사진은 2023년 지스타에 참가하기 위해 부산 벡스코 앞에 선 인파. 작년 지스타에는 19만 7천 명의 관람객이 운집했다.

서사 속에서 캐릭터들의 삶을 추체험하는 방식으로 소비하는 영상매체의 접근법이 아닌, 게임의 향유 시간 자체가 또 다른 대안적 세계에서 보내는 삶의 독특한 편린(片鱗)이 되는 식이다. 전통적인 매체가 제공하는 추체험보다 강도 측면에선 물론 사고방식에 미치는 영향도 훨씬 직접적일 수밖에 없다.

이상우는 책을 통해 이런 게임과 게이머의 관계는 물론 그 소비 양식인 ‘플레이’까지를 꽤 너르게 조망한다. 오락실 게임이 발 딛고 있던 산업 토대가 어떤 게임 형태를 요청했고, 그 결과 당시의 게이머들은 어떻게 반응했는지. 그리고 오락실의 유물론적 토대로부터 해방된 컴퓨터게임이 어떤 상상을 가능케 했는지, RPG 게임의 ‘성취감’ 프로세스가 어떤 구조로 작동하는지를 읽다 보면 옛 민속학자들이 낯선 문명을 해설하는 듯한 기묘한 감각마저 든다. 

디지털 원주민인 90년대생도 이런 생경한 느낌을 받을 진데, 게임이라곤 시간 낭비하는 오락이라고만 여기는 분들이라면 그 이상의 지적 충격을 받으실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 게임을 보면 MZ의 세계관이 보인다

한 가지 아쉬운 지점은 이 책이 2012년에 나왔다, 2021년에 재출간 되는 바람에 약간은 낡아버리고 말았다는 점이다. 책에서 다루는 게임들도 지금 시점에선 반쯤 레거시가 된 상태고, 요즘 문제시되는 ‘가챠’(뽑기) 게임이나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잡아 왕성하게 소비 중인 <롤>, 그리고 게임 바깥의 게임이라 할 수 있는 ‘게임방송’에 대한 내용은 빠져있다.


그렇지만 과거의 유산을 바탕으로 현재의 게임들이 혼종화된 것이라, 동시대의 게임들 그리고 그 게임이 빚어내는 현재 세대의 세계관을 짐작해보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는 않다. 어쩌면 이것 역시도 게임과 같은 주체적인 소비의 일종이라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토대를 마련해준다는 점에서 게임과 관련해서는 꼭 한 번 정도 읽어봄직한 책이라 추천한다.


기고: 박한슬


약대 졸업 후 통계학으로 석사를 받았다. 중앙일보를 비롯한 여러 매체에 글을 싣고 있으며, 세 권의 책을 냈다. 스팀에서 가장 오래 플레이한 게임은 <슬레이 더 스파이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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